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3:05 (목)
뉴턴의 천체역학 재해석하려 했던 19세기 철학의 거인
뉴턴의 천체역학 재해석하려 했던 19세기 철학의 거인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11.16 11: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말하다_ 『혜강 최한기 연구』 이우성 외 지음| 재단법인 실시학사 편|사람의무늬|484쪽 |25,000원

 

최한기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200여 편이 나왔지만, 연구내용은 아직도 백가쟁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용어가 아주 독특해 이해하기 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재단법인 실시학사가 엮고 이우성, 손병욱, 허남진, 백민정, 권오영, 전용훈 교수가 쓴 『혜강 최한기 연구』는 단일 모노그라프는 아니지만, 혜강 연구에 있어 중요한 문헌적 의미를 갖는 책이다. 이 책은 ‘실학연구총서’의 하나로 기획됐다. 우리 역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학자인 혜강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초부터 이뤄지기 시작해 이제 겨우 반세기가 지나고 있다. 1965년 박종홍에 의해 경험주의철학으로 규정됨으로써 비로소 한국철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게 됐다. 그 뒤 최한기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는 이우성에 의해 이뤄졌다. 1970년대 초에 이우성은 최한기의 가계를 처음으로 밝혀냈고, 최한기의 학문을 조선조의 기철학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새로운 과학을 포괄하는 독창적인 철학으로 보아 그 사상사적 위치를 ‘실학사상의 가교자’로 정립했다.
1980년대 이후 최한기 연구는 해마다 여러 편이 나와 지금까지 근 200여 편에 이르지만 아직도 연구 내용에 있어서는 백가쟁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최한기가 기학의 학적 체계를 세우면서 사용한 용어가 아주 독특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방대한 저작 분야가 너무나 다양할 뿐만 아니라 현전하지 않는 저작도 많아 그의 사상적 전 체계를 현재의 연구로는 명료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마침 실시학사에서는 2010년부터 ‘조선후기 실학사의 재조명’이란 대주제로 저명한 실학자에 대해 연구를 진행해왔다. 2014년 최한기를 연구과제로 선정해 그해 6월 16일 실시학사에서 첫 연구모임을 갖고 주제를 크게 기학의 학문체계(손병욱), 기학의 철학적 내용(허남진), 기학의 정치사상(백민정), 기학의 세계인식(권오영), 기학의 자연철학(전용훈)으로 나눠 탐구했다.

이후 세 번의 발표와 상호토론과 논평이 이어졌고, 2015년 11월 13일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시습재에서 최한기의 다양한 저술과 그간의 연구사를 비롯해 각자의 연구에 대해 의견을 자유롭게 담론하는 집담회를 열었다. 이 책에 수록된 한편 한편의 글들은 이런 연구 역정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책에 수록된 글들은 「최한기의 가계와 연표」·「최한기의 생새와 사상」(이우성), 「최한기 氣學의 학문체계 탐구」(손병욱), 「최한기의 기학과 경험적 인식」(허남진), 「최한기 정치사상의 재조명」(백민정), 「최한기의 氣化論과 세계인식」(권오영), 「최한기의 중력이론에 나타난 동서의 자연철학」(전용훈), 그리고 『혜강 최한기 연구』 집담회 등이다. 부록으로는 ‘혜강 연구논저 목록’ 등을 실었다. 이 가운데 집담회의 몇 대목을 발췌해 최한기의 전체상에 접근하고자 한다.

허남진(서울대 철학과): 최한기는 유학자이면서 과학사상가였습니다. 성리학적 언어와 규범을 거의 다 받아들입니다. 최한기 당시로서는 일반화된 상식이었으니 안 받아들이면 이상한 사람이지요. 다산도 마찬가지고. 이제 그 철학적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성리학하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최한기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 점에서 최한기는 추측의 형식을 항상 취합니다. 앞에서 과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신기에 대한 지식이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쌓이고 밝아져 마침내 그 근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규범을 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 물리학이나 천문학의 경우에는 적어도 결과만큼은 운화에 대한 인식이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서양의 공화국이라든지 선거제도 등에 대해서는 신기에 대한 인식이 쌓여 가지고 밝아진 것이라는 말을 절대로 안 해요. 당시 일반화된 인의예지를 정당화하려니까, 즉 2천500년 전에 생긴 윤리를 정당화하려니까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권오영(한국학중앙연구원): 현재까지 드러난 자료로는 유일하게 친구가 고산자 김정호이고 당시에 최한기를 인정한 학자로는 오주 이규경이 있습니다. 이규경이 볼 때는 최한기 같은 학식을 가진 학자는 없는 거예요. 경전에도 통하고 역사에도 통하고 예학에도 밝고, 인품도 훌륭하고……. 1834년 최한기 집 창동, 그러니까 지금의 남대문 시장 부근입니다. 거기서 최한기는 김정호를 불러 지구전후도를 판각하려고 합니다. 그 일이 저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 세계인식, 시대인식, 제 논문에도 썼습니다만, 물론 오래전 17세기 초부터 서양 지도, 지전설, 지동설이 수용되지만 최한기가 서른두 살 젊은 나이에 그런 일을 시도했던 것의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것입니다. 1860년대에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김옥균·박영효 등이 모여 박지원의 「양반전」을 읽고 박규수가 지구의를 돌리면서 ‘오늘의 중화가 어디 있느냐, 이리 돌리면 미국이 중화이고 저리 돌리면 조선이 중화이다’라고 하니 거기 참석했던 김옥균·박영효가 머리가 돌아 버렸다고 하잖아요.

전용훈(한국학중앙연구원): 최한기에게 천문학적 지식이 없었더라면 우주 전체를 통괄하는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최한기는 초기부터 상당히 많은 서학서들을 보고 그 당시 사람으로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하지만 유학자이기 때문에 아주 구체적인 수학적 계산을 하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사실을 꼼꼼히 따지기보다는 전체를 파악하는, 말하자면 전반적인 이해를 추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한기는 수학이나 천문학의 구체적인 원리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중요성을 부여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최한기의 『儀象理數』는 『曆象考成』 같은 책들을 보면서 자신이 알게 된 내용을 옮겨 적은 저작입니다. 이런 공부 과정을 거쳐 『기학』을 저술하는 단계에 가면 자기 철학의 구상이 선 것 같습니다. 그의 철학은 1857~1860년경에 거의 완성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체운동에 대한 논의만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뿐, 이즈음에는 지구 대기권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은 서양 과학책을 보면서 ‘이제는 다 알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1867년 『성기운화』를 저술하는 단계에서는 자신의 구상이 서양 과학의 지식까지도 모두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한기는 자신의 구상이 옳다는 것을, 영국인 허셜이 쓰고 와일리(A. Wylie)와 李善蘭이 한문으로 번역한 『談天』을 보고 다시 한 번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 이 무렵에 그는 자기의 관점과 철학의 체계로 뉴턴의 천체역학을 재해석하고 그것이 지닌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권오용(한국학중앙연구원): 저는 최한기가 19세기에 기학이라는 학문체계를 통해서 서양과학과 서양의 법제 등 여러 부문을 수용하기 위한 대강령을 제시한 학자라고 생각하고, 최한기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기능적 측면까지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늘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하잖아요. 혜강 기학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사상의 전승은 어떻게 되는가. 현재 혜강이 직접 실용적인 상공업 부문에 제자들을 길러 냈는지도 모르잖아요. 혜강이 긍업재라는 집을 지어 거기에서 서울의 상인이며 기술자며 이런 사람들이 혜강의 집을 찾아 드나들면서 기술을 배웠는지 그것이 개화정책에 반영됐는지 이에 대한 지식을 아직 갖고 있지 못합니다. 저는 혜강은 개항 전에 기학을 제창해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학문적으로 큰 틀을 제시한 학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혜강 기학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