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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화 넘어설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 제시
글로벌화 넘어설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 제시
  • 박경환 전남대·지리교육과
  • 승인 2016.11.08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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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공간을 위하여』 도린 매시 지음|박경환·이영민·이용균 옮김|심산|400쪽|25,000원

매시는 자신의 글쓰기에서 현학적인 허세나 수사적인 미사여구의 사용을
억제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논리를 펼쳐 나간다. 일관적 논리란, 오늘날 서양이 주도하는 글로벌화
프로젝트의 핵심은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고 길들여나가는 것에 있기
때문에 글로벌화에 대한 정치적 대안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리적 공존과 책임이라는 윤리적 문제는 오랫동안 인문지리학의 핵심적인 관심사였다. 인간과 ‘삶터’는 어떤 관계가 있고 인간은 자신의 삶터에서 어떠한 책임을 작고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 말이다.
그러나 현행 삶의 조건은 이러한 공존과 책임의 윤리에 대한 사유를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다. 가령,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상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체계적으로 분업화돼 생산, 유통되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또는 무지함은 우리의 소비 윤리를 일상의 저편으로 물러나게 한다. 또한, 낯선 타자와 그들의 문화를 마주하는 것이 보편화된 상황이지만 이에 대한 관용의 윤리적 한계를 착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글로벌화에 대한 많은 담론은 글로벌화를 역사적 필연이나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글로벌한 것’이 마치 가장 우월하고 강력하며 포괄적인 힘이라고 상상하게끔 하여, 스스로를 불가항력적 구조로서 확대 재생산한다. 반대로 ‘로컬한 것’은 글로벌화에 의해서 정복, 찬탈당할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글로벌화에 맞설 수 있는 저항의 보루처럼 인식된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터에 대한 관계적 이해를 방해함으로써 특정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 및 사람과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망각하게 하고 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방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글로벌화’가 스스로를 역사적 필연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전략의 핵심은 바로 이와 같이 ‘공간에 대한 담론’에 있다. 따라서 글로벌화 담론 그 자체가 공간에 대한 강력한 상상과 공간을 길들이고 전유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할 만큼 공간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공간 그 자체, 공간에 대한 관점과 정치, 공간에 대한 지리적 상상과 대안을 집중적으로 사유하고자 했던 성찰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도린 매시(Doreen Massey, 2005)의 『공간을 위하여』는 오직 공간과 공간에 대한 관점에서 집필된 저술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 책은 글로벌화라는 맥락 속에서 공간에 대한 사유를 폭넓고도 깊이 있게 추적하고 있고, 그 토대 위에서 저자는 공간에 대한 자신의 풍부한 지리적 상상과 그 정치적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현행의 글로벌화가 특수한 집단에 의해 특수한 목적을 지향하며 이뤄지고 있는 프로젝트이자 담론임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글로벌화 프로젝트의 핵심은 ‘공간 길들이기’에 있다고 선언한다. 글로벌화는 공간적인 것을 단순한 배경이나 표면으로 착상하게 하여, 공간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역사적 궤적들과 목소리를 은폐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장소들 간의 관계를 망각하게 한다. 또한 많은 지도학적 시도는 공간을 ‘하나의 완결된, 닫힌 표면’으로 다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도학적 ‘공간 길들이기’는 공간을 완성된 생산물, 일관성을 지닌 폐쇄 체계로 만듦으로써 공간적 궤적들의 다중성을 은폐하고 대안적 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특징짓는 많은 사유들이 ‘공간에 의한 시간의 정복’ 내지 ‘시간에 대한 공간의 승리’를 경축한다. 실재에 대해 재현이 승리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공간의 승리와 공간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역동적이고 능동적이며 생산적인 ‘시간’이 정태적이고 수동적이며 비생산적인 ‘공간’에 의해 안정화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러한 공간의 승리는 ‘최악의 피루스적 승리’인 것이다.
따라서 글로벌화에 대한 대안적 정치는 오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위에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공간을 길들이고 규율해 온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미래를 비결정적이고 열린 것으로 상상하게하기보다는, 반대로 미래를 이미 정해져 있는 그러나 지향해 나아가야 할 역사적 필연의 단일하고 보편적 지점으로 상상하도록 만드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공간을 위하여』는 공간에 대한 헤게모니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함과 동시에,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새로운 상상을 탐색하고 이 토대 위에서 현행의 문제적 글로벌화를 넘어설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공간을 위하여』는 형이상학적인 공간적 담론에서부터 저자의 개인적 일화에 이르는 넓은 사유의 스펙트럼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인문지리학에 문외한 독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숙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최근의 많은 포스트모던 글쓰기와는 달리, 매시는 자신의 글쓰기에서 현학적인 허세나 수사적인 미사여구의 사용을 잘 억제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논리를 펼쳐 나간다. 그 일관적 논리란, 오늘날 서양이 주도하는 글로벌화 프로젝트의 핵심은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고 길들여나가는 것에 있기 때문에 글로벌화에 대한 정치적 대안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상이한 궤적들의 공시성’으로서의 공간, ‘함께 내던져져 있음’으로서의 장소, 그리고 ‘공간의 관계적 정치’에 바탕을 둔 타자에 대한 윤리와 책임이 바로 이 논리의 세 가지 핵심 축을 형성한다. 이런 측면에서 『공간을 위하여』는 공간과 장소를 다양한 측면에서 들여다보고 상상해 나가면서도 결코 핵심적인 화두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저자는 1980년대 이후 지리학계를 넘어 활발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통해 공간과 장소의 중요성을 설파해 온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지리학자로서, 1982년부터 영국 방송대학 교수로서 재직하기 시작해 거의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활발한 학술 활동을 해 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에서부터 휴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학술적 논의와 논쟁을 펼치면서 공간 이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이러한 넓은 학술적 저변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공간을 위하여』에서 이처럼 핵심을 벗어나지 않는 지극히 절제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간에 관한 그 동안의 학술적 논의를 총체적으로 섭렵하려고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한 자신의 공간적 상상을 현실 변혁이라는 구체성 속에서 끈질기게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제는 저자의 독창적인 공간적 상상과 논리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다.

『공간을 위하여』는 루이 알튀세가 출간했던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연상시킨다. 알튀세가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통해 마르크스에 대한 평가이자 마르크스를 위한 헌정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이데올로기 이론 사이의 간극을 추적하려고 했었던 것처럼, 매시는 『공간을 위하여』에서 공간을 평가함과 동시에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공간 자체와 공간에 대한 상상 그 사이의 궤적을 추적해 나간다. 많은 학자들이 공간이 중요하다고 설파하면서도 정작 공간 그 자체를 문제설정의 핵심에 두고 자신의 사유를 밀어붙이려고 했던 시도는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이런 점에서 『공간을 위하여』는 저자가 자신의 공간적 상상을 성찰하고 정리하는 개인적 프로젝트임과 동시에,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공간의 ‘피루스적 승리’를 비판하고 공간의 풍요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박경환 전남대·지리교육과  
필자는 켄터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제개발협력(해외원조)의 공간 정치, 답사에서 현장의 행위주체성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옮긴 책에는 『지리사상사』(공역), 『지리 답사란 무엇인가?』(공역) 등이 있고, 지은 책에는 『현대 문화지리의 이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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