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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불평등한 배분의 비효율성 경험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불평등한 배분의 비효율성 경험하고 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7.26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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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_ 20강. 이재열 서울대 교수의 ‘신뢰: 사회적 신뢰’

오늘날 한국사회를 이해하려면 전통시대부터 맹위를 떨쳐온 가족주의와 연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의 안과 밖’ 시즌3은 지난 9일 ‘가족주의’를 진단한 데 이어, 16일에는 ‘연고주의’를 성찰하는 강연을 잇달아 선보였다. 지난 16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4섹션 ‘사회와 윤리’ 세 번째 강연으로 이재열 서울대 교수(사회학과)가 ‘신뢰: 사회적 신뢰’를 강연한 게 그것이다.
이 교수는 사회자본 개념이 등장하면서 신뢰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논의가 늘었다고 말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신뢰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연고주의와 같은 독특한 신뢰의 문화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뢰 개념을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사항으로 신뢰 개념 자체의 모호성과 신뢰가 작동하는 사회적 맥락을 정교하게 구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신뢰와 사회자본을 둘러싼 토론이 문화적 결정론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이 교수는 연고주의가 한국사회의 제반 특성들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위험성을 의식, “연고주의 자체는 중립적일 수 있지만, 특정한 맥락에서 발현되는 연고주의는 체제실패를 가져올 수도 있다”라고 크게 우려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한국사회는 사적인 사회자본의 과잉과 그것의 불평등한 배분에 따른 비효율성을 적나라하게 경험하고 있고 새로운 제도적 신뢰의 기반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 모색이 필요할까.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문제제기
신뢰는 무조건 좋은 것인가. 신뢰는 항상 바람직한 덕목인가. 최근 들어 신뢰의 긍정적 효과들에 대한 논의가 부쩍 눈에 띄게 늘어난 이유 중 하나는 ‘사회자본’ 개념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서구 사회과학에서 신뢰와 사회자본에 대한 관심은 효율과 경쟁이라는 경제 논리가 모든 사회를 지배하게 된 1990년대에 본격화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 선의에 기반을 둔 신뢰가 많은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도덕적 자원이라고 하는 인식이 깔려 있다. 반면에 한국사회에서 신뢰에 대한 논의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연고주의와 같은 독특한 신뢰의 문화를 발전시켜왔는데, 이러한 연고주의가 가지는 장점도 있지만, 많은 문제점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신뢰 개념을 다룰 때 몇 가지 사항들에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신뢰 개념 자체의 모호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뢰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합리적 선택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배신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용법으로 신뢰는 문화적인 특성, 혹은 개인이나 집단의 외화된 특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둘째, 그런 이유에서 신뢰가 작동하는 사회적 맥락을 보다 정교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 개인을 중심으로 개인이 축적하는 사회자본의 합이 그가 소속된 집단이나 사회가 축적한 사회자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는, 신뢰와 사회자본에 대한 토론이 문화적 결정론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한 경계다. 한국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연고와 의리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형태의 신뢰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문화적 결정론은 닫힌 논리구조를 갖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변화의 방향과 가능성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마련이다.

정작 우리 사회에서 문제는 연고주의가 사회의 제반 특성들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위험성이다. 연고주의 자체는 중립적일 수 있지만, 특정한 맥락에서 발현되는 연고주의는 체제실패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들 간의 신뢰가 전 사회적 수준에서 자본화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검토한 후, 한국적 정황에서 그 핵심이 바로 투명성의 제고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를 강하게 느낀다.

신뢰의 사회적 맥락과 사회 유형론
그 동안 발전과정에서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공존에 따른 혼돈을 경험해 온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신뢰에 대한 논의를 어떤 맥락에서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 보다 차분한 정리가 필요하다. 사실 신뢰의 효과로서 사회자본에 대해 논의한 대표적 학자인 미국의 사회학자인 콜만(Coleman),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Bourdieu), 그리고 미국의 정치학자인 퍼트남(Putnam) 등은 서로 동일한 사회자본 개념을 사용하지만, 그 용례는 서로 구별되는 독특한 관점을 대변한다.
문제는 개인수준과 공동체 (집단) 수준에서의 사회자본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첫째, 사회자본은 한 개인이 좌지우지하기 어려운 관계적 속성으로 존재한다. 둘째, 사회자본은 공공재적 특성을 지닌다. 셋째, 사회자본은 도덕적 자원의 특성을 가진다. 넷째, 어떤 개인들 간 관계인지, 그리고 관계가 동질성과 이질성 중 어떤 측면을 강화시키는지에 따라 공동체 수준의 사회자본의 성격이 결정된다.

그렇다면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는 것은, 신뢰의 효과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적 관계형성의 맥락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요인들을 활용해 사회체계를 어떻게 유형화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글에서는 ?행위자의 성격, ?관계의 불평등성의 정도, 그리고 ?관계를 규제하는 규칙의 투명성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앞에서 제기한 세 사람, 즉 콜만, 부르디외, 퍼트남의 관점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동시에 비교론적 관점에서 한 사회의 신뢰의 특성을 가장 잘 구별해낼 수 있는 요인들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를 개념화하고 제대로 파악해 내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개인적 신뢰에 기반을 둔 집합주의 혹은 인격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와 개인주의 윤리가 작동하는 사회로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그 이외에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성, 혹은 수직적 권위주의의 정도와 사회적 관계의 공적인 제도화의 정도를 함께 고려한 유형화가 필요한 것이다.

인맥과 파벌형성
모든 인간관계는 관계의 양상과 관계의 규칙에 의해 설명된다. 개인의 사회적 관계를 측정하는 한국적인 개념인 ‘파벌’과 ‘인맥’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관계형태로 보면 파벌은 ①집단 간 폐쇄성과 ② 단 내 위계성을 특징으로 하며, 해석적 규칙으로는 ③관계의 비공식성과 ④집단에 대한 강한 귀속감을 특징으로 한다. 파벌과 쌍대성을 이루는 개념은 인맥이다. 인맥도 파벌과 마찬가지로 관계 형태와 해석 규칙으로 나눠 구성요소를 정의할 수 있다. 관계형태를 놓고 보면 인맥은 ①연결성(connectedness)과 ②연결의 강도 (strength of ties)로 측정할 수 있고, 내용적으로는 ③인격주의(personalism)와 ④호혜성의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파벌과 인맥 간의 관계는 개념상 서로 쌍대적이라는 사실이다. 인맥은 비공식적 파벌이 강한 사회에서 그 존재가치가 드러나며, 인맥이 발달한 사회는 파벌이 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인맥과 파벌은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양자 간의 쌍대성을 고려한다면, 인맥은 파벌이 강한 사회에서 유용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논리에 따른다면 한국사회에서는 파벌 형성이 촉진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맥이 더 중요해지는 사회구조적 특징을 갖는다.

파벌의 결속과 강화에 영향을 미쳐 인맥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투명한 규칙부재가 만들어낸 환경의 불확실성이다. 투명한 규칙은 공권력이나 정부체계에 대한 신뢰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힘 있는 사람과의 인맥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가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인맥 활용은 규칙의 일관성이 없는 사회에서 공식적 통로를 통한 문제해결보다 효과적인 대안으로 선택된다.

연고주의와 한국의 조직윤리
연고주의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맥락에 따라 사회자본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사회적 부채(social liability)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연고주의가 문제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고주의는 한국의 강한 중앙집중적인 권력과 결합돼 있기 때문에 문제를 낳고 있다. 둘째, 연고주의는 투명하지 않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더욱 많은 문제를 낳는 경향이 있다. 법률의 해석과 적용이 불투명하고, 항상 타협가능하며, 배경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린다는 경험적 판단을 할수록, 사람들은 연고주의적 동원에 경쟁적으로 매달리게 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최대의 걸림돌이자 장애요인은 중립적이고 공정한 공적 기구가 존재한다고 믿지 못하는, 심판에 대한 강한 불신이다. 이러한 부정과 부패가 규칙을 위반한 사람에 대한 처벌로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규칙위반자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집단내 회귀성향이 만들어내는 강한 결속감은 집단적인 (비공식적) 내부규범을 형성하므로 집단내 위계적인 관계가 곧바로 상납의 고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공적 자원의 사유화는 비단 공직자에게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개인소유의 관념이 비교적 명확할 수밖에 없는 자영업이나 중소기업은 차치하더라도 재벌과 대기업에서도 오너의 사적인 소유의 관념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불신이 강하고 가족에 대한 신뢰는 매우 강해서, 대인관계에서의 신뢰격차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러한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는 한, 공정성 논란을 해소하는 일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사회 개혁의 방향
사회자본을 개인들간의 사적 신뢰관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장점과 이득으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사적인 사회자본의 과잉과 그것의 불평등한 배분에 따른 비효율성을 적나라하게 경험하고 있다. 반면에 사적 신뢰를 넘어서는 새로운 제도적 신뢰의 기반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의 개혁은 바로 새로운 사회적 통합과 응집력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제도화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뢰의 확산을 통해서보다는 가장 원론적인 제도의 틀, 즉 불신에 기반한 철저한 제도화가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업의 경영성과를 투명하게 평가할 수 있는 회계기준의 강화라든가,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 그리고 경영자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주총회의 정상화, 또한 불신받는 정치인을 제재할 수 있는 소환제도나 의정평가 등의 다양한 제도화가 우선하는 과제이다.

한국사회의 개혁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논의에 기반한다면 이것은 곧 사회 전반적인 규칙의 투명성과 일관성에서 기인하는 예측가능성이 가져오는 풍부한 공공재로서의 사회자본을 확대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개혁에서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것은 결국 규칙의 투명성과 일관성, 즉 법치주의의 확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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