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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음악에 반항, 예술의 사회적 역할 모색 … 그이 이름 딴 음악대학 세워져
순수음악에 반항, 예술의 사회적 역할 모색 … 그이 이름 딴 음악대학 세워져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1.10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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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9.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
▲ 한스 아이슬러

쇤베르크와 아이슬러는 사제지간이지만 스승인 쇤베르크가 예술지상주의를 대표한 반면
제자인 아이슬러는 노동자음악, 투쟁음악의 대표자였다.

쇤베르크는 아이슬러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훌륭한 작곡가로 키워줬지만,
아이슬러는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비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을 존중하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길을 갔다.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언급하다 보면 정치적·예술적으로 동반자의 길을 걸은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1898~1962)를 만나게 된다.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만나면 역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스 아이슬러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에서 사망한 오스트리아 국적의 작곡가다. 음악작품 이외에도 음악이론과 영향력 있는 정치적인 글들, 그리고 성악작품 속의 가사나 대사, 즉 오페라의 대본인 ‘리브레토(Libretto)’를 남겼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이슬러는 음악가이자 음악이론가였다. 아이슬러는 단순히 음악가로만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독과 연관된 역사적 인물이다.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아이슬러를 저명한 작곡가로 기억하지만, 20세기 독일사에서 보면 요하네스 R. 베혀의 시에 곡을 붙여 동독국가를 작곡한 사람이다. 음악사와 독일사 두 분야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귀환 후 동독 國歌 작곡 … 음악사와 독일사에 족적 남겨

▲ 한스 아이슬러 동독 우표

망명 음악가들은 수없이 많다. 작곡가가 망명을 갔고, 연주가와 성악가들이 독일을 떠났다. 저명한 음악가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20세기 초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자 음악이론가인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파리를 경유하여 미국 보스턴으로 망명했다.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파울 힌데미트는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작곡가인 쿠르트 바일은 미국으로 망명해 1947년 <라이프(Life)> 잡지가 ‘독일출신 작곡가’라고 표기하자, “나는 독일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 미국 시민권자다”라며 완전히 독일과 등을 돌렸다.

20세기 최고 지휘자 중의 한사람인 오토 클렘페러는 ‘문화 볼셰비키주의자’로 지목돼 공연금지를 당하자 미국으로 망명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됐고, 망명지 미국에서 베토벤, 브람스, 말러 등 독일의 고전파와 낭만파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지휘했다. 20세기 저명한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인 브르노 발터 역시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가 됐다. 지휘자인 프릿츠 부쉬는 드레스덴 ‘젬퍼오퍼’ 음악 총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영국 에든버러로 망명했다. 성악가이자 배우이고 감독인 에른스트 부쉬는 성악가인 부인 에바 부쉬와 함께 소련으로 망명했다. 리하르트 타우버, 요젭 슈미트와 더불어 1930년대 유명 ‘3대 테너’였고, 당시 성공적인 유럽 영화 배우가수였던 얀 키푸라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수많은 음악가들 중에서 한스 아이슬러가 망명음악가로 먼저 떠오른 이유는 가장 먼저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정치사회 인종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아이슬러는 유대인이었고, 공산주의자였다. 보통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1920년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에 대항해 도전적인 투쟁가를 선봉에서서 작곡한 자의식이 강한 음악가였다. 신발을 바꿔 신듯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고단한 망명현실을 이어갔지만 조금도 굽히지 않고, 그리고 쉬지 않고 창작면서 反나치투쟁의 선봉에 서서 도전적으로 작곡을 한 작가가 한스 아이슬러다. 그는 “브레히트는 망명 중에―나 역시 마찬가지로―우리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창작을 했다”라고 회고한 적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망명객이 겪어야만 했던 궁핍한 생활과 모욕을 감수하고 참고 기다려 끝내는 귀환이주를 한 예술인이었다. 망명 중 그 어느 망명객보다도 꿋꿋한 사람이었다. 귀환이주 후는 망명생활동안 그토록 바랐던 새로운 국가건설에 참여해 동독 국가를 작곡까지 했다.

이러한 모든 정황을 스케치하듯 바라보면, 한스 아이슬러는 음악가들 중에서 망명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한스 아이슬러의 족적을 추적해 보면 20세기 독일 사회의 부침과 문제점, 문화사, 망명현실, 귀환이주 문제, 귀환이주 후의 활동상황 및 지식인의 역할, 그리고 신생국가와의 갈등문제 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예술과 사회가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 그리고 예술가의 과제와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반성해보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스승 쇤베르크와 달리 ‘노동자음악’의 길 걸어

한스 아이슬러는 20세기 음악사에서 알반 베르크, 안톤 붸버른과 더불어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후기 수제자, 즉 제2 빈 학파에 속한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20세기 초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자 음악이론가로 ‘無調(Atonale Musik)’를 발전시킨 중심인물로 ‘12음주의’의 창시자였다. ‘12음주의’는 후에 ‘音列主義(Serielle Musik)’로 발전되며 ‘신 음악(new music)’ 작곡의 기초를 놓는다. 쇤베르크와 아이슬러는 사제지간이지만 스승인 쇤베르크가 예술지상주의를 대표한 반면 제자인 아이슬러는 노동자음악, 투쟁음악의 대표자였다. 쇤베르크는 아이슬러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훌륭한 작곡가로 키워줬지만, 아이슬러는 스승을 존경하면서도 비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을 존중하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갔다.

아이슬러는 위대한 유럽 음악의 전통에 반항했고, 위대한 전통에서 탈출구를 모색해 음악의 사회적 기능을 실현하고자 했다. 쇤베르크가 음악은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한 반면, 아이슬러는 음악을 사회주의 발전을 위한 사회적·정치적·미학적 투쟁의 도구로 간주했다. 아이슬러의 음악은 예술지상주의와는 다르게―브레히트가 아이슬러 음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듯이―“어떠한 종류의 생산이라도 기쁨과 윤리적 뒷받침의 원천이 되는, 시대에 대한 강력한 충동과 통찰을 불러 일으켰으며 (……) 새로운 부드러움과 새로운 힘, 인내와 명민함, 초미의 감각과 용의주도함, 그리고 끊임없는 요구와 헌신”으로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한스 아이슬러는 어떻게 하여 전통음악을 거부하고 투쟁음악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이유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당시 유럽의 정치 사회적인 변화 때문이다. 

아이슬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인 아버지 루돌프 아이슬러와 어머니 이다 마리아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모의 재산 덕에 독일 라이프치히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1894년 칸트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아들 아이슬러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철학 박사였다. 아버지는 임마누엘 칸트와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빌헬름 분트에 강한 영향을 받아 독일 관념론을 테제로 설정해 안티테제인 사실주의와 관념론을 ‘합하는 작업(Synthese, 진테제)’에 열중했다. 거의 수입도 없는 생활에도 가정은 돌보지도 않고 오직 고도의 지적 능력을 집중시키며 철학 연구와 저술활동에만 전념했다.

아이슬러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유대인 혈통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독일 슈바벤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고, 당시 어머니의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정육점에서 일하는 하층민이었다. 아이슬러는 후일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해 “나는 두 가지 다른 계급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철학자였고, 어머니는 노동자였다”라고 술회했다. 아이슬러가 이러한 사실을 세간에 알린 것은 ‘두개의 계급’, 즉 학자와 노동자, ‘독일과 오스트리아’, ‘독일의 작센과 오스트리아의 빈’이 서로 만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어린 아이슬러와 형, 그리고 누나는 학문에 대한 아버지의 금욕적인 생활태도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아이슬러의 어린 시절은 물질적 궁핍으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가난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었고, ‘투쟁을 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이슬러는 어머니를 통해 노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정서나 정신이 노동운동과 연결돼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게다가 아버지는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였고, 독일 사민당을 창당한 아우그스트 베벨을 광신적으로 존경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란 형 게르하르트 아이슬러와 누나 루트 핏셔는 자연스럽게 공산당원이 됐다. 1918년 독일 오스트리아 공산당의 선두에 서 있던 누이는 1920년대 잠시이긴 하지만 독일공산당의 의장을 지냈으며, 형은 후일 동독 방송국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브레히트와 함께 연극과 음악 종합 … 사회주의 이론 고취

▲ 브레히트와 한스 아이슬러

독일 라이프치히에 살던 가족은 1901년 빈으로 이사를 했다. 철학 박사인 아버지는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가정교사나 변호사 일을 보던 형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당연히 음악교육을 받을 돈도 없었고, 피아노 한 대 들여 놓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자 아이슬러는 스스로 음악지식을 깨우쳤고, 머릿속으로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대한 스승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만나 그로부터 물심양면으로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음악적으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을 쇤베르크에게서 처음으로 배웠다. 이성과 감정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하나로부터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스승과 결별했다. 그렇게 아이슬러는 빈으로 이주해 성장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복무하기도 했다. 한스 아이슬러는 평생을 오스트리아인이자 빈(비엔나)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았다.

아이슬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귀향하며 귀환병들의 마음에 ‘혁명적 정열’이 불타오르고 있음을 가슴으로 느꼈다. 군주제가 붕괴되고, 혁명적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혁명과 평의회 공화국 소리가 들렸다. 당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전쟁에 패했고, 귀환병들은 부상을 당했고, 먹을 것도 없었다. 그러자 젊은이들은 유일한 피난처가 공산주의라고 믿게 됐다. 아이슬러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 아르놀트 쇤베르크에게서 음악 수업을 마친 후 아이슬러는 활동무대를 베를린으로 옮겼다. 당시 베를린은 음악의 중심지로 빈을 능가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럽의 대도시였고, 독일노동운동의 중심지였다. 베를린에서 피아노 교습을 했고, 노동자합창단을 위해 작곡을 했다. 1926년 독일공산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했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거절당했다. 1927년부터 무대와 영화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1930년부터 브레히트의 교육극 『조치』를 작곡했다. 아이슬러와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 혁명적 행동을 분석하고 음악과 연극의 새로운 종합을 이룩해 냈다. 아이슬러와 브레히트는 교육극을 통해 사회주의 이론을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속에 심어주고자 했다. 그것은 ‘합창’의 형태였다. 음악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집회의 보고자처럼 냉정하고 명확하게 음을 부각시켰다. 토론하고 비판하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브레히트의 여러 시에 음을 붙였고, 무대음악을 작곡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정치적 성향과 예술성 때문에 아이슬러는 망명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1933년 1월 말 나치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아이슬러는 빈에 머물고 있었다. 1월 중순 안톤 폰 베버른의 초청으로 자신의 노동자합창곡을 지휘하기 위해 작은 손가방 하나만 들고 베를린을 떠나 빈에 체류 중이었다. 1933년 1월 30일 게슈타포는 아이슬러의 집을 급습해 수색을 벌였으나 그를 체포하지 못하자 현상금까지 걸며 수배령을 내렸다. 15년의 망명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나치가 아이슬러를 신경질적으로 급습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거대한 선동의 힘이 좌파 투쟁가에―음악 볼쉐비키자들에게―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투쟁가의 대표 음악가는 한스 아이슬러였다. 투쟁가는 나치노래로 둔갑을 했다. 선전선동을 위해 투쟁가는 나치들에게야 말로 절실한 노래였다.

1933년 3월 브레히트와 아이슬러가 창작한 『어머니』와 『조치』중에서 노래몽타주, 합창 몽타주, 대화몽타주가 안톤 베버른의 지휘 하에 빈 콘서트하우스에서 노동자-심포니-콘서트로 열렸다. 이 연주회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최고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로부터  아이슬러는 유럽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 다녔다. 파리에서는 영화음악에 관여했고, 덴마크에 가서는 브레히트를 만났다.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등지를 다녔다. 브레히트는 덴마크 망명시절 수많은 시를 창작했는데, 아이슬러는 이 시들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었다.

1935년 2월부터 5월까지는 미국으로 연주와 강연여행을 다녀왔다. 미국에서 30회 이상의 콘서트를 지휘했다. 연주회에서 독일 나치에 대해 설명했고, 현대 전통음악의 위기와 새로운 노동자음악운동에 대해 강연했다. 미국 연주여행에서 6만의 관중이 환호했고, 8천여명의 성악가가 동원됐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자르란트(Saarland)의 어린이 이주자들이 곤궁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위해 벌인 모금운동 일환이었다. 자르란트는 1935년 투표를 통해 독일에 편입됐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 땅을  떠나야만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 구호단체가 건립됐다. 헤밍웨이나 찰리 채플린 등 수많은 예술가, 지식인들이 이 구호단체를 운영했다. 이 시기 아이슬러는 수용소심포니를 구상했고, 후일 독일심포니에 집어넣었다.     

1936~37년에는 스페인으로 망명해 스페인 내전을 위한 투쟁가를 작곡했다. 투쟁가는 도전적인 노래로 자의식 가득한 讚歌的 성격을 지닌 합창곡이었다. 갈등상황에서 조직화된 집단과 대중이 적의 위협과 자기 자신의 정체성 강화를 위해 사용하는 합창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국가, 계급, 인종집단, 정당, 시민운동, 종교 간의 충돌상황에서 대중들이 집회를 하며 부른 노래였다. 아이슬러는 프랑코 독재를 무너트리기 위해 투쟁가를 작곡했다.

스승 추천으로 UCLA 객원교수 역임… ‘메카시즘’ 광풍 때 추방

1938년 1월 부인과 함께 미국 땅을 다시 밟았다. 미국에서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유럽은 이미 음악과 정치를 결합할 가능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히틀러 독재는 더욱 공고해지고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슬러가 소지한 여권은 6개월짜리 방문비자였다. 게다가 연장불가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 전경

미국에 정착해 살아남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뉴욕에서 보낸 처음 1년은 경제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더구나 좌익이라는 딱지 때문에 비자연장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체류허가를 얻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강구했다. 망명대학이라고 일컬어지는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음악사회학 강의를 맡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고작 아파트 한 달 월세 정도의 수입이었다.   

아마도 아이슬러가 새로운 시작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이즈음일 것이다. 영화음악에 관한 주제로 저술 작업을 구상했다.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의 이름으로 록펠러재단이 후원하는 학술 연구 프로젝트에 신청하는 것이었다. 아이슬러는 매년 3천달러씩 2년 동안 연구비를 지원 받았다. 그렇게 해서 1940년대 아도르노와 영화음악에 관한 저작물 『영화를 위한 작곡』을 공동 저술했다. 1942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영화음악을 작곡했고, 스승 쇤베르크의 추천으로 UCLA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1943년 아카데미 영화음악상(할리우드), 1944년 올해의 최고악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46년 10월 13일을 기해 미국의 내치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소탕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1946년 10월 말 할리우드의 한 기자는 기사를 통해 한스 아이슬러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다른 사람들과, 특히 미국 음악가들과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공산주자라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묻는 심사대 위에 섰고, 이것으로 그의 미국 생활은 마침표를 찍었다. 추방이 그를 기다렸다. 1948년 빈으로 귀환해 18년 만에 아들을 만나고 1949년 동베를린으로 귀환했다.

한스 아이슬러는 공산주의자였고, 순수음악에 반항해 음악의 사회적 기능을 실현하고자 했던 음악가였다. 이제 이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는 사라졌다. 적어도 영향력 있는 독일의 정치인들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투쟁가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한스 아이슬러는 어찌 보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인물이지만 아직도 살아 숨 쉬는 현재의 음악가라고 할 수 있다.

아이슬러는 사후 국립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HFM)’을 남겼다. 지금도 베를린에 가면 그 찬란한 이름과 함께 한스 아이슬러 국립 음악대학이 우뚝하니 서있고, 끊임없이 세계적인 영재들을 모아 교육하고 있다. 한국의 유지연 선생도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드레스덴 칼 마리아 폰 베버 음악대학과 베를린예술대학교에서 피아노를 교습하는 유능한 재원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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