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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는 피해자들의 내면을 ‘발견’했는가?
박유하는 피해자들의 내면을 ‘발견’했는가?
  • 임경화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6.07.14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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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정영환 지음|임경화 옮김|푸른역사|278쪽|15,000원

 
박유하는 모순되고 대립하는 다양한 계기들을 품은 채 유동하면서 나아가는 ‘생의 총체성’
(루카치) 속에서 문학의 리얼리티를 읽어내려는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에 관한 비판에는 너무나 간단히 ‘해석의 문제’, 즉 언어론적 전회론(우에노 지즈코)에 기댄다.

 

▲ 정영환 교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서인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을 번역한 이유는, 이 책의 저자인 정영환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 교양교육센터 준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실증적이고 ‘집요하게’ 『제국의 위안부』의 검증 작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된 텍스트를 비교분석하고, 텍스트에 인용된 출전을 전부 검증하고, 선행연구를 참조해 저서의 연구사적 위치를 가늠해 가며 텍스트의 논지를 확정하는 등의 대단히 고된 작업이었다.

이를 통해 정영환이 밝혀낸 것은 우선 『제국의 위안부』에 보이는 수많은 오류들이다. 이것은 사료 해석의 초보적인 실수뿐만 아니라, 증언의 취사선택과 자의적인 해석, 상호모순된 주장의 병존, 논리적 비약, 선행연구들의 주장 왜곡 등 실로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그런데 정영환의 작업은 이러한 검증 작업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료들의 조사나 독해, 논증을 모두 희생시키면서까지 저자가 표명하고자 한 정치적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즉, 적절한 검증 절차 없이 일본사회에서 보수와 리버럴의 대립 구도를 넘어서 이 책이 이토록 절찬 받는 데는, 박유하가 제시한 ‘위안부’ 이미지가 일본사회가 바라는 이미지와 합치한다는 점을 든다.

박유하는 한일 간에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갈등의 중심에 있는 것은 ‘위안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또한 ‘일본군에 강제연행된 순진무구한 조선인 소녀들’이라는 ‘위안부’ 이미지는 지원단체 등에 의해 왜곡된 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기억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왜곡된 이미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제국의 위안부’론이다.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과의 관계에서 일본인 ‘위안부’와 동일한 위치에 있으며,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애국’적 존재로서,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고 스스로도 ‘동지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해방 후에는 ‘식민지의 후유증’ 때문에 스스로 ‘제국의 위안부’였던 기억을 은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영환은 이 주장이 사료의 오독, 증언의 자의적 해석과 취사선택, 연구 성과에 대한 잘못된 이해 등에 의해 도출된 가설에 지나지 않음을 명확히 했다. 더욱이 ‘제3의 목소리’ 등으로 명명해 마치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나 새로운 해결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포장된 ‘제국의 위안부’론은, 1980년대 이전에 ‘병사들의 목소리’로 구축됐던 ‘사랑’ ‘위안’ ‘운명’ ‘애국’ ‘동지’ 등의 키워드를 가진 ‘위안부’ 인식으로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병사들의 목소리’는 1990년대 이후 아시아 피해 여성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구조적인 성폭력 시스템으로서의 ‘위안부’ 제도가 규명되면서 뿌리부터 흔들리게 됐다. 박유하는 이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배후의 지원 단체들에 의해 왜곡된 목소리일 뿐,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는 아니라고 하면서 피해자들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존중하는 듯한 어법을 구사한다. 하지만, 실상은 ‘병사들의 목소리’의 복권 시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에 대해서도 『제국의 위안부』가 시도한 것은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정영환은 말한다. 박유하는 대일본제국 논리의 범위 내에서 ‘위안부’ 문제를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본인 ‘위안부’와의 ‘애국’적 동기의 공통성, 병사와의 ‘동지적 관계’를 강조하고, 미성년자 징집으로 대표되는 ‘위안부’ 제도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유하는 오히려 일본의 ‘제국의식’에 호소해 조선을 ‘통치’한 자로서 예전에 ‘동지’였던 (구)식민지 ‘신민’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호소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사회에서 절찬 받은 데는 ‘두 개의 역사수정주의’가 작용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한 것은 대일본제국의 책임과 동시에 ‘전후 일본’의 책임이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는 냉전체제 속에서 아시아에 대한 가해책임을 마주하지 않고 묻어둘 수 있었던 전후 일본의 역사를 되묻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유하는 일본의 ‘전후사’를 전쟁 책임, 식민지 지배 책임을 마주해온 역사로 그리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 사태란, ‘일본군 무죄론’에 의한 ‘대일본제국’ 긍정 소망과 ‘전후 일본’의 긍정 소망이라는 ‘두 개의 역사수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욕망이 낳은 산물인 것이다. 즉 일본 사회 내부에 있는 ‘두 개의 역사수정주의’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작업이야말로 ‘제국의 위안부’ 사태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정영환의 이와 같은 분석은 한국에서도 불붙은 ‘제국의 위안부’ 논쟁에 중요한 참조틀을 제공할 것이다. 지금까지 『제국의 위안부』의 해석을 둘러싸고 옹호하는 쪽과 비판하는 쪽이 서로의 주장의 근거가 되는 부분들을 저서에서 끌어내 논진을 펼치며 첨예하게 대립했고 혼란과 갈등은 증폭되기만 했다. 저자인 박유하 자신도 “모든 것은 해석의 문제”라며 비판자들의 주장을 ‘오독’이나 ‘왜곡’이라 평했다. 특히 정영환의 비판에 대해서는 종종 텍스트 분석에서 문학 연구자만큼의 긴장감과 섬세함을 결여한 역사 연구자의 한계를 지적하곤 했다.

하지만, 박유하의 텍스트 분석은 과연 문학연구에 걸맞은 것일까. 박유하는 증언이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면에 접근해 동지의식과 ‘내면화된 애국’을 읽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병사들의 목소리거나 증언의 일부를 취사선택해 도출된 해석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문학연구의 방법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물론 정영환이 언급했듯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해 문학 연구자의 접근 방법으로도 밝힐 수 있는 사실들은 많을 것이다.” 특히 근대문학 연구는 권선징악이라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고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간의 내면을 파헤치고 거기에서 문학적 리얼리티를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가해자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증언자(황순이)의 증언을 일부만 선택해 일본을 용서하고 화해를 원하는 ‘위안부’ 이미지를 읽어내는 박유하의 수법과 증언자의 증언 전체와 인생의 궤적을 총체적으로 고려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정영환의 수법은 어느 쪽이 문학적 연구인지 분간을 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박유하는 모순되고 대립하는 다양한 계기들을 품은 채 유동하면서 나아가는 ‘생의 총체성’(루카치) 속에서 문학의 리얼리티를 읽어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에 관한 비판에는 너무나 간단히 ‘해석의 문제’, 즉 언어론적 전회론(우에노 지즈코)에 기댄다. “‘언어론적 전회’ 이후 역사에 ‘사실’도 ‘진실’도 없다. 다만 특정 시각에서 재구성된 ‘현실’만이 있다”는 이 견해는 ‘사실’도 ‘진실’도 부정한 채 특정 시각을 가진 개별 주체들의 ‘현실’의 끊임없는 나열을 초래했다. 그리고 지금 진실의 부정은 바로 피해자의 기억의 망각이자 소통의 거부로 드러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 사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낳은 ‘언어론적 전회’의 극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되고 있다.

임경화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비교문학, 코리안 디아스포라 비교연구 등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동아시아한국학의 분화와 계보: 복수의 한국학들』(공저), 옮긴 책으로는『나는 사회주의자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 선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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