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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⑪
[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⑪
  • 교수신문
  • 승인 2002.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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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님의 2만날은 1955년 12월 14일이었다. 김흥호(金興浩)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엮은’多夕日誌’(솔 출판사 2001년 발행 전 6권)제 1권에 1955년 12월 14일의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선생님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오늘은 함석헌이 이만 날 되는 날이다. 신촌의 함 선생 댁에서 만두국을 먹다. 이만 날 기념 만두로 포식을 하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보다도 차라리 더 소중한 것은 앞으로 오고 오는 해를 잘하고 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잘잘해는 이만 일이다. 1945년 4월 26일 김교신이 세상 떠나고 그날 나는 20,133일, 함은 16,116일, 김교신은 16,080일이었는데 벌써 3,885일이 지나가서 나는 24,017, 함은 20,000일 되었다. 오늘은 1955년 12월 14일이다.)

나는 그날밤을 함 선생님 댁에서 지새웠다. 열명이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던 생각이 난다. ‘多夕日誌’를 보고서야 그날 낮에 류영모 선생님께서 함 선생님 댁에서 만두국을 드신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날밤 함 선생님은 큰 백지에 이만 날이 되기까지의 당신의 정신의 성장 과정을 그래프로 그려 가지고 나오셨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포물선 모양의 그래프였지만 두 군데에 단애(斷崖)점이 있었다.

류영모와 우찌무라, 두번의 단애점

첫 번째 단애점은 당신이 3·1 독립만세 사건으로 평양고보를 자퇴하고 한두 해가 지난 다음 오산학교에 재입학 했었던 1921년 9월에 새로 부임하신 류영모 교장 선생님을 만나게 된 때요 두 번째 단애점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 유학가서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1924년이었다. 이 해에 그는 일년 먼저 동경고사에 다니고 있었던 김교신의 인도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선생의 성서연구모임에 나가서 처음으로 우찌무라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 해였다. 당신의 이만 날을 살아오는 동안에 당신의 정신세계는 포물선 모양의 곡선으로 완만하게 상승되어 갔지만 류영모 선생님과 우찌무라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 1921년과 1924년 두 곳에서 수직 상승하는 단애점이 나타나 있었다. 그날 밤을 지새우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분명한데 나의 기억에 지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벽에다 붙이신 포물선형의 그래프 두 곳에 수직 상승하는 단애점이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언제 류영모 선생님을 처음 봤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지난번에 언급한 나의 일기장에는 류영모 선생님의 YMCA 집회에 나갔던 일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안농고를 그만 두고 서울에 올라온 1954년 가을부터 몇 년간 류영모 선생님의 목요강좌에 비교적 열심히 참석했던 것은 분명하다. 류 선생님의 목요강좌의 청강생은 10명이 넘는 일이 드물었다. 6·25 사변으로 서울 YMCA 건물은 전소되었고 그 터에 판자집으로 세워진 강의실에 가보면 맨 앞줄에는 함 선생님이 늘 앉아 계셨고 한두 줄 뒤 좌석에 김흥호 선생님이 계셨고 그리고 나이 많으신 여자 분이 몇 분 청강하고 계신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 대여섯 밖에 안되는 청강생을 위해 선생님이 말씀은 오후 두 시에 시작하면 거의 다섯 시가 다 되도록 지속되곤 하였다.

1956년 11월 15일 목요일 일기에는 류 선생님 집회에 나가서 선생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 이런 글이 나온다. ‘빛드려 숨길 막지말고 숨길 드러가는 빛을 고디 보오’ 그리고 ‘드러=入=照, 가림=擇=蔽 빗-가리는 것-先知者, 빚=債=釀, 빛’ 등등이 기록돼 있다. 혹자는 류 선생님을 한글 철학자라고도 말한다. 류 선생님의 일기는 지금도 잘 이해할 수 없는 한글이 수두룩하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써넣은 것이 김흥호 선생의 ‘多夕日誌’다. 나의 같은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ㅊ-참, 철, ㅈ-자라는 것, 자는 것, ㅅ-生命, 생명’ 이런 식이다. 함 선생님의 ‘씨’이라는 단어도 류 선생님이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말이다.

류 선생님이 쓰신 원문은 ‘數十信友 老小男女 登 冠岳山上 讚頌 二三章而 下 …’라는 식으로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김흥호 선생이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한글로 풀어서 써놓은 글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날 류 선생님이 지으신 한시 한 수가 기록되어 있고 이 한시를 김흥호 선생이 한글로 풀어 써놓은 글이 있다. 여기서 그날의 일지 전부를 기록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날 등산하면서 내가 류선생님과 나눈 대화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류선생님은 ‘연주육언심’(戀主六言心) 즉 님을 그리며 대여섯 마디 말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순전히 ‘戀’이라는 한자를 풀이하신 것이었다. 라는 데를 로 바꿔쓰면 바로 ‘戀’자가 六言心으로 풀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류선생님의 사고(思考)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져 간다.

그칠줄 모르는 류 선생님의 思考

그날 나는 류 선생님과 춘원 이광수 선생에 관해서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 나부터도 일제하에서 중학교 다닐 때 춘원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래도 한국사람이라는 깨달음을 받은 것이 사실인데 선생님께서는 젊으셨을 때 오산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광수 선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말씀해 주실 수 없느냐라는 나의 질문에 류 선생님은 한참 계시다가 “그 사람 글쓰는 재주가 좀 있는 사람입죠”라는 짤막한 코멘트가 있었을 뿐 더 이상의 말씀이 없었다. 춘원에 대하여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즉각 느낄 수 있었다.

류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 옆에는 항상 함 선생님이 계셨는데 내가 백운대를 처음 올라갔던 일도 이 두분 선생님을 모시고 갔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 류 선생님 댁이 장하문 밖이었는데 백운대를 내려오면서 장하문 쪽으로 길을 잡았으나 웬일인지 길을 잘못 들어 돌밭에서 밤샘을 했던 일, 어느 날은 어느 분의 댁에서 밤샘을 하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나는 두 선생님 가까이 앉아 있다가 졸음을 못이겨 쓰러져 잤던 모양인데 새벽녘에 잠이 깨어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두분 선생님께서는 어제 저녁에 앉으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던 그 자세 그대로 앉아 계시면서 두서너 분의 깨어있던 분들을 상대로 처음 시작하실 때의 그 모습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장면에 나는 압도되어 몸둘 바를 모르고 당혹했었던 일, 그리고 역시 선생님들을 모시고 성환 국립종축장에 내려가 하루 밤을 지새었던 일, 칠흑같이 어두웠던 밤 나를 상대로 밤하늘을 가리키시며 총총 빛나는 별의 자리들을 열심히 설명하시면서 당신은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는데 그런 자기가 중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쳤으니 참 우습지 않느냐고 웃으셨던 모습 등이 주마등 같이 내 머리를 스쳐간다.

어느날 목요집회에서 당시 미국 선교사가 YMCA 총무 현동안 선생께 랜드로바 자동차 한 대를 선사해서 그 자동차 운전기사가 그 자동차 번호를 가지고 와 풀이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는 것이다. 그 번호가 ‘자 1309’였는데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재삼 내다보구’라고 풀이를 해주었다는 말씀도 내 머리에 남아 있는 재미있는 일화이다. 자 자와 1자에서 ‘재’라는 뜻이 나오고 3은 그대로 삼이고 0은 창을 뜻하니 유리창을 통해 내다본다는 뜻이고 9는 그대로 구로 읽어보면 운전기사는 ‘재삼 내다보구’ 운전에 조심하라는 뜻이라고 풀이해 주었다는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매사를 그냥 흘려 보내시는 일이 없으신 분이었다.

‘인촌 김성수’ 칭찬에 진로 결정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류 선생님이 목요집회에서 하신 말씀 중에서 어느날 장장 두 시가 넘게 ‘인촌 김성수’선생에 대한 말씀을 해주신 일이 나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셨던 일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날 하신 말씀은 잘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좀체로 남을 칭찬하시는 일이 별로 없으신 선생님게서 인촌에 대하여 그가 첩실을 두었었던 일까지 소상하게 소개하시면서 인촌을 극구 칭송하셨던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저분이 저렇게 까지 칭송하시는 인촌에 대한 인상이 내 머리에 굳게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요새 이런 소리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대의 이야기 같이 들리지만 내가 196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학위를 마칠 무렵만 하더라도 국내 대학에 취직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인연으로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그리고 고려대학교에서 초청을 받고 선택에 고민하다가 고려대학교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인촌이 설립한 대학이라는데 있었고 인촌에 대한 존경의 념을 갖도록 해주신 분이 류영모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껏 그때의 선택을 후회해 본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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