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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윤리, 열린 민주주의 지향하는 동시에 그 적도 경계해야”
“법조윤리, 열린 민주주의 지향하는 동시에 그 적도 경계해야”
  • 교수신문
  • 승인 2016.06.0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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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_ 13강.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의 ‘법의 정의와 법률가의 윤리’

 지난달 28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 강연 13강은 혼탁한 시절에 걸맞은 주제와 맞섰다.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의 강연 ‘법의 정의와 법률가의 윤리’다.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의  3섹션 ‘정치 공간과 구성’ 중 네 번째 강연이다.
이날 강연에서 안경환 명예교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사회는 ‘법의 일상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판검사로부터 변호사로 이동하고 있고 소송을 통한 구제보다 소송의 예방과 대안적 분쟁 해결 방법이 주목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법이 사회질서의 근간이며, 법조윤리는 법과 사회를 이어주는 ‘체제윤리’라고 말하는 안 명예교수는 “도덕적인 법조인을 추구하는 법조윤리는 일반인에게 기대되는 보편적 윤리를 초월한 ‘전문윤리’”라고 강조했다. 전관예우, 법조비리가 횡행하는 세태에 던진 일침이기도 하다. 안경환 명예교수는 “한국사회에서 법률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성적 지상의 엘리트주의, 관존민비의 권위적 체질, 대표적인 사회특권층 등으로 인식돼 매우 부정적”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이러한 법률가에 대한 불신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인 정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 안 명예교수는 “법조윤리도 자유와 평등,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가치의 다원성을 존중하며, 갈등의 평화적 해결과 같은 민주사회의 근본가치에 바탕을 둬야 하며 사회질서의 중추로서 열린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동시에 그 적도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 명예교수의 강연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21세기 초에 스타 학자로 떠오른 이스라엘 출신의 유발 하라리는 변방의 유인원 호모 사피엔스가 만물의 영장이요, 지구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현실세계에 보이지 않는 가상적인 ‘보편적 질서’를 창안하는 능력을 개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이러한 가상적 보편질서의 대표적인 예로 화폐, 제국적 질서, 그리고 종교를 들었는데, 논의를 확대하면 법도 일종의 가상적 보편질서다. 법의 목적은 정의 실현에 있다. 서양 전통에서 법의 여신은 정의의 여신을 겸한다. 미국의 법무부는 정의부(Department of Justice)로 표기된다. 정의란 개념적으로 영구불변의 가치일지 모르나,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데는 구체적 상황에 의해 제약받는 상대적 가치다. 법이 유념하는 정의는 ‘사회적’ 정의다. 개개인 정의의 총합이 곧바로 사회적 정의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정의론은 중용과 균형을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교환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양분해 전개됐다. 이러한 선구자들에 뒤이어 무수한 사상가가 정의의 본질과 체계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구구하고 다양한 정의론은 모두 ‘법과 사회’를 염두에 두고 전개한 것이다.

동경과 불신의 대상이 된 법률가
법률가에 대한 불신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인 정서다. “좋은 법률가는 나쁜 이웃이다”라는 오래된 영어권 속담이 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좋은 법률가는 나쁜 크리스천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를 ‘구급차 쫄쫄이(ambulance chaser)’라 비하해서 부른다. “그는 법률가였다. 그렇지만 선량한 인간이었다”라는 묘비명이 법률가에게 주는 최대의 찬사라고 한다. 법률가는 “인간의 상처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다”라는 극단적인 표현도 있다. 문학작품 속에서도 법률가는 악과 위선의 화신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법률가 놈들을 모조리 때려죽이는 일이다.” 셰익스피어가 쓴 이 문장은 영미권의 모든 법학도에게 익숙한 경구다. 이는 법이 현존 질서 유지 수단이라는 것, 권력을 동반한다는 것, 사회의 변화에 둔감하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절대선을 지향하는 이들에게는 법률가가 영혼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비친다.
우리의 역사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사적 분쟁은 『삼국유사』에 나타난 탈해의 ‘집터 사기(家舍奪取)’ 사건이다. 이를 요즘 말로 하면 남이 살고 있는 명당 집을 차지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해 승소했다(『삼국유사』 권1, 紀異 脫解王條).

오늘날의 변호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1894~1985년, 갑오-을미개혁의 성과였다. 1894년 법관양성소법이 제정됐고 1905년 변호사법이 제정됨으로써 제도가 완성됐다. 일본이 주도한 내정개혁이었다. 구한말 초기 변호사들 중에는 의병장 허위, 이준, 안중근을 변론했던 안병찬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병주는 소설 『관부연락선』에서 일본 헌법을 공부하는 조선 청년의 의식구조를 비판했다. 일본법에 의한 고등문관시험(고문)과는 별도로 조선에서 활동할 변호사를 선발하는 제도를 실시했고(1922), 변호사의 활동을 보조할 사법대서인 제도를 도입했다(1924). 식민지에서 조선인이 판·검사가 되는 기회는 매우 희소했고 대부분 변호사의 길에 나섰다. 소수의 법률가만이 변호사의 지위를 활용해―제한된 영역에서나마―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나아가 독립운동에 간접적으로 조력했다. 그러나 절대다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신의 영달을 도모할 뿐이었고 ‘의법회’의 탄생과 같은 허망한 에피소드까지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서나 법률가는 가장 비판받는 직업인 동시에 가장 선호되는 직업이기도 하다. 법률가가 대중의 존경과 신망을 얻으려면 법규칙과 법조윤리를 철저하게 준수해야만 한다. 만족스러운 법규는 저절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다. ‘권위’와 그 권위를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 지속적인 대립과 타협을 통해 비로소 정립되는 것이다. 법이 사회질서의 근간이며, 따라서 법조윤리는 법과 사회를 이어주는 ‘체제윤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법관이 되는 것은 정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평했다. 서양에서 오래전부터 법률직은 의료직과 함께 전문직이었다. 의술의 목표가 건강의 증진에 있듯이 법률가의 목표는 정의 실현에 있다. 즉 도덕적인 법조인을 추구하는 법조윤리는 일반인에게 기대되는 보편적 윤리를 초월한 ‘전문윤리’다.

‘법조 삼륜’의 명암
한국사회에서 법률가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시선은 매우 부정적이다. 성적 지상의 엘리트주의, 관존민비의 권위적 체질, 대표적인 사회특권층 등으로 인식된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판사, 검사, 변호사를 아울러 ‘法曹三輪’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 바퀴 달린 수레는 바퀴 셋 모두가 균형을 맞춰야 수레가 유연하게 움직이듯이 판사, 검사, 변호사가 제각기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하면서 상호 협력해야만 법제도의 운용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들 법조인 사이에는 강한 동류의식이 존재하고 외부인은 이들의 동류의식이 지닌 부정적 측면에 더욱 주목한다. 법조삼륜 사이에는 대학과 사법연수원에서 맺어진 특별한 인적 유착관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사건 당사자가 변호인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은 담당 검사나 판사와 ‘이야기가 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전관예우’, ‘사건 브로커’, ‘로비’ 등 한국 법조계 비리의 온상은 인적 연고 앞에 무뎌진 법조인의 직업적 윤리의식에 있다.

법원은 민권의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있다. 법원을 믿지 못하는 나라의 국민은 불행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법원 판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매우 낮다. 특히 과거 정치적 성격이 짙은 사건에서 법원은 정권의 부당한 간섭에 굴복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판결을 통해 구현되는 ‘법적 진실’은 법이 규정한 절차와 원칙의 범위 내에서, 법관의 ‘자유 심증’을 통해 형성된 ‘제한된 진실’이다. 그 제한된 진실의 진위를 다투는 방법도 항소, 재심 등 법이 규정한 절차에 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법관에 대해서는 ‘제한된 진실’의 방패로서 고도의 윤리적 기준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법관의 윤리의식 재고는 국민 감시를 강화하거나 법관 인사제도를 개선해 일부 보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제도적 해결책은 사실상 없다. 그것은 어쩌면 법의 한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검사는 형사사건에서 ‘국가’의 입장을 대변한다. 국가는 특정 정부나 정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형사사건에서 국가의 입장은 곧바로 국민의 입장이다. 그럴수록 검찰의 역할이 중요하다. 검찰은 전통적으로 엄격한 상명하복관계에 선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내부적 위계질서를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을 담당한 개개 검사의 소신과 정의감이 위협받기 십상이다.

변호사는 ‘고용된 총잡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을 고용한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법이 지니는 공공적 성격을 감안하면 일반 상인과는 업무의 본질이 다르다. 변호사는 이익출동회피의무, 비밀유지의무 등 업무에 관한 법령상의 의무에 더하여 품위유지의무 등 직업윤리규정의 적용을 받는다. 우리나라에도 ‘공익변호사’라는 새로운 유형의 변호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공익법 운동’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면서 젊은 법률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공익변호사들은 많은 경우 의뢰인으로부터 수임료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변호사의 의무와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도 사건 수임에 관련된 변호사의 의무와 윤리적 책임을 진다.

개인의 자율성·민주사회의 근본가치 지향해야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사회에는 ‘법의 일상화’ 현상이 가속됐다. 소송은 폭증했고 1994년 800여 명에 불과했던 변호사 수가 2만 명(2015년 말 기준)으로 늘어났다. 2017년 폐지될 사법시험과는 별도로 매년 1천500명의 법학대학원 졸업생이 변호사시험에 합격한다. 이들 중 소수만이 판·검사가 된다.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변호사가 거의 없던 30년 전과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대중의 관심이 판·검사로부터 변호사에게 이동한 것이다. 소송을 통한 구제보다 소송의 예방과 대안적 분쟁 해결 방법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법률가가 되는 진입장벽은 여전히 높다.
법률가는 인기 직종이다. 법조윤리도 자유와 평등,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가치의 다원성을 존중하며, 갈등의 평화적 해결과 같은 민주사회의 근본가치에 바탕을 둬야 한다. 사회질서의 중추로서의 법조윤리는 열린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동시에 그 적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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