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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담론’기획 돋보여 … 20년 성찰은?
‘혐오담론’기획 돋보여 … 20년 성찰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6.09 2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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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 20주년 기념호로 나온 영미문학연구 <안과밖> 제40호

영미문학 연구의 한국적 모형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온 반년간지 <안과밖>이 40호를 출간했다. 물론, 발간 20주년 기념호라는 ‘기념탑’을 돌려보면, 이 학술지가 창간되던 1996년이 멀리 조망된다.
영미문학연구회(회장 박찬길 이화여대 교수)는 <안과밖>보다 1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6월 창립대회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창립취지문이 인상적이다. “영미문학의 연구와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지금껏 떠맡아온 사회적 책무는 자못 큰 것이었으며, 영어권의 영향력이 전지구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그 책무는 더욱 더 무거워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미문학을 한국사회의 현실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사고하고 연구하는 작업은 그다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더구나 영미문학연구가 연구자 개개인의 학문적 열정이나 노력에 주로 내맡겨진 까닭에 학문적 성과 산출에 비효율성이 초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미문학연구가 그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방향을 정립해나가는 일도 더디게 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영미문학연구회의 탄생 배경이 뚜렷하게 엿보인다.

그러니까 영미문학연구회는 ‘영미문학연구의 사회적 의의와 학문적 공동작업의 필요에 공감하는 소장 연구자들의 역량을 조직적으로 결집’한 형태로, 당시 ‘소장 연구자’들도 20년이 지난 지금, 중진을 한참 지난 존재로 진화해 있다. <안과밖>을 만드는 이들, 즉 편집고문(김우창, 백낙청, 유종호, 이상섭, 이상옥, 임철규), 상임편집위원(김수연, 김창희, 엄동희, 이시연, 이정진, 정희원, 한광택), 편집기획위원(변현태, 성은애, 심보선, 이미영, 전인한, 황정아) 등을 보면 이들의 ‘공동작업’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 이런 탓에 <영어영문학>이란 모학회지가 역사성과 영미영어문학 전체 지형을 그려냈다면, 영미문학연구회는 젊은 연구자들끼리 좀 더 소통하면서 ‘사회적 의의’까지 확장해내는 작업, 현실비판적인 진보적 영미문학연구의 스펙트럼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장 앞자리에 <안과밖>이 놓인 셈이다.

<안과밖> 40호의 ‘책머리에’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지난 20년 동안 ‘학술적 전문성’과 ‘대중성’, ‘문학’적인 것과 ‘비문학’적인 것의 경계를 허무는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세우려고, 즉 한국에서의 영미문학 연구의 새로운 모형을 세우려고 노력해왔다.” 이런 의미 찾기 혹은 의미 만들기는 이번 40호의 ‘특별좌담’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안과밖>이 걸어왔던 시간, 그리고 가야할 길에 대한 솔직한 고민을 읽어낼 수 있다. 김명환, 박인찬, 윤조원, 이정진, 김영아(사회자) 등 각기 다른 시기에 <안과밖>에 참여했던 영문학자들이 머리를 맞댔는데, 의미가 있다면 “사석에서나 가능했던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공개적으로 나누고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다른 학회지들에게도 시사적이리라.

<안과밖> 40호를 보면서 이 학술잡지의 기민한 분석력에 무릎을 치게 되는데, 이번호에는 특집 주제인 ‘우리는 왜 혐오하는가: 문학 속의 혐오들’이 그렇다. 기획 청탁과 제작 일정을 염두에 둔다면,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으로 혐오 문제가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크게 다뤄지기 훨씬 전임을 알 수 있다. 「혐오와 여성의 살: 정동과 감정」(김종갑), 「근대 초기 드라마의 여성혐오적 화장담론: 『매리엄의 비극』을 중심으로」(이미영), 「불안, 희열, 분노: 포크너의 「메마른 구월」에 나타난 린칭과 인종혐오」(김용수), 「베시 헤드의 『마루』에 나타난 인종주의와 혐오/자기혐오의 문제」(최선령) 등이 실렸는데, 이들 논의는 단순히 ‘여성혐오’에 국한하지 않고 인종주의와 혐오, 그리고 감정의 문제로까지 심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쟁점’ 편에는 ‘뇌, 주체, 비평’을 주제로 두 편의 글을 다뤘다. 「신경과학, 인지과학적 문학연구, 비평의 미래」(한광택), 「뇌는 세계를 어떻게 파괴/창조하는가?: 말라부의 뇌가소성과 뉴런 이데올로기」(정혜욱) 두 글은 문학연구와 비평을 인지과학과 잇대 성찰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학비평의 미래를 예측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야를 제공한다. 한광택의 글은 신경과학과 문학비평 간의 통섭을 시도하는 국외 비평 조류를 소개하고 있어서, 관심 있는 연구자들에게 유용할 것같다.

‘쟁점’과 함께 눈길을 끄는 기획은 아무래도 논문 「심리치료와 재생 스토아주의: 치료적 감정 개념에 관한 비판적 고찰」(김성호)일 것이다. 최근, 감정에 관한 담론이 축적되고 있는바 김성호의 글은 이러한 ‘감정’ 개념을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했다는 데 의미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최근 스토아주의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인지행동치료(CBT)에서 논의하는 ‘감정’ 개념을 조명했는데, 이 감정 개념이 고전 스토아철학의 인지주의, 결단주의 탈정치화 성향을 선택적으로 계승·강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스토아주의가 ‘사유’라기보다는 (부정적) 감정을 치료하고 (긍정적) 감정을 생산하는 ‘기술’로 왜곡됐다고 지적해 새로운 논쟁도 예상된다.
그래도 아쉬운 대목이 있다. <안과밖> 출범 20년은 사실 한국 대학 체계의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는 시간과 동선이 같다. 우후죽순격의 각종 대학담론과 정책이 양산된 시기이기도 했다. ‘특별좌담’에 보태 영미문학 연구(자) 내부 문제에 집중해서 ‘다시 오늘날, 영미문학연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따지는 좀 더 따가운 내부 성찰을 기획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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