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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희생자’라는 말 속에 덧씌워진 정치 … 鎭魂이 시급하다”
“‘순수한 희생자’라는 말 속에 덧씌워진 정치 … 鎭魂이 시급하다”
  • 이재승 건국대 교수 · 법학전문대학원
  • 승인 2017.01.0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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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 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13. ‘제주4·3사건’, 진혼에 실패하는 나라
▲ 제주 관덕정 광장에 ‘전시’됐던 인민군 유격대장 이덕구의 유해. 출처= 제주의 소리_김관후 제공
그 날이 도둑처럼 온다. 성경 테살로니카 제5장 제4절에 등장하는 이 문구가 통일문제에서도 남용됐다. 이 말이 마치 무대책과 증오심, 관계파탄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됐다. 그러나 원래의 성경 문장은 도둑처럼 그 날을 맞지 않도록 대책을 수립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통일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는 우리 안에서 작은 통일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아비투스를 강화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선 우리는 원칙으로 돌아가 한반도에서 분단과 전쟁이 왜 발생했는지를 냉정하게 복기하고, 그 상처를 더듬는 것이 필요하다. 가장 급선무가 鎭魂이다. 아직도 진혼을 받지 못한 혼령들이 천지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수십만의 많은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그들은 좌익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됐다.
 
제주4·3사건(1947~1954. ‘제주4·3특별법’은 1947년 3·1절행사부터 1954년 한라산 입산금지가 해제된 시기까지를 제주4·3사건 기간으로 규정한다)은 민간인에 대량학살의 시작이었다. 2003년 제주4·3위원회는 진실규명작업을 통해서 공산주의자들의 무장폭동이라는 종래의 견해를 상당히 수정하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 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2003년 공식사죄를 표명했다. 그러나 제주4·3사건은 아직도 정확한 성격과 이름을 획득하지 못했다. 제주4·3평화공원의 전시실에는 그래서 白碑가 누워있다. 대규모로 민간인을 살해하면서 국가를 수립했으니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의 원죄에 해당한다. 그러한 원죄는 원죄를 적절하게 관리해주는 정치를 요구한다. 이러한 죄를 그대로 방치하면서 바람직한 통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학살을 자행한 이 체제에서 편익을 향유하거나 학살을 방관한 사람들과 그 후예들은 학살의 과거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의 정치를 전개해야 한다. 분단과 전쟁에서 동족살해를 방관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은 ‘형이상학적 죄’(야스퍼스)에 해당한다. 이러한 죄책감에 기초해서 화해와 상생을 연습하고 강화시켜야 한다.
 
현재 제주시에 조성된 제주4·3평화공원에는 이덕구를 진혼하는 공간이 없다. 이덕구가 누구인가? 무장대장 김달삼을 이어서 무장대를 지휘하던 인물로 1949년 6월 토벌대와 교전 중 사살됐다. 그의 주검은 제주 관덕정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전시됐고 나중에 화장돼 물 위에 흩어졌다. 제주4·3사건 70주년을 앞두고 그를 국가변란을 주도한 반역자들의 수괴로 규정할 것인지, 민족적 대의를 저버리고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주류세력에 항거한 제주도민의 狀頭로 인정할 것인지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2001년에 제주4·3사건 관련 사망자 중 파괴사태 가담자나 남로당 간부, 무장봉기 주도자를 희생자의 범주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제주4·3특별법에는 원래 예외규정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타당한 것인지는 법리적으로 논란이 많다.
 
나아가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이를 유지하는 제주4·3위원회의 방침이 화해와 상생의 취지에 맞는지에 대해서 더 큰 의문이 제기된다. 4·3사건과 관련해 사망한 사람들이 남로당 간부나 무장대지도부였다고 해서 희생자가 아니라는 판단은 수용하기 어렵다.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적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화장하지 말고 정중하게 매장하라는 것이 국제인도법(제네바협약)의 요구이므로 헌재의 결정은 너무나 구태의연하다. 헌법재판소는 전쟁정치를 지속하면서 죽은 자를 다시 죽이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은 제주4·3사건과 관련해 사망한 모든 사람들의 공동묘역이나 공동의 기념시설일 때 화해와 상생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948년 남한의 주요정치세력들은 남한에서만 단독으로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단독정부에 반대하고 군정당국의 폭주를 거부하는 제주도인의 행동이 갖는 정당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쨌든 제주4·3특별법은 희생자 관념을 중심으로 제정됐으므로, 제주4·3위원회는 희생자 판정에서 헌법재판소를 따라‘순수한 희생자’를 강조한다. 그러나 순수한 희생자 관념을 고수하는 태도는 인간성의 본질에도 반한다. 자신의 형제·자매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무장대가 돼 적극적으로 저항하다가 죽었다면 그는 순수한 희생자가 아니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한라산에 입산한 무장대원 중 희생자의 범주에서 아예 배제해야 할 정도로 ‘순수한 가해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분단된 조국에서 정부당국에 의해 남로당이 금기시 됐지만 남로당원의 지위가 본래적으로 범죄인은 아니므로 그들을 살해하고 기념시설에서 흔적조차 제거할 권리가 국가에는 없다. 남로당원이 죄인이므로 국가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면 박정희 대통령도 이장돼야할 것이다. 국가는 4·3사건 희생자의 인정조치를 통해 희생자들을 분류하고 억압했다. 4·3평화공원은 학살자의 관점에서 희생자를 분류할 것이 아니라 4·3봉기의 참여자들의 대의에 숨통을 터주어야 한다. 그래서 평화공원은 국가가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국가묘역이지만 항쟁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는 사회묘역이어야 한다. 국가는 4·3사건에 죽은 자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혼해야 한다. 진혼이라는 것은 혼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하는 것이다. 상생과 화해를 추구하는 국가라면 적으로 몰아서 몰살시킨 사람들과 다시 전쟁을 감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4·3백비, 이름짓지 못한 역사’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제주4·3사건’은 여전히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순수한 희생자라는 개념은 가해자들의 책임전가 공식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폭도 같은 유가족과 순수한 유가족이라는 구분이 횡행했다. 이덕구와 그 형제들은 조국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정수립을 거부하기 위해 봉기에 참여했으며, 그 이유로 친척 대부분과 처와 어린 아들까지 군경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어쩌면 이덕구와 그 가족들에 대한 진정한 진혼은 4·3공원의 위패봉안소에서 슬쩍 그들의 위패를 끼워 넣어두는 것으로 될 것 같지 않다. 4·3사건의 正名을 얻고 그 이름을 백비에 새겨 넣을 때 이덕구를 진혼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제 무장대장 이덕구의 묘지나 기념관을 상상해보자. 狀頭 이덕구는 제주 산야에 작은 묘지로 남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래서 이덕구가 묻혀있는 묘지로 사람들이 오다가다 생겨난 길이 어느덧‘이덕구의 길’로 사회적으로 이름이 붙여질 것이다. 분단체제 아래서 반공이념에 따라 분열을 조장하는 시대에 이덕구가 반공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국가묘역에 안장된다면 그것도 그 자신의 원망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 권력자들이 과시적 관용으로 이덕구의 위패 안치를 허용하고 평화공원의 刻銘碑에 이름을 새기게 할지도 모르겠다. 통일이 되기 전이라도 군경의 진압작전을 국가폭력이라고 정식으로 인정하는 정부가 등장한다면 이덕구 기념비가 4·3공원에 세워질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덕구는 자신이 국가폭력의 희생자로서 소비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덕구는 화해와 상생에 기초해 사람들의 통일이 성취될 때까지 기념관에 위패가 봉안되는 것도 거부하고 산간 골짜기에서 분단체제를 성난 눈으로 내려다 볼 것이다.
 
미국은 남북전쟁(1860~1866)의 상흔을 극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전쟁 후 30여년이 흐른 뒤에 알링턴 국립묘지에 남군의 묘역이 설치됐다. 남부연합의 대통령이나 총사령관의 이름을딴 도로와 학교도 여기저기 생겼다. 격렬한 내전을 치르고도 남부연합의 대통령이나 총사령관이 천수를 누렸다는 사실이 놀랍다.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는 체포됐다가 곧 보석으로 풀려나왔으며,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1807~1870)는 체포나 투옥 없이 남부재건사업과 흑인의 무상교육운동에 투신했다. 제퍼슨 데이비스는 1893년에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할리우드 묘지에 안장됐다. 로버트 리 장군은 교회 묘지에 묻혔으며, 그를 기념하는 시설이 알링턴 국립묘지의 전망 좋은 언덕에 ‘알링턴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설치됐다. 알링턴 하우스는 이덕구 기념관이 마치 국립현충원의 언덕에 설치돼 있는 것과 같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북한과 사실상 전쟁상태에 있으니 경각심을 늦출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제주4·3항쟁과 한국전쟁 중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남한의 군경이 자행한 국가폭력이고 내부의 사건이고, 인도에 반한 범죄라는 사실이다. 어찌됐든 진혼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살을 정당화하고 적개심을 재생산하는 정치가 아니라 화해와 상생을 지향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작은 통일은 이러한 정치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덕구의 도로와 이덕구의 기념비가 곧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필자는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주요 연구 분야는 ‘국가폭력’과 ‘사회민주주의’이다. 『국가범죄』(2010)를 저술했고, 『주체의각성』, 『죄의문제』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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