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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는 인간 실존 관점에서 자아와 타자의 구별과 일치로부터 시작한다”
“다문화는 인간 실존 관점에서 자아와 타자의 구별과 일치로부터 시작한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3.17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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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_ 50강.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윤리’

‘윤리와 인간의 삶’을 주제로 2016년 4월부터 달려온 ‘문화의 안과 밖’ 강연이 지난 11일(토) 50강 ‘세계화, 다문화 시대의 윤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문화의 안과 밖’은 오는 4월 1일부터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에서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라는 주제로 네 번째 강연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날 진행된 ‘윤리와 인간의 삶’ 마지막 강연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그는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선출은 오늘날 세계화 속에서 한 나라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사유를 촉진한다”라고 운을 떼면서 이날 강연을 풀어나갔다. 그는 “세계화를 가속화한 것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였고 그것은 이윤 극대화와 함께 소득 불평등, 빈곤 심화, 실업률 증가, 자연환경의 파괴 등의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하면서 특유의 사유를 파고들었다.
이날 그의 강연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문화가 인간의 삶에 갖는 의미를 지적한 대목이었다. 김 명예교수는 “문화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면,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보다 높은 차원을 보여주는 데도 문화의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그것은 다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그 안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의 문화로 또 인간 공동체의 의식으로의 승화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또 다른 과제로 이어지는 진단이기도 하다.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이 글은 ‘우리와 타자’, ‘다문화주의’, 이 두 주제를 하나로 묶어 이야기를 펼쳐볼까 한다. 하나는 현재 우리 사회 그리고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다원성?주로 다른 문화들이 하나로 섞이고, 갈등하고, 하나가 되는 현상을 주제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나와 다른 사람을 가르는 것을 주제로 하는 것이다.

정치적 결정과 문화의 변증법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두 가지는 공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을 말한다. 다른 문화를 배경으로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하나로 살아야 하는 것이 오늘의 세계다. 그러나 이 다문화의 세계는, 인간 실존의 관점에서 나와 다른 사람, 자아와 타자의 구별과 일치로부터 시작한다. 거기에서 출발해 집단들의 차이와 구별과 대결이 생기고 그 대결과 화합의 문제가 일어난다. 그런 다음에 이 집단의 대결이 하나로 합치지 않을 수 없는 조건하에서, ‘다문화’ 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하나로 묶여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사고의 방식을 갖는 것을 어떻게 다시 하나의 질서 속에 묶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서 규칙은 어떤 것이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들이 생겨난다. 다시 말하여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에는 실존적 自他가 있다. 이것이 필요에 의해 집단으로 묶일 때, 거기에 다시 집단적 自他의 문제가 일어난다. 그것을 하나로 묶은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다문화, 또는 다원성의 문제다. 이 문제는 물론 여러 다른 문화적 이해 그리고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의 테두리에서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동시에, 그러면서도  하나가 되는 세계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화에서 스스로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사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차이를 수용하고 그것에서 배움을 얻을 관용성의 문제가 다시 반성의 주제가 될 것이다.

괴테의 작품에 「친화력(Wahlverwandtschaften)」이란 것이 있는데, 이 제목은 물질들 사이에 서로 잡아당기고 밀치는 힘이 작용하듯이 사람들 사이에도 그러한 힘들이 작용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감정의 引力은 적절하게 조절되고 양식화돼 사람들로 하여금 집단의 성원이 되게 하는 자원이 된다. 그런 때의 감정은 대체로 관계 조정의 일정한 수단으로 합리화된 감정이다.

그러나 더 큰 주제는 자아와 타자의 통로로서의 문화의 발전이다. 그것은 정신, 이성, 감정을 경유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다른 정체성의 사람들이 하나로 맺어진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의 문화가 되면, 이 통일은 더욱 용이해진다. 그러나 문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감정적 요소인데, 이것이 다시 정신이나 이성의 절제 속에 정화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문화의 양식이 되고, 역사 발전의 산물이 된다. 문화는 일반적으로 다양하고 보편적인 쪽을 항해 진화한다고 할 수 있다.

다문화주의 질서와 인간관계

나는 여러 해전에 「아시아의  인문학적 지평」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다문화의 문제를 간단히 다룬 일이 있다. 그 때 나는 이방 문화 수용에 관한 유르겐 하버마스의 주장을 언급했었다. 하버마스는 독일에 들어오는 이민자를 어떻게 독일 사회가 흡수할 것인가를 논하면서, 문제의 핵심은 문화적 동화를 겨냥 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다문화주의, 다원주의를 분명히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민주주의 체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자는 말이었다. 많은 다른 것과 다양한 것을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본격적으로 다원적 문화를 문제 삼자면, 국가 간의 차이의 문제를 다뤄야 하겠지만, 일단은 한 국경의 테두리를 전제로 하고 다문화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화적 동화를 내세우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의 시대에 다문화의 문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부딪치는 문제일 것이다. 일단은 다문화의 상호 접촉은 한 지역의 문화를 보다 풍요롭고 보다 관용적인 것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문화를 다르게 보존하는 것은 인류의 문화적 자산을 더 풍요롭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가 돼가는 세계에서 모순을 말하는 것이고, 갈등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다문화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여기에서 다문화라는 것은 비서양의 문화가 유입된 것을 말한다. 오늘날 문제되는 다문화는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큰 문화적 영향이 아니라 소수자의 문화를 두고 그것과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나라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문화 변혁이 아니라 한 사회가 어떻게 다문화 상태로 존재하는가가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 문제되는 것은 다문화와 함께 한국 문화의 정체성, 한국인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일이다. 이렇게 한국으로 문제를 옮겨서 생각해보면, 하버마스 교수의 답변도 쉽게 동의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지금에 와서 다루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긴 반성적 연구를 요구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마침 눈에 띄는 하나의 예를 들어 보는 것으로써 대신하기로 한다.

영국의 다문화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제이디 스미스 여사가 작년 말 독일 베를린 소재 ‘세계문화의 집(das Haus der Kulturen der Welt)’에서 세계문학상(Weltliterturpreis)을 받으면서 한 수상연설문의 주제는 ‘다문화주의’였다. 연설의 제목은 「낙관주의와 비관에 관하여」다. 스미스 여사의 세계문학상 수상 연설을 소개하는 것은 그것이 다문화가 가야할 희망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된 내용은 다문화를 수용하는 사회에서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갈등 없는 다문화의 삶에는 그것을 허용하는 정치적 틀이 전제된다. 그의 연설로 봐도, 영국이 그러한 다문화의 삶을 가장 너그럽게 수용하는 사회라는 것을 알게 한다. 스미스 여사의 연설에도 그의 첫 소설 「흰 이빨」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나오지만, 이 소설은 북 런던의 다문화적 다인종적 인간들이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묘사돼 있는 것은, 흑인, 파키스탄인과 백인이 서로 우정을 다지면서 또 서로 도와가면서 살고 있는 일상적 삶이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주목하게 되는 것은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 하지도 않는 북 런던 지역의 사람들이 반드시 그들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대체로 서사적 전개가 약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일정한 방향으로 정리된다. 이야기의 전개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신분상승이든, 초월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의 고양이든 상승의 움직임이 없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의 끝에 나오는 집단행동은 영국 안에 형성된 이질적 문화의 동네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한계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는 다문화이든 단일문화이든 그것에 상관이 없이 흥분된 집단행동은 현대사회의 평범한 세속성의 한계에서 오는 삶의 권태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영국과 같이 가장 민주적이고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사회일수록 평범한 세속성이 삶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면,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보다 높은 차원을 보여주는 데도 문화의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는 단순히 사람들이 하나로 융합해 살 수 있게 하는 세속적 매체일 수만은 없다. 보다 높은 이성과 보다 깊은 감정과 정신의 차원을 느끼게 하고 그것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도 문화의 기능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떤 정신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 심성의 변증법적인 승화를 요구한다(여러 가지 집단주의 그리고 현실 전체를 환하게 알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유혹도 이러한 전체성에 대한 요구 그리고 전체성에 참여하고자 하는 갈망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다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그 안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의 문화로 또 인간 공동체의 의식으로의 승화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더 연구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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