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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맹신과 주관 불신
숫자 맹신과 주관 불신
  • 정범모 한림대 명예석좌교수·교육학
  • 승인 2016.09.1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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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대학입시, 어디서부터 고쳐야할까

이 글은 정범모 한림대 명예석좌교수의 신간 『창의력과 공의식』(학지사, 2016)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정범모 명예교수

우리에겐 ‘숫자 맹신’이 아주 끈질기다. 숫자만 보면 그것을 곧 사실적이고 객관적이고 믿을 수 있는 실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마치 바구니에 사과가 10개면 10개지, 그것이 8개나 12개로 둔갑할 수 없다고 믿는 것처럼.

가끔 아침에 혈압을 재는데, 하루는 높은 혈압이 140으로 나왔다가 사흘 후에는 130으로 나오고, 같은 아침에 두세 번 재면 130, 140, 125로 종잡을 수 없게 된다. 내 혈압이 변덕인지 혈압계가 변덕인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모든 측정치 숫자는 실은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숫자다.
 
흔히 학기말고사, 수능시험, 지능검사의 점수도 사과의 수처럼 따로따로 똑 떨어진 엄연한 객관적인 숫자로 보이지만, 실은 시험문제를 어디에서 어떤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내고 어떤 방법으로 채점하느냐에 따라 큰 폭으로 변덕을 부리는 속임수 점수들이다. 측정통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측정의 표준오차’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넓은 숫자들이다. 예컨대 수능시험 점수 200점이 실은 150점일 수도 있고 250점일 수도 있다. 그런 속임수가 많은 수치를 합산하는 것만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도리어 비과학적인 미신이라고 해야 한다.

애당초 인간의 지능·능력·성격 등은 필답고사처럼 100단계, 200단계 등으로 ‘의미 있게’ 세분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다. IQ100과 110의 차이는 실제 행동에서 별 차이가 없다. 지능의 경우도 대개는 머리가 ‘아주 나쁘다-좀 나쁘다-보통이다-좋다-아주 좋다’의 5단계면 족하다. 가끔 채점방법에 따라 소수점 이하까지, 예컨대 75.50과 75.25가 나오면 그것으로 우열·당락을 판정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것은 거의 광신에 가까운 숫자 맹신이다.

하버드대 입학전형에서 학력평가는 6단계의 평점으로 크게 분류되고 나머지는 다른 특성들을 전형에 참작하는 것이 지도자 자질을 선발하는 데 더 적정하다는 사고가 깔려 있는 셈이다. 경쟁력의 단계를 정하는 바둑·유도·검도에서도 아마 10급에 프로 10단으로 많아야 20단계다. 그래도 6급이 3급을 이기고 4단이 2단에 지는 경우가 생긴다. 한국교육의 입시지옥을 해소하려면 우선 시험점수의 맹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하나 벗어나야 할 것은 인간평가에서의 ‘주관 불신’을 불식해야 하는 문제다. 모든 인간평가는 근본적으로 주관적 판단이다. 객관식 시험도 채점의 합의도를 높이기 위한 출제 형식일 뿐이고, 어디에서 어떤 내용의 문제를 어떤 형식으로 출제하느냐는 크게 출제자의 주관에 따라 결정된다. 출제자가 바뀌면 객관식 시험의 내용도 채점결과도 크게 달라진다. 객관식 시험도 실은 주관식 시험이다.

우리는 애지중지하는 귀여운 딸의 신랑감을 고를 때, 무슨 시험으로 선정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신임교수를 선정·채용할 때에도, 괴짜 대학이 아닌 이상 시험을 보게 해서 뽑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정보와 자료를 참고는 하되, 결국엔 부모 또는 선발위원들의 주관적 합의에 따라 선정한다. 대학생 선발이 꼭 예외일 필요는 없다.

인간사의 주관적 평가에서는 평가자와 피평가자의 상호 신뢰가 형성돼야 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피평가자는 평가자의 역량과 도덕성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평가자는 피평가자가 제공하는 자료와 언행에 속임수가 없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회 신뢰가 희박하면, 자연 사이비 객관성과 신뢰성이 있어 보이는 숫자 맹신에 집착하게 된다. 어떻게든 한국의 대학입시제도는 크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창의력 교육도 공의식 교육도 옴치고 뛸 수 있는 자리가 생기지 않는다.

정범모 한림대 명예석좌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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