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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혼돈의 이미지에서 생성을 향한 신개념으로
불확실성·혼돈의 이미지에서 생성을 향한 신개념으로
  • 최성철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역사학
  • 승인 2016.06.09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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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역사와 우연』 최성철 지음| 도서출판 길| 572쪽| 35,000원

 동서양을 통틀어 ‘역사에서의 우연’을 사학사적으로 그러면서 통사적으로
규명한 사례는 거의 전무하다. 물론 다루지 못한 사상가,
역사가들도 있어 빈 공간이 좀 보이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연구사적) 의의는
이제껏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길을 갔다는 데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역사에 대해  좀더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기대한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이 세계는 언제나 우연으로 뒤덮혀 있는 세계로 그려진다. 지금 당장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이 반복됐던 前근대 시기에 이 세계가 필연의 세계로 보였던 적도 있었지만,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복잡해진 근대 이후의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우연으로 다가온다. 인간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 사회, 이 거대한 우주는 우리가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더 알 수 없는 세계로 변해간다. 우연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돼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연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연은 각 시대와 각 사상가들에 의해 어떻게 해석돼 왔을까. 역사에서 우연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우연적 과정일까, 필연적 과정일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학술적 탐구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역사학계에서 그동안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밀어내왔던 뜨거운 감자 ‘역사에서의 우연’의 문제를 사상사적으로, 그리고 사학사적으로 추적한 후 그 결과값들을 다시 역사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목적을 두고 기획됐다.

먼저 제1부 사상사적인 탐구 작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오늘날 미국의 분석철학자 리처드 로티까지 주로 철학사상에서 ‘우연’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되고 전개돼 왔는지를 천착했다. 원래 ‘우연(contingency)’은 ‘함께 접촉하다’ 또는 ‘동시에 맞아 떨어지다’는 뜻의 라틴어 동사 ‘contingere’에서 유래한 단어다.
그 존재가 논리적으로 반드시 필요하지 않고, 또 그것의 不在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현존하는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통찰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시도됐다. 그는 우연을 (1) 동반적 우연, (2) 행운적 우연, (3) 자발적 우연, (4) 가능적 우연, (5) 잠재적 우연 등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눠 이해했다. 중세에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도 우연을 (1) 행운의 사건, (2) 임의적 사건, (3) 자연적 사건(자연에 원인이 있는 사건) 등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사용했다.

중세에서의 우연은 언제나 필연으로서 신의 섭리로 완성된 대자연의 기획 안에 포괄되는 한계를 보이지만, 르네상스를 거친 후 세속화의 길로 접어든 근대에 오면 우연 개념이 다시 중요한 가치개념으로 부활한다. 가령 라이프니츠는 그 逆이 어떠한 모순도 포함하지 않는 모든 것이 바로 우연적이거나 非필연적이라고 규정했다. 우연을 필연의 반의어로 사용했던 칸트조차 경험적 판단을 우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계를 하나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으로 인식했던 헤겔은 우연을 다시 열등한 지위로 추락시킨다. 상대성, 카오스, 프랙털, 빅뱅 등 비결정성과 불확정성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포스트모더니즘이 풍미한 20세기에 ‘우연’은 다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다. 가령 부트루는 이 세계가 극단적으로 비결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고, 하르트만 역시 우연을, (1) 의도하지 않았던 것, (2) 예기치 않았던 것, (3) 계산하지 못했던 것, (4) 비본질적인 것, (5) 근거가 없는 것 등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역사가들은 ‘우연’ 개념을 어떻게 수용 또는 활용해왔을까. 제2부에서는 사학사적인 검토 작업이 이뤄진다. 서양 고대의 역사서술에서 우연은 ‘tyche’로 표현된다. 라틴어로는 ‘fortuna’로 번역되는 ‘tyche’는 ‘운(fortune)’, ‘우연(chance)’, ‘운명(fate)’ 등의 뜻을 지니면서 일반적으로 비합리적인 인과론, 초월적 운명 등을 함축한다. 고대 역사가들의 이러한 다의적 ‘tyche’는 중세의 기독교 연대기 작가들에게 ‘섭리적 티케’라는 좁고 한정된 의미로 축소된다.

르네상스에 오면 마키아벨리나 구이치아르디니 같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행운의 여신(fortuna)은 ‘섭리의 딸’이자 ‘우연의 어머니’로 인식되었다. 섭리(할머니)-행운(어머니)-우연(딸)으로 이어지는 모계 전통의 역사는 이후 서양의 역사서술에서 하나의 견고한 축을 형성한다. 계몽주의 시대에 오면 철학적으로 거부될 조짐을 보이던 우연이 역사서술에서는 부분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수용되는 복합적 양상을 띤다. 헤겔이 철학적으로 거부했던 ‘우연’은 19세기에 이르면 역사주의학파에 의해 거의 완전히 제거된다. 역사서술이 학문화되고 역사 관념이 정교하게 다듬어져가는 깨끗한 건물 안에 우연이라는 누추한 손님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졌던 것이다. 불확정성과 비결정성의 시대인 20세기에 들어오면, 역시 철학적으로 적극 수용되었던 우연 개념이 다시 역사서술적으로도 활성화되는 계기를 맞는다. 가령 영국 역사가 피셔는 역사에서 예기치 않았던 일의 역할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우연을 강조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인 오늘날 역사학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제3부에서는 그동안의 고찰을 토대로 역사와 우연의 관계를 성찰하면서 ‘우연’에 대한 역사이론적 개념화 작업을 시도했다. 먼저 서양의 철학사상에서 전개된 수많은 ‘우연’ 개념을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하면 ‘예측불가능성’과 ‘가능성’이 된다. 이 둘은 서로 ‘가능’이라는 개념으로 묶여 ‘자유’, 더 나아가 ‘창조’로 수렴된다. 우연은 이제 더 이상 불확실성, 혼돈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명과 생성을 향한, 활기찬 新개념으로 거듭난다. 이러한 활력의 가능성은 역사서술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운명, 행운, 섭리 등 모든 긍정의 의미와 에너지로 표출된다. 우리 일상의 삶 자체가 우연의 연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우연이란 ‘가능’을 재료로 한 ‘활력’, ‘기회’, ‘희망’이라는 이름의 걸작으로 완성된다. 철학과 역사와 일상에서 파악된 우연이 이렇게 긍정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면, 역사와 우연은 이제 필연적 관계로 연결될 운명을 안고 태어난다.

  동서양을 통틀어 ‘역사에서의 우연’을 사학사적으로 그러면서 통사적으로 규명한 사례는 거의 전무하다. 물론 다루지 못한 사상가, 역사가들도 있어 빈 공간이 좀 보이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연구사적) 의의는 이제껏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길을 갔다는 데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은 그동안 역사를 ‘필연의 과정’이니 ‘승자들의 업적’ 등 일면적으로만 이해해온 우리들에게 이제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독려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역사가 곧 우연은 아닐지 모르지만, 역사에서 우연을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역사적 진실에 단 한 걸음도 다다가지 못할 것이다.

최성철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역사학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서양사학회에서 연구이사와 편집이사, 한국사학사학회에서 편집이사와 총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부르크하르트: 문화사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다』, 『과거의 파괴: 19세기 유럽의 반역사적 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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