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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 박영배 국민대 명예교수·중세영어사
  • 승인 2017.02.0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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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박영배 국민대 명예교수·중세영어사

2010년 8월말 대학을 떠나 자유인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금년까지 6년 5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퇴임 후 바로 다음 학기부터 작년 봄 학기까지 대학원 강의를 계속해 왔으니 공식적으로 대학을 떠난 것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셈이다. 그 사이 일반대중에게 전공 분야를 알리는 방송 녹화며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특강을 하는 한편, 틈틈이 연구서와 대학교재 그리고 교양서를 몇 권 출간했으니, 나름대로 지금까지 해 오던 연구와 저술활동을 꾸준히 계속해 온 것에 학자로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있다.

퇴임 후에도 연구나 저술활동과 같은 다양한 ‘일’(연구, 특강, 저술)을 꾸준히 계속하는 좋은 예로, 오랫동안 교류해온 일본 학자들이 떠오른다. 일본 학자들과 맨 처음 학문 교류를 시작한 것이 90년 봄 유럽 북부의 한 학술회의에서였으니 벌써 반세기를 넘겼다. 이것이 계기가 됐던 것일까, 몇 년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서 발표를 통해 그들과 학문 교류를 시작해 오늘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오랫동안 필자가 지켜본 많은 일본 학자들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일’에 대한 열정, 연구의 진지함, 그리고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우리 학자들이 많이 본받아야 할 모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연말이 가까워 오면 그들이 보내오는 연하 카드에는 간단한 인사말 이외에 연구 활동에 관한 내용(해외에서의 논문 발표, 연구서 출간 등)이 예외 없이 들어있다. 몇 년 전에 일본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 대한 간단한 논평도 들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인문학 중에서도 중세 인문학 분야를 연구하는 일본 중세학자들의 열정과 진지한 연구태도가 일본을 오늘날 세계 중세인문학의 强國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모든 학문의 礎石이 되는 인문학 연구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대학에서 점차 輕視 돼가는 분위기와는 달리, 일본은 정부나 학술단체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세계 중세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오고 있다. 일본 중세 인문학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우리 인문학의 미래를 생각한다.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당장 성과를 내는 다른 학문과는 달리 인간 중심의 학문으로 미래인재 육성을 위한 국가의 성장 동력과도 관련이 깊은 省察의 학문이다. 인문학 중에서도 필자와 같은 중세 인문학 분야를 연구하는 일본의 중견 학자층만해도 부러움을 넘어 놀라움의 경지에 이른지 이미 오래다.

필자도 이제 7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다. 최근 어느 노 철학자가 펴낸 책에서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까지라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말한 시기에 따르면 필자에게도 황금기가 거의 끝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노 철학자는 그가 말한 황금기를 훨씬 벗어나서 100세 가까운 나이가 됐는데도 왕성하게 활동(강연, 저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황금기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건강과 ‘일’에 따라 개인차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첫째는 신체적, 정신적인 건강이 허락돼야 하고 다음으로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할 터이니까. 이 두 가지 건강과 왕성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된다면 그 시기를 훨씬 넘어서까지도 그가 지적한 황금기는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노 철학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설령 40대라고 하더라도 공부하지 않고 ‘일’을 포기하면 녹스는 기계와 같아서 노쇠하게 된다. 교수의 연구업적 평가가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행된 90년대 중반, 대학에서는 교수의 명예퇴직이 늘어났는데, ‘연구’를 하는 대신 연구와 무관한 다른 ‘일’에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허비한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정년 후에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시간을 활용하기 때문에 한층 더 진지하게 다양한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신체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건강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한 쪽이 건강하지 못하면 ‘일’도 계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가족과 사회에서도 소외되는 노년기를 보내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노년에 접어든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박영배 국민대 명예교수·중세영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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