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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스승을 기리는 방식 … 삶과 학문의 자세를 엿보다
정신의 스승을 기리는 방식 … 삶과 학문의 자세를 엿보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6.28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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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_ 『철학자 정석해』 복간본의 의미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1989년, 이제는 아득한 시간이 돼 버린 그 시절에 연세대출판부에서 나온 책 『철학자 정석해: 그의 시대, 그의 사상』을 복간한 것(박상규 지음, 사월의책, 432쪽, 18,000원)이다. 한국 철학사 아니 한국 지성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책이다.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면 문봉리에서 태어난 西山 鄭錫海 선생(1899~1996)은 그의 종생이 말해주듯, 격동의 시절을 온몸으로 살아낸 한국 사상계의 원로다. 일찍이 나라 잃은 시절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는데, 연전 기독학생회 회장으로 3·5 남대문 역두에서의 시위를 준비했으며, 독립선언서를 하숙집에서 인쇄해 각급학교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1920년에는 도산·춘원·임득산 등을 만나 그들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 시기부터 서산은 파리, 뷔르츠부르크, 하이델베르크, 베를린을 옮겨 다니다가 1924년 11월 파리대학 철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33년에는 제네바에 체류하는 이승만을 南佛에 초청, 독립운동의 이야기를 나누고, 이용제와 함께 경제적 도움을 줬다. 1939년 귀국길에 올랐지만 그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가까스로 고향 철산에 돌아온 것은 1940년 1월이었다.

 도산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기도
1945년 8월 17일 서울로 달려간 서산은 인촌·허헌·몽양 등 민족의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지만 정치 풍토에 환멸을 느끼고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보성전문으로 와 달라는 인촌의 부탁을 받고 반승낙 상태에서 하루 차이로 또 연희전문에서도 그를 불렀다. 한결·최규남·유억겸 등의 청으로 연희로 가기로 결심했고, 보성전문엔 시간강사로 나가기로 했다.

1945년 10월 25일 연희의 개강으로 서산의 교수생활도 막을 열었다. 참혹한 전쟁 시절을 지나 1957년 문과대학장직을 끝으로 보직에서 벗어나 연구와 강의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무어의 『윤리학 원리』를 번역해 출간했다. 1959년 한국철학회 회장직을 맡았다. 1960년 4·19 혁명은 그의 생애를 다시 한 번 뒤바꿨다. 19일 동료 교수들과 함께 학생 데모 현장으로 달려 나갔던 그는 21일 고려대 이상은·이종우, 서울대 최재희 교수 등과 함께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4·19혁명의 대책을 의논했다. 25일, 서울대 교수회과에서 임시의장으로서 교수단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른바 4·25교수단 시위를 주도했다. 연세대 학원민주화운동에 참여했지만 이 운동은 끝내 실행되지 못한 채 끝났다. 이듬해인 1961년 10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교수 정년이 60세로 하향 조정되면서 서산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해야 했다. 1962년부터 서산은 연세대 철학과 시간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속에서도 1965년 3월 24일, 대일굴욕외교 반대 재경교수단 선언문을 채택, 시위를 주도했다. 1981년 7월 4일 20년 동안의 특별강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이주한 서산은 1996년 8월 14일 머나먼 이국땅 로스엔젤레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원래 서산은 자신이 걸어온 생애, ‘그 많은 값진 사연을 아예 묻어 두고자 하는 심산’인 것만 같았다. 1989년 『철학자 정석해: 그의 시대, 그의 사상』을 집필했던 박상규 당시 홍익대 교수는 초판 저자 후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선생님의 결연한 태도에 한 가닥 변화의 틈이 보이게 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소년기에 시작해 기나긴 망명·유학 시절을 거쳐 일제 말기와 건국 후 독채 치하에서 그 순수하고도 고결한 민족구국 운동과 민주 운동의 역정을 걸어 온 선생이 이제 와서 갑자기 본인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항일·민족운동의 별들을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어서, 또 그리고 그 숭고한 뜻을 같이 했던 이국에서의 동지들과 광복 후 고국에서의 친지들을 되새기면서 사실을 사실대로 남겨두고자 하는 진실된 증언의 자세가 그 분명한 동기였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그 대가를 보상받을 수도 없는 생애의 만년에 이르러서야 공개할 것에 동의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89년 어수선한 시절에 이 책은 첫 모습을 드러냈다.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생애를 정리했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지성사적 접근에 있어서 중요한 기록사적 가치도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서산과의 열 차례, 총 20시간의 면담 내용, 서산의 저술, 박 교수의 학부·대학원 시절인 1953년에서 1959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수강했던 서산의 강의록, 책 여기저기 인용된 많은 이들과의 면담 내용, 한결 김윤경 선생의 「일기」를 바탕으로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두고 애초 ‘회고록’ 계획에서 ‘평전’의 형태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평전’은 서산 정석해 선생을 회고하는 기록이다. 서산이라고 하면 아는 이가 거의 없고 본명을 써도 오늘의 세대에서는 거의 잊힌 인물이다. 선생이 학계에 있으면서 글을 별로 쓴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본인이 자기를 표현하기는커녕 막무가내 자신을 감추고자 애를 써 온 그 생애가 주원인이요, 그간의 몰가치적·몰역사적인 냉혹한 현실주의적 세태가 그 다음의 원인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대목이 문제적이다. “그러나 선생은 잊힐 수 없는 인간이며 또한 잊혀서도 안 될 인물이다.” 왜 그러한가?

일본 학계 경유하지 않은 독특한 학문 이력
저자는 세 가지를 꼽았다. 이 민족 현대사의 자랑스러운 2대 사건과 관련된다는 것(3·1독립만세운동 학생시위 주모자, ‘4.25 교수 데모’의 주도적 인물),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친 긴 세월을 유럽에 유학해 일본 학계를 경유하지 않고 서양철학을 본바닥에서 수학한 후 해방된 조국의 대학 강단에서 강론한 한국 철학계의 원로라는 것, 1960년대 대학 민주화 운동을 선도한 장본인이라는 것. “실로 선생은 순수한 학자요, 민족 독립운동가이자, 반독재·민주화 실천운동의 투사”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책은 모두 9장으로 구성됐다. 1장 철학자의 생애에서 시작해 성장과 지적 변모 과정을 따라간 2장~8장, 그리고 회고와 일화로 본 서산의 생활과 철학을 다룬 9장으로 마무리된다. 4장 유럽 유학과 연구 시절, 6장 학문과 교육의 길, 8장 만년의 학문과 삶은 ‘철학자 정석해’를 가감 없이 드러내준다.
저자는 서산을 가리켜 ‘개인보다 큰 것’에 경외심을 지녔다고 평했다. “남이 두려워하고 몸을 빼는 일에 대시 나서고 그리고도 아무런 보상과 논공행상을 기대하지도 않았으며, 잘한 일을 감춰 두고 본무에 충실을 기했던 선생의 의연한 태도에서 우리는 실로 ‘초절의 숭고함’마저 느낀다. 사실에 있어서 매사에 담담했던 선생이건만, 선생을 감명케 하는 일은 이와 같은 ‘개인보다 큰 것’에 대한 외경이요, 그와 같은 일에 위험과 모험을 무릅쓰고 자기를 돌보지 않는 희생의 정신이다.”
1989년 출간 된 뒤 단 한 번도 속간되지 않고 묻혀 있었던 책. 어쩌면 이 책은 또 다시 묻혀버릴 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게 묻힌다 해도, 정신의 스승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면, ‘선생’된 이들이 어떻게 학문과 삶에 임해야 하는지 옷깃을 여미며 성찰하려는 이들이 있기만 하다면, 이 책은 거듭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올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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