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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 등 해외 한국학 출판 시장 일찍부터 개척
“책의 가치는 학계가 평가하는 것”
美·日 등 해외 한국학 출판 시장 일찍부터 개척
“책의 가치는 학계가 평가하는 것”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5.31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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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전문출판 다져온 경인문화사 한정희 대표

출판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어요. 그런데 우수학술도서 지원사업 같은 걸 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우수학술서’는 없고, ‘대중서’만
보이거든요.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학 위상 정말 높아졌다는 걸 느껴요.
하지만 1차 자료가 답보하면서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도 줄고 있는 거 같아요.

“유구한 역사와 문화는 선조들의 노력에 의해 활자로 남아 현재까지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선조들의 유산은 현대인들에게 읽히게 됨으로써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경인문화사는 한국학이 대중의 삶과 동떨어져 소수 전문가들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활발한 소통을 통해 보급되고 실용화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서울 마포에 있던 경인문화사(대표 한정희, 52세)가 파주 신사옥으로 옮겨가 입주식을 연 것은 올 2월 26일이었다. 뒤늦게 파주 출판단지에 정착했다. 지난 25일(수) 오후 70퍼센트 가량 내부 정리를 마친 경인문화사를 찾았다. 1층의 한국학전문서점도 곧 오픈할 예정이어서 내부 정리가 막바지 단계에 와 있었다.

한국 출판 역사에 눈이 밝은 독자들이라면, 경인문화사와 비슷한 시기 출판업에 뛰어들었던 출판사들의 경영 구도가 2세 경영으로 정착됐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2세 출판문화사업자들이 대개 부친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경인문화사의 한정희 대표는 이런 범주에 넣기가 조금 애매한 케이스다.

“중3 때까지는 정말 잘 살았어요. 그 뒤로는 그렇지 않아요. 정말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어디에도 ‘어두운 흔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는 억척스러운 분투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내로라하는 ‘한국학 출판사’로 대접받고 있는 경인문화사는 사실 단행본 출판보다 ‘한국학 문집류’ 영인출판으로 내공을 다진 곳이다. 단행본 출판은 2002년부터 박차를 가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신생 출판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 출판사 가운데 ‘문화사’라는 이름을 고집한 곳이 몇 있다. 을유문화사, 아세아문화사가 그렇다. 출판을 문화사업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1세대 창립자의 의지가 고스란히 읽히는 대목이다. 경인문화사도 그렇다. 여기엔 한씨 집안의 어떤 DNA가 작용하는 것 같다. 한 대표의 부친인 한상화 옹(84세)은 원래 황해도 재령 사람으로 홀로 월남해 자수성가했다. 한 옹의 조부는 황해도 재령군에 위치한 ‘景賢書院’(주희와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액서원) 최후의 儒士로 서원을 지켰다. 한정희 대표가 설명하는 ‘景仁文化史’의 ‘경인’이란 이름의 유래는 여기서 온다. 바로 이 ‘경현’ 서원의 ‘景’과 한옹의 조부 가운데 이름 ‘仁’에서 따온 것이다. 한 대표의 증조부가 유사로서 경현서원을 지켰다면, 어수선한 시절 직업군인(해병대 상사로 전역)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한 그의 부친은 청계천에서 ‘경인서점’이란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서서히 출판에 눈을 떴다. ‘경현서원’의 유사라는 핏줄 탓인지, 한상화 옹은 ‘우리의 책’에 뜻을 뒀다. 당시 ‘민추’(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번역서를 떼다가 판매하는 영업을 했다.

잘 알려져 있듯, 경인문화사는 『매일신보』, 『여유당전서』 등의 한국학 기본자료 간행과 함께 선현들의 문집을 총정리한 『한국역대문집총서』 3천책을 간행했다. 『한국역대문집총서』는 주요 선현 3천500명의 문집을 집대성한 것으로 한국문화 콘텐츠의 보고라는 평을 받고 있다. 경인문화사가 오늘날 경인한국학연구총서, 경인한일관계연구총서, 고려사학회연구총서 등 수많은 학술 전문서적을 간행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학 관련 자료의 영인 작업이 깔려있다.

영인본 출판의 효시 … 부친과 전국 누벼

“한국학 출판을 하게 된 것은 아버님의 소신이었죠. 당시 좋은 자료가 별로 없고, 인쇄술도 좋지 않아서, 다양한 전공 분야 연구자들이 책을 요청했어요. 학자들에게 책을 제공하는 걸 본업으로 생각하셨던 거죠. 영인본은 저희 경인문화사가 시초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신구대학 출판학과 83학번인 한정희 대표가 부친과 함께 출판사업을 시작할 무렵의 경인문화사는 거의 빈털터리와 다름없는 상태였다. 1985년 1월 경리 여직원 한 명을 두고, 막 취득한 운전면허증으로 전국을 뛰다시피 누벼야 했다. 그가 경인문화사에 첫발을 디딘 모습은 남들처럼 그렇게 ‘눈부신’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경인은 민음사, 범우사 등과 함께 신수동 출판단지에 입주(임대)해 있었는데, 한 대표는 여기서 3~4년간 판매-수금 일을 반복했다.

영인본 문집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던 그는 1980년대 중반 어느날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차피 1만원짜리 책을 팔든, 100만원짜리 책을 팔든 수금하려면 지방에서 먹고 자야하는데, 이왕이면 덩치를 키우는 게 어떻겠냐는 생각이었다. 이 아이디어가 바탕이 돼 경인문화사는 『매일신보』(1989) 등의 세트 출간에 주력하게 됐다.

1988년부터 문집 세트를 영인해서 학계에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이 조금 재미있다. 경인문화사는 대학도서관의 한적실을 주로 이용했는데, 기본적으로 한적류는 대출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이 한적실에 복사기를 들고 들어가서가 종일 복사기를 돌리는 방식으로 영인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한 대표의 생각에 또 한 번 변화가 찾아왔다. 국내 시장이 아닌 일본 출판 시장을 떠올린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한 대표는 서울역에서 신칸센 10일치 표를 구매해서 일본에 진출했다. 예상외의 반응이 이어졌다. ‘한국학전문서점’을 교토에 낸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98년 한 대표는 일본의 경험을 바탕으로 드디어 북미 출판 시장에도 진출했다.

한 대표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가 출판업에 뛰어든 것은 자의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이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도 직후 겨우 명맥만 잇던 가업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 자신 ‘출판학’을 공부했기에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리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 대표는 기획보다는 ‘영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일본, 미국, 중국 시장 진출 등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아버님께선 학자들에게 1차 자료를 영인해 연구할 수 있게끔 제공하는 데 보람을 가지셨어요. 한국학전문 출판사로서 경인문화사의 자긍심이라면 바로 이것입니다. 고서 등의 한적은 잘 빌려주지 않잖아요. 아버님은 어떤 사명감 같은 걸 갖고 계신 거 같아요. 서울 등 중앙에 집중된 자료를 영인해 다양한 연구자들이 좀더 편리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애쓰셨거든요.”

그런 한 대표에게도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게 있었다. 그것은 경인의 1차 자료를 보고 연구한 학자들이 연구 결과물인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1차 자료를 보고 연구했다면, 연구 결과물인 책도 경인에서 내는 게 모양새가 맞잖아요. 그때까지 저희는 주로 ‘영인’ 작업에 집중해왔어요. 물론 단행본 출판은 또 다른 전략이 필요한 일이지만, 경인의 1차 자료를 바탕으로 단행본 성과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컸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대표는 2002년 경인학술총서를 내놓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의 단군전승과 인식』(김성환), 『대한제국기 야학운동』(김형목), 『박은식과 신채호 사상의 비교』(배용일) 등 ‘경인학술총서’의 우람한 모습이 갖춰졌다. 이 총서는 현재 『일제하 한국기독교와 미션스쿨』(박혜진) 등 129권 째까지 이어졌다. 『매일신보』 등의 영인 1차 자료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작업이다.

지금 경인문화사는 자회사로 한국학 대중화를 표방한 역사인과 불교문화 전문인 양사재를 두고 있다. 둘 다 ‘역사 대중화’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한국학 도서의 해외시장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한 ‘한국학전문서점’도 흥미롭다. 50여 개 출판사에서 간행한 약 1만여 권의 책을 전시·보급하고 있으며, 미국·일본·중국 및 유럽 등지에 수출하고 있다. 자회사인 ‘역사인’의 인적 네트워크는 조금 독특하다. 3년 전, 후학들을 키워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모임이다. 5명 정도가 모여서 발표하고 토론하고 저녁을 먹는다. 한 대표가 경비 일체를 댄다. 회비도 없고, 서로 좋은 연구자를 추천해 함께 모여 격의 없이 발표 토론하는 모임으로 이어져서 지금은 25명 정도의 연구자들이 매달 모이고 있다.

한국학 위상 실감 … 정부 기관들 출판 재고 필요

한국학 출판 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탓인지 한 대표는 특히 한국학 출판 관련 정책에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를테면 정부 기관에서는 한국학 관련 출판 사업 대신 ‘보고서’ 채택 정도로 역할을 제한했으면 한다. “경인에서 출판하라는 게 아니에요. 요즘 대학 교수들은 다양한 정부 기관, 소속 대학 등에서 환대받고 있습니다. 일반 출판사들은 이런 기관들과 출판 경쟁을 할 수 없어요. 연구 보고서만 내고, 민간에서 책으로 제대로 만들어낸다면 어떨까요? 민간 출판사들이 좋은 책을 더 만들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정책이 필요해요. 출판시장에 정부가 개입하지 말라는 거죠.”

그는 또 학술원의 최근 행보에 대해서도 불편해했다. “학술원에서 최근 박사논문을 책으로 내는 걸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심사에서 배제한다고 발표했어요. 박사논문은 젊은 연구자들의 내공이 깃든 건데, 이를 책으로 만든 걸 심사에서 제외하면, 도대체 저희 같은 출판사는 어디서 책을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이는 최근 심화되고 있는 출판위기를 의식한 발언일 수 있다. 그는 정부 등에서 민간 출판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지적했다. 

한 대표는 학자들이 요즘 학술대회장에서 PPT 파일로 발표하는 것도 조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종이로 인쇄해 들여다보면 해당 분야의 연구추세나 경향을 엿보기 쉬운데, PPT로 발표하다보니 데이터나 자료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학회가 지나치게 세분화되면서 학문생태계의 담론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잡아내기 어려운 실정을 꼬집은 셈이다.

“출판 시장 위기요? 위기죠. 그나마 저희는 아버님 대에 만든 영인 자료가 해외에서 어느 정도 수익을 낳고 있는데, 글쎄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1인 출판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고요. 저희로서는 지금 최대 시장은 중국입니다. 100개大 육성, 50개大 육성 이렇게 정책 추진하고 있는데, 한국 관련 책들 요청이 늘고 있어요. 중국에서 번 돈으로 한국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죠. 지금 학술서 시장은 너무 위축돼 있어요.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경인에서 『경인한일관계연구총서』 전체 100권을 기획, 현재 62권까지 출간했다. 1차 자료를 학계에 공급하면서 ‘한국학전문출판’의 길을 달려온 경인문화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 대표는 이념에 의거해서 책의 출판 여부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책의 가치는 학계가 평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1차 자료를 학계에 공급하면서 잔뼈가 굵은 한 대표다운 말이다. 그의 꿈은 ‘사회적 출판 기업’이다.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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