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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12년간 계속되는 고민의 시간
[나의 강의시간]12년간 계속되는 고민의 시간
  • 이규봉 배재대
  • 승인 2002.1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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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봉/배재대 응용수학

대학에 자리 잡은 지 만 11년이 지나고 12년째 접어든다. 그 동안 교육을 천직으로 알고 강의와 학생지도에 온 힘을 다했다. 강의를 통해 젊은 학생을 계속 만나고 그들에게 지식을 넣어주는 일은 항상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강의를 하는 것에 지금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 이 글을 통해 현실의 상황을 토로하고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던 그리고 겪고 있을 많은 교수님에게 조언과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처음 이 대학에 부임하여 4학년 대상인 ‘수치해석학’ 첫 수업을 했다. 50여명 되는 학생들이 있었다. 수업계획서를 나누어주고, 강의 목적, 강의 방법, 그리고 성적 산출하는 방법 등을 설명하였다. 그 다음 시간 수업에 남아 있는 학생은 불과 10명도 안됐다. 과목변경기간 중인 그 때 많은 학생은 과목변경 신청을 했다. 이유는 하나, 쉽게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필수과목인 ‘미분적분학’과 ‘프로그래밍언어’에서는 숙제도 많이 내고 철저히 확인했다. 시험감독도 철저히 했다. 성적도 기준대로 처리하다 보니 많은 학생이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았다. 그 이후로 나의 명성(?)은 지금껏 식을 줄 모른다.

이번 학기 ‘미분방정식’ 과목에서 그때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첫 수업에 가보니 30명 가까이 학생이 있었다. 이번부터 이 과목의 수업내용에 변화를 주려고 강의를 새롭게 많이 준비했다. 첫 시간에 강의 내용과 방법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수업을 했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해 보라고 문제를 제시했다. 그 다음 주 수업에 남은 학생은 7명 정도로 나머지는 모두 과목변경을 했다. 궁금하여 그 이유를 알아보니 다음 세 가지 경우이었다. 첫째는 ‘공부하기 힘들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적이 짤 것이다’는 것이며, 셋째는 ‘첫 시간에 숙제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처음 두 경우는 선배들로부터 전수된 나의 명성이고, 이와 더불어 첫 시간에 숙제를 내주니 이 명성이 다시 확인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더욱이 학생은 수강 신청을 몰려다니며 하는 경향이 있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7명은 공식적으로는 폐강이다. 학생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교수로서 심한 자괴감에도 빠지게 됐다. 강의는 다양하게 열심히 해 왔으며, 학생지도에도 남다른 열성을 다했건만, 허탈감에 빠졌다. 나의 교육철학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너희는 모두 A 학점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남아 있어 나의 강의를 듣겠다고 한 점이 갸륵해서…” 숙제는 거의 주지 않았다. 대신 직접 나와서 문제를 해결하게끔 했다. 강의는 가능한 천천히 그리고 쉽게 해 진도는 예전의 2/3 정도 나갔다. 시험도 거의 가르쳐 주고 아주 쉽게 내고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 아닌가. 11년 교단생활에 이번 학기처럼 가르치기 싫은 적도 없었고 이렇게 편하게 가르친 적도 없었다.

학부제 때문에 과목 수는 줄고 복수전공을 위해 가능한 필수 과목을 없애야 했다. 누구 과목을 필수로 해야 하는 어려움을 피하고자 모든 과목을 선택 과목으로 했으니 학생들은 자신에게 편한 과목, 성적 잘 주는 과목만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많은 대학에서 교수들이 얼마나 성적을 잘 줬으면 상대평가제가 도입돼 스스로 학점을 부여할 권한마저 제한을 당해야 했겠는가.

이번 학기는 강의 부담이 거의 없어 너무 편하기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이다지도 무거운 것은 왜일까. 학생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현실에 잘 적응하는 교수가 되는 것일까. 앞으로 남은 많은 시간을 어떻게 강의를 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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