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0:00 (금)
2017 이른 봄, 가르침의 자세를 묻다.
2017 이른 봄, 가르침의 자세를 묻다.
  •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승인 2017.03.06 14: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이연도 중앙대 교수

북송 때 산수화의 대가로 郭熙(1023-1085?)라는 인물이 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걸작이 「早春圖」인데, 필묵의 깊이나 흐름에서 비견될 작품이 얼마 없다고 알려져 있다.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 작품은 ‘1년의 계획을 세우는 봄(一年之計在於春)’이라는 주제가 淡彩로 잘 표현돼 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중국미술사』(장인용 옮김, 다빈치출판사)의 작가 李霖燦은 ‘早春’의 의미가 ‘초봄(初春)’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화폭엔 복숭아꽃의 모습이나 버드나무의 푸름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대기에 아지랑이의 몽롱함이 느껴지고, 들에는 눈 녹아 개울물 흐르며, 길을 걷다 마주치는 흙 언덕들이 고요하게 그 자리에 있을 뿐.” 곽희는 봄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그 시간과 느낌으로 ‘이른 봄(早春)’과 ‘초봄(初春)’이 다르고, ‘봄의 끝(暮春)’과 ‘늦봄(晩春)’ 역시 다르다고 말한다. 그가 지은 『林泉高致』엔 그 제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는데, 지금 이맘 때가 바로 ‘早春’이다.
 
낮에 비치는 햇살의 화사함은 봄인 듯싶은데, 볼에 와 닿는 바람은 여전히 차고, 응달진 곳에 간혹 殘雪도 남아있다. 봄만큼 변화무쌍한 풍경을 보여주는 계절이 또 있을까. 대학의 봄은 학생들의 생기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해마다 다시 오는 봄이 새로운 이유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대학 공간을 누비는 신입생들과 겨울방학을 보내면서 더 깊어진 눈빛으로 만나는 학생들 때문일 것이다. 올 봄의 대학 풍경도 여전하다.

지난 겨울은 매주 반복된 촛불집회와 특검 수사, 그리고 대통령 대리인단의 어깃장과 보수단체의 태극기 시위로 어수선하게 보냈다. 삼일절, 친박단체의 시위에서 태극기와 나란히 등장한 대형 성조기의 모습만큼 우리가 백년의 시간에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보여주는 풍경이 또 있을까. 한 시인의 말이 절로 실감나는 요즘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모든 시대가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어른이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미련과 상처 때문인지 중세의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여태 봉건의 좁은 우물 속을 사는 이들이 있다. 야만의 근대를 악착같이 붙잡고 늘어지고, 끝내 분단 시대를 고집하는 이들이 있다.”(송경동,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2016) 군복을 입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 이들이 버젓이 집회에서, 방송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의결된 작년 말만 하더라도, 사실 요즘 뉴스에 떠오른 보수단체의 저항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특정 인물을 아무리 맹목적으로 지지한다고 해도, 뚜렷한 증거와 상식 앞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최근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최소한의 염치와 인간의 품위를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상상 이상으로 많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촛불집회만큼이나 태극기 시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필요해 보이지만, 눈에 많이 밟히는 모습 중의 하나가 대학생 또래의 젊은이들이 간혹 그들 집회에 보인다는 사실이다. 노년층이 느끼는 박탈감이나 鄕愁, 불안감과 분노는 이해할 수 있지만, 차분히 들어보면 금세 드러날 억지 주장을 강변하는 인사들의 선동에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젊은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잘못해 왔던 걸까. 그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아직은 상식적이라고 자위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덮어도 되는 걸까. 설령 탄핵이 인용되고, 정권 교체가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이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세계는 정보화되고, ‘4차 산업혁명’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지만 우리들의 의식구조는 여전히 1970~80년대의 산업사회에 머물러 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모든 가치를 팽개치고, 공포와 소문의 위협 속에서 자유를 포기한 시대의 유산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활개치고 있다. 그 뿌리는 생각보다 질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가치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의 저항은 예상보다 강고하다. 2017년, 대학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학생들에게 여전히 사회에서 선망하는 것을 좇아가도록 하고, 그들을 여전히 소문과 공포의 노예로 살게 할 것인가. 대학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이 스스로 독립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더 이상 외부의 조작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똑똑한 이들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망쳐왔는지, 오늘의 풍경은 좋은 반면교사의 자료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헌재의 결정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내려지든, 대학의 판도 역시 크게 변화할 것이다. 아직 바람 차고, 간혹 눈발도 날리지만, 이제 봄이 멀지 않았다. 봄꽃처럼 환한 학생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선생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때다. 

 

이연도 중앙대 교양학부·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