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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10.17 12: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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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_ 31강. 문광훈 충북대 교수의 ‘예술과 자연’

지난 8일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 제5섹션 ‘윤리와 인간성’ 네 번째 강연은 문광훈 충북대 교수(독어독문학과)의 ‘예술과 자연’이었다.
문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비판적 자기관찰의 매체여야 하며 예술경험의 궁극적인 의미도 같다”고 말하면서, 독일 낭만주의 화가인 프리드리히가 그린 풍경화를 통해 자연의 의미를 고찰했다. 그는 “화가의 예술적 실천이 형상화에 있다면 관람자에게 그것은 생각하기,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사물의 겹쳐있음’과 ‘세계의 말 없는 깊이’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해변의 수도사(1809), 캔버스에 유채 110×172cm, 베를린 국립미술관.

“한편으로 세계는 ‘우리가 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럼에도 우리는 세계를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M. 메를로-퐁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

근대가, 최대한 줄여서, ‘성찰성(reflexivity)’으로 특징지어진다면, 모든 학문과 예술의 한 근본문제는 바로 자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은, 다른 매체와는 달리 이미 있는 자연을 그려서 ‘다시(re)’ ‘있게(present)’ 만든다. 그리하여 그림은, 흔히 말하듯이, 재현(representation)의 형식이다. 그림은 기존의 자연을 그려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림이 자연에 대한 ‘하나의 다시 보기’라면, 이 그림에 대한 우리(감상자)의 감상은 ‘다시 보기의 보기’, 즉 관찰의 관찰이 된다. 예술은 관찰의 관찰이요, 반성의 반성이다. 그것은 반성의 이중화 혹은 다중화 활동이다. 이때 우리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이 자연 앞에 혹은 자연 속에 자리한 우리 자신도 관찰한다. 결국 자연에 대한 관찰은 자연관찰이면서 우리 자신의 관찰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에게 비판적 자기관찰의 매체여야 한다. 우리는 자연을 보면서 그 원형을 떠올리는 가운데 그 훼손가능성을 최대한 줄여가야 하고, 동시에 자연 앞에 선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예술경험의 궁극적 의미도 바로 그렇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나와 우리 자신, 그리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그래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예술작품은 어디에 쓸 것인가. 자연관찰은 곧 자기관찰이고, 이 모두는 더 나은 삶의 가능성으로 열려야 한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

호라티우스는 “그림은 말없는 시고,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림에는 말이 없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오직 그 이미지―영상만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침묵. 그래서 우리는 그려진 것들에서 말없는 여운을 느낀다. 화가의 예술적 실천이 형상화에 있다면, 관람자에게 그것은 생각하기―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 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그 어떤 것이나 일상에서 벗어난 영역―고요의 성찰영역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것은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의 결정을 촉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낭만주의의 여느 다른 그림들처럼 그리 열정적이지도 않다. 그의 그림은, 이를테면 들라크로아의 「자유의 여신」처럼, 어떤 집단행동이나 혁명적 파당성을 촉구하지도 않는다. 어떤 진술이나 이념을 강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독교적 구원의 이미지를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또 어떤 정치적 그림처럼, 그것은 민주주의적 자유개념의 세속화도 아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그저 풍경 그대로의 모습 앞으로 우리를 놓아둔다. 프리드리히의 동시대에 사람들이 원한 것은 대상에 대한 충실한 모사였다. 그가 추구한 것은 단순히 ‘손의 능란함’ ―기술적 숙련도가 아니라 ‘순수한 영혼’이었고, 이 맑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내면’이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잘 이해하려면 그것을 당대 현실의 맥락 속에 놓고 보아야 한다.

프리드리히의 많은 자연풍경화 가운데 나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것은, 그래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두 그림―「바닷가의 수도사」(1809)와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1809/10)이다. 이 두 그림은, 그의 다른 그림들이 그러하듯이, 그리 복잡하지 않는 구도 속에서 드넓게 펼쳐진 공간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황량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자연의 장면이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어쩌면 오히려 단조롭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두 그림은 나를 오랫동안 그 앞에 머물게 만들곤 했다.

「바닷가의 수도사」에는 흑갈색 옷을 입은 수도사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가 입은 옷마저 모래의 짙은 부분이나 청회색 구름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 그림에 있는 것이라고는 모래와 파도, 구름과 대기다. 그러니까 그것은 최소한으로 환원된 자연의 四元素들―흙과 물과 공기와 불을 생각나게 한다. 모든 사물은, 그것이 液化든 氣化든, 증발이든 소멸이든, ‘탈물질화’라는 자연사적 근본과정 속에 있다. 인간의 삶도 이렇게 순환하는 여러 物象 가운데 하나다. 하나의 차이는 사람은 가끔, 자연의 사물과는 달리 이 물질화 과정을 가끔 ‘헤아리고 살펴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반성과 직시, 성찰과 응시 덕분에 인간은 자연의 다른 사물과 구분된다. 수도사는 그런 응시의 인간이다. 응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조용히 바라본다는 뜻이다. 응시한다는 것은 조용히 세계의 外物을 바라보면서 자기내면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프리드리히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상기였고, 이때의 자연은 단순히 가시적 물리적 자연이 아닌 화가의 감정과 정신이 깃든 자연―자연의 정신성이었다. “온전한 마음과 정서를 갖고 자연의 정신을 인식하고 삼투하고 받아들이고 재현하는 것이 예술작품의 임무다.” 그리하여 그는 순수하고 맑은 눈으로 자연의 영적 차원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가 ‘내면과 정신의 눈’을 강조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때까지 회화의 ‘저급한 장르’로 취급받았던 풍경화는 프리드리히의 이런 문제의식에 힘입어 높은 지위를 얻는다. 유럽 낭만주의에 대한 그의 회화사적 기여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나는 「바닷가의 수도사」을 사랑하듯이,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도 귀하게 여긴다. 「바닷가의 수도사」가 쉼 없이 변전하는 자연의 풍경을 담고 있다면,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은 인간 역사의 폐허화된 풍경을 보여준다. 아마도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공간적 층의 구분일 것이다. 흔히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의 공간은 하늘과 땅으로 구분되지만, 이 양극화된 두 영역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주목돼야 하는 것은 두 축을 잇은 중간영역일 지도 모른다. 그것은 떡갈나무 가지와 성당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것은 세 가지 층위―물리적 층위와 형이상학적 층위, 그리고 이 둘을 잇는 중간영역이다. 간구하는 마음은 바로 이 두 층위를 잇는다. 예술은 이 점에서 종교와 유사하다. 프리드리히는 풍경화를 통해 땅 위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이어준다.

‘사물의 겹쳐있음’과 ‘세계의 말 없는 깊이’

여기 ‘내’가 있고, 내 앞에 ‘자연’이 있다. 나는 이 자연을 바라보고 느끼며 관찰하고 지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표현한다. 사물의 겹쳐있음은 사물의 유기적 공존과 그 얽힘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 될 테고, 그것은 유기적 전체의 다의성이 될 것이다. 원래 자연은 하나의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자연이 눈앞에 드러날 때, 그래서 現在하는 것으로 지각될 때, 자연은 우리와 ‘관계하는’ 것이고, 우리 지각이 삼투한 것이 된다. 풍경은 이렇게 우리의 느낌과 생각이 삼투한 자연의 모습이다. 내가 자연을 그렸다면, 이 자연은, 여기에 나의 감각과 해석이 부여된 것이기에, 더 적극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예술적 형상화 과정이란 화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이 변형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자연현실은 풍경화를 통해 예술의 진실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쉼 없는 變轉, 이 변전의 모순성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글의 전체 모토로 메를로-퐁티의 문장을 인용했다. 이 인용에서 먼저 강조되는 것은 철학이 단순히 언어적 대체물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근본적인 일―‘우리’가 무엇이고,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의 상기다. 마침내 시도해야 할 세계의 발견, 이것은 그러나 철학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경험의 핵심적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메를로-퐁티는 철학의 일이 “말해진 것이나 쓰인 것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논리학자나 시인 혹은 음악가의 그것과 다르다고 했으나, 사실은 모든 예술가의 일이 바로 세계를 처음으로 발견하는 데, 이 발견을 도와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의 목표가 “사물 자체를 그 침묵의 깊이로부터 끌어내어 표현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프리드리히의 여러 풍경화를 보고 감상한 후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게 된 자연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런 질문 앞에서 나는 하나의 그림을 떠올린다. 그것은 「무너진 담이 있는 풍경」(1837/40)이다. 프리드리히는 61살 때 뇌경색을 겪은 후 그는 다시 치유되지 못하리라고 여긴다. 모든 시대란 한계가 있고, 이 시대의 한계를 그 어떤 뛰어난 예술가도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이런 체념 때문인지 죽기 전까지 그린 마지막 5년간의 작품 중에는 무덤이나 관 혹은 십자가가 유난히 많다. 뛰어난 화가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보는 것을 그린다. 그리하여 도대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세계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깨우쳐 준다. 우리는 그림 속에서 마침내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참된 예술은 세계를 그 말없는 깊이로부터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회화의 진리다. 회화는 보이는 것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으로써 예술의 진실은 자연의 현실 그리고 삶의 사실에 대응한다. 예술의 진실은 삶의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자연을 새로 만나고, 이 자연의 새 모습에서 삶을 새로 깨닫는다.

아마도 인간의 삶은 이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는 한낮처럼 밝게 비치지만, 그러나 이곳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담은 지금 여기를 한편으로 안전하게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가두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여기와 그 너머 사이에는 낡은 문이 하나 열려 있다. 우리는 이 좁은 문을 통해 저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저 너머는 넓으나 흐릿하다. 미지의 현실은 드넓게 펼쳐져 있지만 불확실하다. 오늘의 훼손된 자연 앞에서 이 자연의 원형을 떠올리는 우리의 일도, 또 자연의 원형을 상기하는 예술의 과제도 이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대상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고, 이렇게 묻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또 물어야 한다. ‘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이렇게 보는 일에서 드러나고 숨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푸코가 말한 대로, “마치 우리가 그 모든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모든 것을 마침내 아직도 발견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 물음 속에서 자연과 사물을 표현해 그 말없는 심연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표현된 것에서 우리 자신과 세계의 더 나은 가능성을 다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술의 진실이다.

그러므로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제대로 보고 있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나는 어디에 있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돼야 하는가? 이런 물음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이 모든 물음이 향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삶의 더 나은 가능성이다. 자연에 대한 기억과, 이 기억을 위한 예술은 좁은 문을 통과해 담 너머의 저 무한한 불확실성과 싸워가야 한다. 그것은 나의 결정과 이 결정에 따른 책임에 따라 드러나고 숨을 것이다. 낙원은, 만약 그것이 있다면, 담과 그늘 그리고 좁은 문을 지나가야 하고, 이 문을 지나 저 미지의 불확실에 몸을 던질 때, 그것은 조금씩 실현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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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8-07-09 09:42:28
기도와 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