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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출판사 글항아리의 ‘저자만들기’ 실험
학술출판사 글항아리의 ‘저자만들기’ 실험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5.31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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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리뷰 사이트(www.bookpot.net)를 아세요?
▲ 리뷰아카이브의 메인 홈페이지. 출판사의 저자 찾기 실험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이야기 건너편에 이런 소식도 들려온다. 교보문고가 광화문 매장에서만 수억원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이야기다. 지금 출판이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다. 누군가는 출판은 늘 위기였다고, 너무 호들갑떨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읽기 자체가 문제가 된 시대라면 책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수 있다. 그런데 한강의 경우를 보면, 읽기 자체가 문제인 것 같지는 않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 여기엔 좋은 저자를 발굴하는 일도 포함된다. 좋은 저자를 발굴하고, 이들을 지원해서 더 큰 저자로 만드는 일은 출판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하다.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이런 방식은 어떨까.
문학동네 자회사인 글항아리(대표 강성민)는 요즘 잘나가는 출판사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중국학을 중심으로 인문 학술 교양에 강점을 보이는 곳이다. 아직은 규모가 작다. 그렇다보니 무늬만 ‘사장’인 강 대표가 대구도 가고, 중국 칭다오도 직접 뛴다. 그런데 글항아리가 재미난 아이디어를 냈다. 논문 리뷰 사이트를 만든 것이다. 올 3월에 사이트를 열었다. ‘리뷰 아카이브’란 이름을 내걸었다(www.bookpot.net).

형식을 보면 책 리뷰 사이트로 혼동할 수도 있지만, 인문/역사, 문학/예술, 정치/사회. 경제/경영, 과학/공학, 기타 부문으로 다양한 이슈와 관련된 논문들을 리뷰한다. 대담한 발상이고 접근이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문학/예술 부문을 클릭해 들어가면, 5월 27일 현재, 톱 기사에는 이태준 연구에 관한 리뷰가 배치돼 있다.
“남북의 이념 갈등을 떠나 역사적 인물의 전체 생애를 그리는 작업은 연구자들의 중요한 과제다. 이러한 소명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박태일 경남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재북 시기 리태준의 문필 활동 실증」(<외국 문학 연구>, 제 61호, 2016. 2.)에서 월북 이후 이태준의 작품 활동과 움직임에 대해 살펴보고자 했다. 이미 알려진 작품 몇 편에 대한 문헌지를 새로 보충하고, 새로 발굴한 22편을 통해 재북 시기 이태준의 삶과 문학 연구의 외연을 넓히려고 했다. 여기서는 주로 후자의 연구 성과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려고 한다.”(박귀일 리뷰어, 「소설가 이태준, 정치선전가 리태준으로 거듭나다: 박태일 교수의 재북 시기 리태준 돌아보기」, http://www.bookpot.net/news/articleView.html?idxno=749)

이렇게 동향, 이슈 등과 연결해 구체적 연구자의 논문을 찾아 이를 꼼꼼하게 읽어내는 방식이 이 사이트의 특징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논문의 사회적 활용도를 높이고, 이를 통해 인문학 담론을 활성화한다는 공익적 방향에서 리뷰 아카이브를 구상했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편집진의 저자 및 콘텐츠 장악력 훈련을 통한 자생적 기획 확대, 온라인 지식 콘텐츠의 다양한 생산방식 실험, 기존 책 홍보매체의 영향력 감소에 따른 자체 홍보채널의 구축 등 사적 측면도 포함된다.
현재 리뷰어로 참여하고 이들은 대부분 전현직 출판 편집자들이다. 논문이란 게 학문공동체의 언어다보니 자칫 ‘전문 학술 영역’으로 내재화될 수 있기 때문에, 일단은 출판 편집자의 시각에서 ‘책’과 연계될 수 있는 자양분을 걸러내는 독해가 필요한데, 이들 출판 편집자들이 현재로서는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논문 리뷰’의 한계가 될 수도 있다.

논문 리뷰를 통해 구체적인 책의 탄생에 이른 사례는 아직 없지만, 머지않아 결과를 볼 수 있을 듯하다. 강 대표는 “6월부터는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 연구자를 심층 인터뷰하는 시리즈를 진행할 계획이다. 왜, 어떻게 연구를 진행했는지를 물으면서 다양한 경험을 끄집어내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는 200자 원고지 300매 이상으로 잡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들의 접근 방식이다. 예컨대 어떤 사회적 이슈가 제기되면, 이와 관련된 국내외 논문을 검색, 정리한다. 특히 해외 논문을 찾아 이슈를 입체적으로 보완해서 문고판 사이즈로 시장에 결과물(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출판사를 노크하는 저자, 원고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는 저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자 만들기’를 직접 하겠다는 구상이다.

글항아리는 이 논문 리뷰 사이트 운영에 월 500만원 정도 비용을 털어넣고 있다. 지금으로선 회수되지 않는 매몰비용이지만, 장기적 안목에서 투자하고 있다. 강 대표는 “1년 이후부터는 책 광고 등을 유치하면서, 단행본 출간으로 지출과 수익 비율을 맞춰 나갈 계획이다. 아주 장기적으로는 1년 이상 지난 리뷰들을 저렴하게 유료회원제로 운용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주변에선 이런 시도를 일단 좋게 보고 있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격려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미흡한 단계임에는 틀림없다. 리뷰의 지속성과 분과별 종다양성을 확보해야 하고, 연구자의 연구 입장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연구자들이 놓친 부분까지 짚어주는 비평적 소통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강 대표는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해낼 때, 폭발적인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문이나 연구는 결국 고독한 작업이며, 존재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므로, 성실한 관심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리뷰 아카이브. 아직 생소한 이름이지만, ‘책’ 이전의 논문이란 일차적 학술지평을 읽어내고, 여기서 어떤 새로운 분화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작업은, 비록 출판사가 사적 목적에서 시도한 일이긴 하지만, 한국의 학문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공익적 측면이 분명 존재하는 시도다. 글항아리의 ‘논문 리뷰’ 사이트가 출판뿐 만아니라 학술담론 생산과 학문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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