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6:10 (목)
이광수의 눈에 비친 일본, 그 시대적 공기를 포착하다
이광수의 눈에 비친 일본, 그 시대적 공기를 포착하다
  • 최주한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6.09.28 14: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말하다_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하타노 세츠코 지음|최주한 옮김|푸른역사|332쪽|15,000원
▲ 이광수 1937년 문장독본을 냈을때. 사진제공_ 철학과현실사

1905년 여름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도착한 소년 이광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즐비하게 늘어선 벽돌로 지은 서양 건축물이었다. 한성의 남대문역 주위는 초가집뿐이었던 무렵이었으니, 이광수의 중학유학은 근대일본이 구축한 ‘문명’의 충격과 더불어 시작됐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충격도 잠시, 같은 해 11월 대한제국은 제2차 한일협약과 더불어 외교권을 빼앗기고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당시 중학 진학을 준비 중이던 이광수는 동료들과 함께 한국 공사관을 찾아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약속했던 일본이 우리를 속였다며 울었다. 이윽고 1907년에는 고종의 양위에 잇달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이에 맞선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이국에서 조국이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보던 이광수는 소년회를 조직하고 등사판 회람잡지 『신한자유종』을 간행해 애국심을 북돋는 비분강개한 문장을 동료들과 공유했고, 이는 곧 관헌의 눈에 띄어 압수, 극비문서 속에 잠들어 있다가 2012년에야 발견됐다.

1915년 여름 재유학을 위해 5년 만에 도쿄의 땅을 밟은 청년 이광수가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줄 조국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10년 전 보호조약 체결 당시 동료들과 함께 달려가 일본이 우리를 속였다며 울었던 대한제국 공사관은 철수돼 그 자리에는 유학생 감독부가 들어섰다. 합병 직전 1천 명에 육박했던 유학생 수는 조선총독부의 유학 억제책으로 절반으로 줄었지만, 유학생들이 사명감은 그만큼 강해져 ‘적지에 들어가 적의 칼로 적을 친다’는 기대가 팽배했고 민족의식 또한 높았다. 당국은 이러한 조선인 유학생을 위험시하고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산하에 특별고등경찰을 두어 이들을 감시했다. 1917년 ‘배일사상’을 품은 자로 분류된 것은 237명, 이광수는 그 가운데서도 ‘갑호’로 분류돼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이 무렵 이광수는 일본의 민권계열 잡지 『洪水以後』에 「조선인 교육에 대한 요구(朝鮮人敎育に對する要求)」(1916.3), 「조선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의 결점(朝鮮人の目に映りたる日本人の缺點)」(1916.4) 두 편의 글을 잇달아 투고한다. 전자는 동화정책 지지의 수사를 내걸고 당대 조선의 교육체제를 비판하며 조선에 일본과 동일한 교육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여 게재될 수 있었지만, 후자는 검열 당시 ‘전문이 거의 매도적인 문구’로 가득하다는 이유로 게재되지 못했다. 관헌 자료 속에 묻혀 있던 이 두 편의 투고 글이 발견된 것도 2008년의 일이다.

 

이광수의 삶과 문학이 놓인 자리 복원하기
근대계몽기 이래 일본에 유학했던 지식인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통념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근대일본의 ‘문명’에 도취된 문명론자였던 까닭에 애초부터 다소 친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래서 일제 말기에는 손쉽게 친일파로 변절해갔다고. 대한제국시기의 유학생 1세대인 윤치호는 물론이고 2세대에 속하는 이해조, 3세대에 속하는 최남선, 이광수에 대한 평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광수야말로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을 대변하는 식민지시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위의 두 장면은 두 차례에 걸친 이광수의 유학시절에 대해 다소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에서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관헌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묻히거나 삭제됐던 이광수 관련 자료들을 발굴해 이를 토대로 당대 조선이 놓여 있던 시대적 공기를 꼼꼼하게 재구성한 결과로,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일상적이었던 식민통치하의 이광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광수의 문장이나 행위 그 자체보다 그것이 놓인 자리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처럼 일본인 특유의 자료에 대한 성실함이 돋보이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일본어 원서 『韓國近代文學の祖と「親日」の烙印』, 中央公論新社, 2015)는 일본어 번역서 『무정』(2005)을 비롯해 『『무정』을 읽는다』(2008), 『일본 유학생 작가 연구』(2012), 『이광수의 이언어 창작에 관한 연구』(근간)에 이르기까지 이광수 연구에 집중해 온 니가타현립대학의 명예교수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의 연구의 성과가 무르녹아 있는 이광수 평전이다. 자료에 근간해 그간 묻히거나 망각됐던 역사적 맥락을 최대한 복원하면서 근대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이광수의 삶과 문학이 놓인 자리를 꼼꼼하게 추적하고 있는 이 책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돼 온 우리 사회의 이광수에 대한 해묵은 논란을 되돌아보게 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근대일본이 이광수의 삶과 문학에 어느 때보다도 깊이 관여한 것은 역시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광수 자신 솔선해 창씨개명에 나서고, 내선일체를 부르짖고, 일본어로 글을 쓰고, 조선의 청년들에게 皇軍이 돼 전장에 나가 싸울 것을 촉구했던 이른바 ‘대일협력’의 시기. 이 시기에 관한 서술에서도 저자는 이광수의 대일협력 행위 그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강제했던 당대의 시대적 공기를 포착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이광수가 일본어로 쓴 문장에 관해서도 그것이 씌어진 맥락을 섬세하게 고려해 재해석함으로써 민족과 반민족의 경계를 조심스레 허물어뜨리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논리로 재단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저자의 인간관이 혹독한 시대에 민족의 지도자라는 위치에서 이광수가 직면해야 했던 거대한 모순과 갈등을 직시케 해준 덕분이었을 것이다.

  문학과 정치, 민족과 반민족의 이분법을 넘어서
그런데 정작 우리 사회가 이광수를 대하는 시선은 어떠한가. 얼마 전 싱겁게 끝나버린 춘원문학상 제정 논란이 보여주듯, 『무정』 100년의 해를 앞둔 우리 사회는 여전히 ‘한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vs ‘친일파=반민족주의자’의 해묵은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문학은 정치의 논리로 오염돼서는 안 된다는 문학 옹호론과 대일협력자의 문학은 문학으로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정치주의는 일견 상반돼 보이지만, 문학과 정치, 민족과 반민족의 이분법에 갇혀 정작 이광수와 그의 시대가 지닌 역사성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광수의 문학은 애초에 식민주의와의 과감한 타협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의 대일협력행위 또한 민족의 이익이라는 명분하에 언제든 타협으로 미끄러지기 쉬운 유혹과도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족과 반민족의 경계를 넘나든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광수만큼 서로 모순되고 대립하는 다양한 계기들을 껴안은 채 한국 근대사를 관통해온 작가도 드물다고 한다면, 이광수의 삶과 문학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 모순과 대립의 계기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돼야 마땅하다. 이 책이 최근 춘원문학상 제정 논란을 계기로 재점화된 이광수에 대한 해묵은 논란을 차분하게 재점검하고, 문학과 정치, 민족과 반민족의 이분법 속에서 우리 사회가 외면해 온 무의식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되는 반가운 책이 되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최주한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필자는 숙명여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에서 이광수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근대문학과 이광수의 이중어 글쓰기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이광수와 식민지 문학의 윤리』 등이 있고, 역서에 『『무정』을 읽는다』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