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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에서 움튼 말들의 행진, “너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 기억에서 움튼 말들의 행진, “너는 결코 죽지 않았다”
  • 한순미 조선대 자유전공학부·국문학
  • 승인 2017.02.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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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 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19. 5·18의 기억과 말

흩어진 운동화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광주에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이어진 그 열흘간의 항쟁에는 이후 ‘5·18 민주화 운동’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이 붙여졌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역사 기록은 언제나 완전하게 설명되지 않는 여백을 남긴다. 문자화된 역사는 그날 그때의 현장을 세밀하게 기록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말과 글의 한계이자 특권이다. 백일 하에 드러난 명백한 진실을 어둠 속에 감춘다 해도 그 빈틈에서는 다른 말들이 터져 나오고 새로운 사유와 글쓰기가 전개된다.

길 위에 놓인 저 신발들은 어느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전까지 누군가의 발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을 고무신, 슬리퍼, 운동화, 구두는 몇 마디 말로 요약할 수 없는 더 많은 말들을 들려준다.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진압에 맞서 맨몸으로 싸웠던 사람들, 희뿌연 먼지에 가려진 무장한 군인들, 주인을 잃은 신발들, 그 이름붙일 수 없는 것들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으며 간결하게 치장한 추모와 애도의 언사를 거절한다.

“너는 결코 죽지 않았다. 겨우 지게 두 짐만큼의 진흙더미를 가슴 위에 올려 놓고 일어서지 못하는 한줌 삭아빠진 시신을, 그리고 흙 묻은 뼈다귀와 부패한 살점의 악취와 흐물거리는 오장의 어디쯤에 틀어박혀 있을 종류 미상의 녹슬은 쇠붙이 파편 몇 개를 어떻게 너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냐. 어찌 한 인간의 생명이 고작 육신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랴.”(임철우, 「봄날」, 『그리운 남쪽』 중에서.)

그러니까, 그날 이후 ‘나’는/‘우리’는 ‘너’들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너’는 ‘나’의 기억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잊힌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너’들이 외쳤던 함성, 광주 바깥에 있던 당신들을 애타게 부르던 소리, 꽉 닫힌 방문을 잡아끌며 간절하게 당신들을 찾아 헤매던 몸짓은, 대체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질문한다. 

그해 봄날, 광주 학살의 장면이 담긴 숱한 사진들에는 차마 말이 되지 못한 수많은 말들이 망각, 은폐돼 있다. 5·18에 대한 진실 규명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 웅성거림을 더 듣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날 그곳에서 어떤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지, 저 운동화를 신었던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다른 기억과 말 사이에 묻힌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가운데 비로소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5·18광주가 우리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는 그처럼 쉽게 말해질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계속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말이란 세 치 혓바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그것은 손짓과 발짓과 몸짓으로, 온몸으로 전해야만 하는 것임을, 마침내 너희 스스로 깨닫게 될 때까지”(임철우, 「봄날」, 『그리운 남쪽』 중에서) 
 
몸이 하는 말

어떻게 해서 그토록 뜨거운 저항과 사랑의 물결이 광주 오월의 거리 위에서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일까. 무시무시한 총과 무차별적인 구타가 백주대낮에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던 그 길 위에 모여든 평범한 사람들. 그들이 위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잔인한 국가폭력 앞에서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힘도 없이 쓰러진 타인의 고통에 연루된 사람들이 이룩한 ‘절대공동체’의 신비는 어쩌면 죽은 자들의 ‘몸이 하는 말’에 이끌렸던 그 순간에 발휘된 어떤 힘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 흩어진 운동화들. 그전까지 누군가의 발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을 고무신, 슬리퍼, 운동화, 구두는. 사진제공=5·18기념재단

고통의 힘, 분노의 힘은 눈앞에서 무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너’의 몸들에서 나온 것이다. 그 힘은 침묵하고 있던 시체들에 빙의된 또 다른 몸들에게서 촉발된 것이다. 널려 있는 시체들을 목도한 순간에 생겨난 저항은 시체들에 온몸을 기울여 그 고통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면서 분리하는 순간에 생겨난다. 고통과 저항이 연대해 점화된 사랑의 불꽃은, 그러므로, 앞으로 또 다시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를 학살과 폭력을 미리 거절하는 미래형을 뜻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다만 희생되지 않기 위해 거기에서 한 몸이 됐던 사람들에겐 고통과 분노, 저항과 두려움, 사랑과 죽음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말들이 아니었다. 광주의 오월이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준 사랑은 이런 것이었으리라. 폭력과 학살, 고문과 구타로 점철된 광주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을 끊임없이 말하고 기억하는 것이 사랑의 다른 행위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 5·18광주에서 전승된 사랑이란, 관 속에 드러누운 한 개의 몸이 입고 있었을 ‘무색 꽃무늬’ 상의와 ‘예비 군복’ 하의가 전하는 말을 듣고 옮겨 적는 것이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자리한 격절한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가버린 이들에게 온몸을 다해 달려가는 가쁜 숨결과 몸짓.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5·18은 분단 이후 우리의 삶에 내장된 아픔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사건이었다. 그날을 통과하면서 이전에 통용됐던 몇몇 언어들은 단일한 의미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중층적인 성격을 지니게 됐다.

“형이 없어졌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사람이 죽기도 했지만 그때는 유언비어도 심했거든요. (…) 다음날 헬기에서 뿌려대는 찌라시에는 그 사람들이 간첩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럼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그 사람이 간첩이었대’라며 혼란스러워했어요. 언론이고 뭐고 다 차단돼 있었으니까 무지했죠. 그저 ‘간첩이구나!’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어른들은 심적으로는 동지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동네 아주머니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뭘 만들어서 그 사람들이 오면 퍼주고 작은 상점을 하던 분들은 음료수 같은 걸 올려주었으니까요.”(조승기, 1980년 당시 10세, 문선희 사진 증언집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중에서)

위의 증언은 언론이 차단된 채 시민군을 ‘간첩’으로 낙인찍은 유인물이 배포됐던 상황, 한편 광주 사람들은 그 시민군들을 ‘동지’라는 여기면서 주먹밥을 나누던 모습, 이질적이고 혼란스러운 풍경을 펼쳐준다. 일렬로 배치된 트럭을 사이에 두고 철모와 총으로 무장한 계엄군들과, 발가벗긴 채 쫓기고 있는 시민군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그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마주해 싸워야 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적’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 관 속에 드러누운 한 개의 몸이 입고 있었을 ‘무색 꽃무늬’ 상의와 ‘예비 군복’ 하의. 사진제공=5·18기념재단

1980년 5월 27일 숨어 있던 시민군을 발견한 계엄군이 “지가 뭔데 태극기를 품고 있어. 이 새끼 간첩이 아닌가. 빨갱이 아냐”(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엮음,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라고 말한 것에서 우리는 그 광장에서 휘날리던 ‘태극기’가 ‘간첩’과 ‘빨갱이’를 식별하는 표지가 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태극기로 시체들을 감싸고 ‘애국가’를 부르던 사람들은 불과 며칠 만에 ‘폭도’, ‘불순분자’, ‘극렬분자’로 내몰린 것이다.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된 섬, 광주에 외롭게 갇힌 사람들에게 소문과 유언비어는 울분을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구멍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충분히 표출될 수 없었던 적의, 분노, 원한, 슬픔, 허기, 증오 등 정리되지 않는 감정의 응어리를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해 5월 광주에서는 웅성거림과 웅얼거림이 하나였다. 

억울하게 죽은 넋들이 우리의 몸과 말 그리고 이 땅의 숨결과 살결을 만들었다. 못다 한 말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웅성거린다. 기억한다는 행위는 단순하게 지난 일들에 대해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억하고 증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못한 말, 말 없는 소리를 더 듣고 생각하면서 죽은 자들을 대신해 말하는 것까지를 요청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현되지 않은/못한 곳에 접촉할 수 있는 서사적 상상력과 감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식적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말들의 패총에는 충분하게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진실이 간직돼 있을 것이다. 정확한 진상 규명과 더불어, 화해와 치유에 기초한 통일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는 분단 트라우마의 잔해가 스며들어 있는 말들에서 폭력의 기억을 발굴하고 추출하는 일이다. 또 이전과 다르게 말하는 방식으로 부서진 말들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런 과정에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며 훼손된 말들의 의미를 온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역사 쓰기는 다시 태어난 말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1980년 5월 27일 광주 항쟁의 마지막 날, 가두방송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텅 빈 하늘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 목소리를 어떻게 기억하고 말할 것인가.

광주를 증언하는 것은 단지 그날을 온몸으로 겪었던 광주 사람들만의 일이 될 수 없다. 광주 사람들과 광주의 바깥에서 침묵했던 우리들이 증언과 이야기의 주체가 돼야 한다. 오월 광주가 남겨준 부끄러움의 감정은 그날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의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광주와 유사한 폭력이 반복될 조짐이 보일 때마다, 파국의 위기가 임박해 있다는 예감이 밀려올 때마다, 부끄러움은 새로운 사유와 행위를 촉발하는 숨은 힘으로 작동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광주가 상속해준 마음의 무늬다.

1980년 광주는, 결코 죽지 않았다. 광주5·18은 폭력의 기억을 간직한 어둠의 공간이자 새로운 말들이 솟아나고 있는 우물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통일의 시대는 이 언저리에서 다시 꿈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희망을 개시할 수 있는 약속의 장소, 광주에서 움튼 말들의 행진은 광주 그리고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세계의 다른 곳곳에서 공유할 수 있는 말들로 번역되길 기다리고 있다.

 

한순미 조선대 자유전공학부·국문학

필자는 전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저로는 「한센인의 삶과 역사, 그 증언 (불)가능성」, 「고독의 위치: 폭력과 저항의 유착(流着)」, 「나무­몸­시체: 5·18 전후의 역사 폭력을 생각하는 삼각 운동」, 『미적 근대의 주변부: 추방당한 자들의 귀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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