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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여전히 ‘구경꾼’에 머물러야 하는가?
관객은 여전히 ‘구경꾼’에 머물러야 하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16.06.2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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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해방된 관객』 자크 랑시에르 지음|양창렬 옮김|현실문화|256쪽|18,000원

 

관객이 현실을 모르고 외양을 보는 데 현혹된 채 수동적으로 머문다는
‘관객의 역설’, 얼핏 고루한 이 철학적
문제에서 출발해서 근현대 연극론, 사진 몽타주, 퍼포먼스, 영화 등을 오가며
불평등주의 논리를 논파하는 저자의 솜씨는 놀랍기 그지없다.

 

공연을 관람할 때 관객이 하는 경험을 떠올려보자.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고 정해진 객석에 앉으면 불이 꺼지고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들이나 은막을 스쳐가는 이미지들에 시선을 고정한다. 라틴어 actor와 spectator에는 배우(행위자)의 능동성과 관객(구경꾼)의 수동성이 내포돼 있으며, 공연 관람에서 관객의 위치는 플라톤의 동굴에서 앞만 보도록 포박된 죄수의 그것과 닮았다. 미술관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화이트 큐브에 전시된 작품의 제목을 보고 제목과 작품이 어울리는지, 또는 작품 설명에 적힌 작가의 의도를 읽고 작품에 대해 자신이 느끼고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곤 한다.
보기와 인식하기, 외양과 현실, 수동과 능동의 구분은 관객을 규정짓는 오래된 나눔의 방식이다. 관객의 ‘참여’와 ‘해석’을 통해 작품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이론과 실천이 20세기 중후반에 넘쳐났지만 관객이 수동적이라는 표상은 여전하다. 지적 능력의 평등과 지적 해방을 논한 『무지한 스승』(1987)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그는 이 책 『해방된 관객』(2008)에서 배우·작가와 관객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철학 담론, 이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연극 개혁 프로그램, 숨겨진 현실의 이면을 들춰냄으로써 관객에게 성찰을 이끌어내려는 비판적 예술, 관객의 참여를 통해 사회성의 모델을 제안하는 관계적 예술 등을 의문에 붙인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1980년대 프랑스의 교육 개혁 논쟁에 개입하기 위해 19세기 루뱅 대학 프랑스어 담당 외국인 강사였던 조제프 자코토의 모험을 불러낸다. 자코토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했으나, 정작 본인은 네덜란드어를 몰라 프랑스어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페늘롱이 쓴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학생들 손에 쥐어주고, 그 책을 반복해서 읽고 외우도록 한 뒤, 학생들이 읽은 것, 본 것, 생각한 것 등을 물음으로써 학생들이 스스로 프랑스어를 깨우치도록 만들었다. 랑시에르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암기, 반복, 자기 주도 학습, 문답법 등을 활용한 교수법 개선이 아니다. 교수법을 개혁하려는 무수한 시도들은 설명을 통해 학생을 무지의 상태에서 지식의 상태로 전환하기 위해 애쓴다. 이는 지적 능력의 불평등에서 출발해 스승과 학생 사이 거리를 축소하려는 점진적 기획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학생이 배워야 하는 것은 스승의 학식일 뿐이다. 책과 학생이 직접 씨름하도록 내버려두고 자신의 학식과 설명을 학습 과정에서 빼낼 때 스승은 해방하는 스승이 되고, 스승의 끊임없는 요구에 답하면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때 학생은 해방된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자신의 지적 능력의 평등을 입증하고, 스승은 그것을 검증하는 것이다.

『해방된 관객』에서는 연극 개혁이 도마에 오른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배우와 관객의 동일시를 중지하고 관객을 거리를 두고 인식하는 관찰자로 만들고자 했다. 앙토냉 아르토는 관객을 연극에 참여시킴으로써 배우와 관객 사이 거리 자체를 없애고 연극을 생의 에너지가 교류되는 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두 프로젝트는 연극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객을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인 상태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는바, 보기/알기, 외양/현실, 수동성/능동성 같이 관객을 둘러싼 기존의 나눔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해방이란 이러한 나눔을 문제 삼을 때 시작된다. 관객은 자신이 본 장면, 퍼포먼스, 이미지 등을 다른 곳에서 봤던 많은 것들과 연결하고, 자기 나름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모국어를 배울 때, 의사소통을 위해 타인의 생각과 표현을 짐작하고 번역하기 위해 애쓸 때 쓰는 바로 그 지적 능력(관찰하기, 기억에 담아두기, 되풀이하기, 검증하기, 알려고 하는 것과 이미 아는 것을 연관시키기, 행하기, 행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이 작품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로 발휘되는 것이다. 작가와 관객의 거리를 만들거나 없애기 위해서 작품이 사라지는 매개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작가와 관객 사이에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제 3항으로서 작품이 남아있어야 한다. 누구도 그 작품의 (의미의) 소유자가 아닌 것이다.

연극 개혁 프로그램에 따르면, 공연에서 관객이 보거나 느껴야 하는 것은 연출가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현실 또는 무대에서 공유되는 활력이다. 이러한 원인과 효과의 동일성은 동시대 미술에서도 꾸준히 발견된다. 안락한 실내 인테리어와 전쟁의 참화를 병치하는 포토몽타주는 은폐된 현실을 비춤으로써 관객을 행동에 나서게 하겠다고 주장한다. 해방 전망의 붕괴 이후 모든 것이 스펙터클이 돼버렸다고 체념하는 사유는 반전 시위대와 쓰레기통을 함께 보이면서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 역시 스펙터클에 의해 촉발된 스펙터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느 경우든 관객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자요, 관객이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작가가 작품을 매개로 제시하는 인식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만남을 촉발함으로써 기존의 폐쇄된 예술의 장에 외적인 관계를 생산하려는 예술은 작가와 관객의 거리를 제거할 뿐 아니라, 심지어 사람들이 맺어야 할 관계성이나 사회성의 형태를 오브제의 형태로 미리 구현하기도 한다. 작품을 삶-관계로 전환하려는 이 기획은 연극을 제거함으로써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오래된 플라톤의 윤리적 기획과 닮았다.

랑시에르는 이 모든 것들에 맞서 미학적 체제에 가능해진 미학적 실효성 모델을 내세운다. 미학적 실효성이란 예술 형태의 제작과 특정 공중에 대한 특정 효과의 생산 사이에 있는 모든 직접적 관계를 중지하는 실효성을 뜻한다. 랑시에르는 이를 예시하기 위해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토르소 분석, 근대 미술관이 가능케 한 미학적 단절, 칸트의 무사심한 미적 경험을 실행하는 노동자의 일상 등을 분석한다.

랑시에르는 1990년대 중반부터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미학의 영역에 적용하면서 예술 식별 체제를 개념화했고,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 교육론과 칸트의 미적 경험에 기반을 두고 기존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론과 맞섰다. 아우슈비츠로부터 촉발된 재현 불가능성 담론 또는 숭고미학의 윤리적 함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모든 그간의 문제틀이 『해방된 관객』에 녹아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 『이미지의 운명』, 『미학 안의 불편함』의 문제틀을 집약해 동시대 미술에 적용하고, 이후 그의 미학을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는 『아이스테시스』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움츠림과 같은 책이다.
관객이 현실을 모르고 외양을 보는 데 현혹된 채 수동적으로 머문다는 ‘관객의 역설’, 얼핏 고루한 이 철학적 문제에서 출발해서 근현대 연극론, 사진 몽타주, 퍼포먼스, 영화, 비디오, 설치 작품 등을 종횡무진하며 불평등주의 논리를 논파하는 저자의 솜씨는 놀랍기 그지없다. 일독을 권한다.

 

 

양창렬 철학 연구자
필자는 고대 원자론과 현대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알튀세르 효과』,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등을 함께 썼다.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 『무지한 스승』,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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