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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현대 노년관이 노인 불행의 근원 … 코페르니쿠스적 인식 전환 필요하다
낡은 현대 노년관이 노인 불행의 근원 … 코페르니쿠스적 인식 전환 필요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07.1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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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_ 19강. 홍승표 계명대 교수의 ‘효와 노인 복지’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낡은 현대의 노년관이 노인 불행의 근원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난 9일(토) 서울 종로구 안국동 W스테이지에서 ‘문화의 안과 밖 시즌3-윤리와 인간의 삶’ 4섹션 ‘사회와 윤리’ 두 번째 강연을 맡은 홍승표 계명대 교수(사회학과)가 ‘효와 노인 복지’ 주제 강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홍승표 교수는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양사회사상학회 편집위원장, 한국학논집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깨달음의 사회학』, 『동양사상과 탈현대』, 『노인혁명』, 『동양사상과 새로운 유토피아』, 『동양사상과 탈현대적 삶』, 『탈현대와 동양사상의 재발견』, 『주역과 탈현대문명』 등이 있다.


이날 강연에서 홍 교수는 “노인 불행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현대의 노인이 왜 불행한가를 따졌다. 그는 현 인류가 갖고 있는 비관적인 노년관을 불행의 근본 원인으로 꼽았다. “노화와 노년기에 대한 비관적인 관점은 현대 인간관에서 비롯되는 특수한 관점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어울릴 수 없는 낡은 관점”이란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낡은 현대 노년관이 노인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에 노년관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노년관의 전환이란 무엇을 말할까.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효의 의미와 수행으로서의 효
‘효는 탈현대로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이것이 문명의 현 시점에서 ‘효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 글의 대답이다. 현 시점은 현대문명으로부터 탈현대문명으로의 문명 대전환기다. 탈현대문명의 핵심은 ‘참나가 발현된 사회’라는 것이며, ‘효’는 ‘참나’의 발현을 위한 좋은 수행이다. 효 사상의 특수성은 유독 유교에서만 효와 가족을 사상의 중심에 위치시켰다는 점이다. 유교는 가족을 가장 중요한 삶의 장으로 간주했고, 가족에서 우러나오는 인륜을 사회도덕의 근본으로 상정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효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교의 효 사상은 독특한 것이지만, 인류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윤리의 중핵이 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효 사상은 탈현대로 나아가려는 현 인류에게 유교가 주는 값진 선물이다. 발을 땅에 딛고 하늘을 지향하는 유교의 중용적인 사유방식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수용하는 총체적 인간관의 바탕 위에서 ‘참나’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살기 좋은 탈현대문명 건설의 전략이 될 수 있다. 이때 효는 ‘참나’의 실현을 추구하는 핵심적인 활동이 되며, 이것이 바로 현 시대 속에서 갖는 효의 보편적인 가치이다.


탈현대사회의 전형적인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탈현대인은 ‘참나’를 자각한 사람이며, ‘참나’의 발현으로, 그는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겸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으며, 아름답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탈현대인이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탈현대적인 차원에서의 효이다.

효와 자, 그리고 세대윤리
자녀의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효라고 한다면,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慈라고 한다. ‘효’와 ‘자’를 확대하면 세대윤리가 된다. ‘자’는 ‘효’와 달리 생물학적인 본능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의 경우는 자녀를 사랑하는 생물학적인 본능이 순수하게 발현될 때도 있지만, 때론 이것이 에고와 결합하고, 때론 ‘참나’와 결합하면서 발현된다. 에고의 꿈에서 깨어난 사람, ‘참나’를 자각한 사람만이 진정한 ‘자’를 행할 수 있다. 효와는 달리, 진정한 ‘자’의 핵심은 절제다. ‘자’는 생물학적인 본능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칫 過의 문제에 빠지기 쉽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해주는 것은 진정한 ‘자’가 아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줄여 부모님과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자녀를 올바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세대윤리란 젊은이와 노인이 서로에 대해 지켜야 할 윤리다. 세대윤리의 측면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서는 소강사회조차 회복해야할 목표가 됐다. 그리고 회복을 위한 많은 노력이 경주됐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소강사회의 세대윤리를 복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동사회의 세대윤리를 창조하는 것이다. 대동사회의 세대윤리, 이것을 우리는 ‘탈현대 세대윤리’라고 명명한다.

탈현대 세대윤리와 노인 복지
오늘을 살고 있는 노인은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삶과 한국전쟁을 겪고, 젊은 시절 산업화의 역군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OECD 자살률 1위 국가인 한국, 한국 평균 자살률의 3배에 이르는 80세 이상 노인 자살률, 노인들은 불행과 절망 속에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노인문제는 한국을 비롯한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됐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노인이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는 노인을 ‘노인에 대한 복지’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노인에 의한 복지’의 주체로, 탈현대사회 건설의 주역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현대사회에서 ‘노인에 대한 복지’가 ‘노인 복지’와 동일시되는 이유는 현대 인간관과 이에 따른 현대 노년관 때문이다. 현대 인간관에서 볼 때, 늙음이란 무엇인가. 늙음이란 점점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이며, 건강·부·직업·관계·외모 등, 그때까지 자신이 소중히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상실해가는 과정이다. 이런 까닭으로, 현대사회에서 노인은 늘 젊은이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복지 객체로만 간주되는 것이다. 물론 늙어감 속에서 인간이 노화와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노인에 대한 복지’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 글의 주장은 노인 복지를 ‘노인에 대한 복지’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탈현대 세대윤리 1’ 즉 ‘젊은이의 노인에 대한 공경’에 의해서 현재 추구되고 있는 ‘노인에 대한 복지’가 완성될 수 있다. ‘노인에 대한 복지’는 이미 정책적인 차원에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노인의 생활안정과 복지 증대라는 것이 ‘노인에 대한 복지 정책’의 요점이다. 노인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 노인 헬스 케어의 강화, 운신이 불편한 노인을 위한 도우미 지원과 요양시설 확충, 양로원 등의 노인복지시설의 확충과 개선, 노인정, 복지관, 노인대학 등의 운영 지원, 경로주간의 설치, 국가가 주도하는 생활비보조 등이 현재 시행되고 있는 ‘노인에 대한 복지’ 정책의 양상들이다. 상기한 정책적인 노력과 신기술의 발달은 노인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상당히 감소시켜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과 변화를 통해 노인 불행이 완화될 수는 있지만 노인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것은 통증 해소가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수는 있지만 행복하게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노인에 대한 복지’는 노인이 겪는 불행이 완화됐을 때가 아니라 노인이 행복해졌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노인 복지의 측면에서 ‘탈현대 세대윤리 1’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젊은이들의 노인에 대한 공경’을 통해 ‘노인에 대한 복지’를 완성하는 것이다. 누가 상대편을 진심으로 공경할 수 있는가. 수행을 통해 ‘참나’를 자각하고 ‘참나’가 활동하게 된 젊은이는 노인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다. ‘노인에 대한 복지’가 확대되는 가운데, 만일 젊은이가 노인을 존경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노인은 행복해지고, 노인에 대한 공경을 통해 ‘노인에 대한 복지’는 완성될 수 있다. 즉, ‘탈현대 세대윤리 1’에 의해 ‘노인에 대한 복지’가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노인이 행복한 세상이 가능한가. 더구나 노인에 의해 복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한가. ‘노인에 의한 복지’는 현재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이지만 미래의 멋진 현실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인에 의한 복지 구현’은 ‘탈현대 세대윤리 2’ 즉 ‘노인의 젊은이에 대한 사랑’에 의해 이뤄질 수 있다. ‘탈현대 세대윤리 2’는 탈현대 노년관의 기반 위에서 젊은 시절부터 ‘수행으로서의 나이 들기’를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능력이며, 수행을 통한 ‘참나’의 개방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즉, 인류적인 차원에서 각자가 수행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노인에 의한 복지 구현’이 가능해진다. 탈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행으로서의 나이 들기를 통해 ‘참나’를 자각한 노인은 존재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해서 젊은이와 이 세상에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다. 빛과 소금과 같은 그의 존재로 인해, 이 세상은 점점 더 아름다운 곳으로 바뀌어간다. ‘노인에 의한 복지’가 구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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