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1:30 (금)
기록적인 최장기 연구프로젝트의 추억 … 안타까운 한 인재를 떠올리며
기록적인 최장기 연구프로젝트의 추억 … 안타까운 한 인재를 떠올리며
  • 이성진 서울대 명예교수 ·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승인 2016.05.30 14: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5.연구의 낙수(3)

한국행동과학연구소(KIRBS)가 진행한 여러 연구프로젝트 가운데 교육관련 연구는 단연 많은 주목을 끌었다. 학교교육의 전국적 평가연구, 학습부진아를 위한 학습기능 개발연구, 독서행동에 관한 연구, 영재아 교육연구 등이 그렇다. 이렇게 다양한 교육연구 스펙트럼 중 KIRBS의 관심은 교육의 過程과 관련되는 인간요인을 찾으려는 데 있었다.
 
교육은 흔히 인간이 인간에게 작용해 인간의 행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계획적 과정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행동과학적 연구접근은 교육의 과정과 잘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교육연구의 행동과학적 접근이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핵심적 영역은 교사와 학생간의 상호작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교수-학습의 과정이다.

KIRBS가 출생한 1960년대 말의 한국의 학교 교실에는 긴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 때까지 문제됐던 ‘입시지옥’이라는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 1968년에 전격적으로 중학교 무시험 제도를 시행했다. 그 결과 중학교 입학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다인수 과밀 학급이 새로운 문제로 등장했다.

둘째, 이런 다인수 교실에서는 학습능력 면에서 개인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을 놓고 일방적 주입식 위주의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학습에 실패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절실한 개별적 지도를 할 여력이 없었다.

셋째, 학생들의 학습실패는 시간이 갈수록 그 실패가 누적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누적적 학습실패는 학생들의 학습동기에 심각한 부작용을 안겨주게 됐다.

넷째, 종래의 학업성취도 상대평가 방식은 ‘수우미양가’ 평가였다. 이것이 교사로 하여금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학업성취 우수자가 있으면 실패자도 있게 마려인 것으로 기대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평가해야 하는 것처럼 ‘기대하게’ 했다.

입시지옥을 벗어났더니 거기에 콩나물 교실이 기다리고 있었고 학습실패의 폐해라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 셈이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교수-학습체제의 획기적 개선 밖에 도리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전전긍긍하던 때 김호권 선생이 ‘학급 안의 약 95% 이상의 학생들이 주어진 학습과제의 90% 이상을 완전히 학습해낼 수 있다’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그것이 완전학습이론이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교수-학습 실제를 고칠 수 있는 주체적 방안을 담은 이론이었다.

KIRBS는 당시의 중학교 교육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유력한 단서를 바로 이 ‘완전학습이론’에서 찾고자 했다. KIRBS는 1969년 5월에 완전학습 연구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김호권 선생이 전개한 완전학습이론의 근간인 캐롤(J.B.Carroll)의 학교학습 모형의 핵심은 학생들의 학습성취도의 개인차를 학습에 필요한 시간과 학습에 사용한 시간의 비율로 설명한다. 주어진 학습과제를 어떤 기준점까지 학습하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데, 학습자가 그 필요한 시간만큼 사용(학습)하면 완전한 학습의 기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KIRBS는 완전학습의 원리가 우리나라의 다인수 학급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고 교수-학습체제에 관한 연구와 보급에 착수한 것이다. KIRBS의 완전학습 프로젝트는 두 번의 시범연구와 학교와의 긴 협의 끝에 1971년에 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우리나라 전체 중학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학교가 이 수업체제를 채택했다. 이처럼 대규모로 실시한 완전학습 프로젝트가 끝난 것은 1976년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교육사상 최장 기록을 수립한 교수-학습연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완전학습 교수-학습전략이 학교에서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는 말처럼 간단히 평가할 수 없다. 이론대로 학습자의 95%가 적어도 80%의 학습성과를 올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시작했는데, 현실에선 과연 그런 약속된 성과를 올렸는가?

1970년과 1972년에 완전학습 전략이 전국에서 대규모로 보급돼 나갈 때의 평가연구에 의하면 실험집단(완전학습집단)이 통제집단보다 훨씬 높은 완전학습 기준 도달률을 보였다. 그런데 실제 완전학습 교수-학습 방책이 투입된 경우에도 완전학습 기준 도달률은 50% 전후에 머물고 있었다. 이론은 90%를 약속했고, 현실은 80%를 희망했지만, 실제 도달률은 50% 전후였다는 것,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완전학습 프로젝트가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이 연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라기보다는 ‘신경을 쓸 수 없었다’고 하는 게 적확할 것 같다. 1974년부터 소장을 맡았던 나는 국제기구와 관련된 가족계획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프로젝트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완전학습 연구는 김호권 선생이 기초를 든든히 닦아 놓았고, 정범모 회장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완전학습 프로젝트에 대해 덧붙일 말은 별로 없다. 다만 완전학습 프로젝트도 연구소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소장으로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어 내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완전학습 전략의 핵심은 ‘형성평가 → 교정 지도 → 확인을 위한 형성평가의 재실시’ 3단계다. 그러나 교실에서는 이 3단계의 활동이 소홀히 수행됐을 개연성이 높았다. 교사의 일방적인 일제 수업, 중간고사, 학기말고사, 성적표 제출로 끝나는 관행에 익숙해져 있던 많은 교사들에게 형성평가나 교정지도 등은 번거로운 데다 수업시간의 낭비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형성평가를 다시 하는 세 번째 단계는 완전학습 전략의 핵심적 절차로, 이것이 빠지면 해당 수업의 효과를 저하시키는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것이 거의 안 되고 있었다.

둘째로, 완전학습의 도달률로 정한 80%보다 실제 도달률이 상당히 낮게 50% 정도로 나온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이론적인 90%는 이론이니까 하고 넘겨버리면 그만이지만 80%로 정한 근거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중학생들이 초등학교 때 어느 정도의 누적된 학습결손을 안은 채 중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 아닐까 은연중에 가정했다고 생각한다. 학습결손의 누적은 이렇게 심각한 것이다.

나는 KIRBS의 완전학습 프로젝트가 그 이론이 주장하는 만큼의 도달률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학교교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육 전반의 문제와 관련돼 있다고 생각한다. 1976년에 완전학습 프로젝트가 막을 내렸지만 그 공헌이 적지 않았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완전학습이론이 선언한 90%라는 매직넘버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 교수-학습 체제에 참여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훨씬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론은 이론이고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참여 학생들의 긍정적 호응도 눈여겨봐야 한다. 재미있었다, 성적이 오른 것 같다, 수학 공부에 자신감이 생겼다, 다른 과목의 학습도 잘 할 것 같다고 학생들은 반응했다.

둘째, 연구자와 학교가 서로 협조해 흔히 연구자-학교 간의 불협화음과 심리적 괴리를 좁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학교가 교과목 수 확대를 요청해 왔고, 우리 연구소가 지닌 자료에 대한 요구도 쇄도했다. 문교부도 KIRBS의 보충학습자료를 인정했고 완전학습 전략이 우리나라 교실수업의 개선 가능성을 보였다고 평했다는 후문이다.

셋째, KIRBS의 학습개발부 연구팀의 열성적 연구활동은 그들의 연구역량을 크게 향상하는 소중한 체험이 됐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바쁜 연구소 업무 중에도 틈틈이 연구 아이디어를 만들고 완전학습과 관련된 논문을 써냈다는 사실이다. 이 논문들은 연구소 공식 출판물인 행동과학 ‘리서치 블레틴’과 ‘리서치 노트’를 통해 출간됐는데, 모두 40여 편이나 된다. 나는 이 출판활동이 완전학습 본 연구 못지않은 연구역량의 발휘이며 연구자질의 교육경험이라고 자부한다. 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당시의 연구원들은 거의 모두 대학교수로서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내가 헤아릴 수 있는 당시 16명의 연구원들은 모두가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학과 대학 외의 학계에서 중추적 인물로 활동했다.

특히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현장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교사 세미나를 능란한 솜씨로 주관한 홍기형 박사(당시에는 부소장, 뒷날엔 두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와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운영에 들어갔을 때 학습개발부장으로서 연구팀을 일사분란하게 장악해 연구를 순조롭게 이끈 권균 박사(현 한림대 명예교수)의 활동이 돋보였다.

완전학습 연구 프로젝트는 그것이 1971년에 학교에서 실행되기 훨씬 전에 그 기본 계획이 수립돼 있었고, 1976년에 끝날 때까지 한국교육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프로젝트가 끝난 지 수 십년이 경과했지만 40여 년 전을 되돌아보면서 몇 가지 소회를 적을까 한다.

1976년에 프로젝트가 종결됐지만 한국 교육학계에서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R&D 종합보고서한 편도 내지 않았다는 점이 서운하다. 그 당시의 핵심 연구원들이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대부분 다른 연구기관으로, 유학으로, 대학교수로 KIRBS를 떠난 것이 한 이유이긴 하지만 그래도 논문을 집필하도록 부탁했을 수 있는 일인데 이에 소홀히 했다.

다음으로 후속 연구가 뒤따르지 않았다. 물론 다른 데로 널리 분화·발전·흡수되는 것이 학술적 이론의 운명이긴 하지만 KIRBS로서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완전학습이론이 더 성장 할 수 있도록 씨앗[成長芽]을 남겨서 키우지 못한 것은 종내 아쉬운 대목이다.

그리고 1976년에 프로젝트가 불시에 끝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KIRBS의 완전학습 프로젝트가 교수-학습이론의 한 기억될만한 이노베이션이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완전학습에 관해 회고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분을 소개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김순택 선생이다. 이미 고인이 된 그는 1969년에서 1972년까지 KIRBS의 학습개발부 부장을 맡아 완전학습 연구를 진두지휘하며 연구 초석을 다졌던 분이다.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성균관대에 잠시 있다가 서울대로 옮겨 교수를 역임했다. 정부의 교육관계 일도 많이 했던, 보기 드문 인재였다. 1983년 8월 20일부터 미국 콜럼비아대가 주관한 국제학력평가를 위한 연구협의회에 참석 후 귀국 길에 올랐다가 9월 1일 소련의 만행으로 꽃다운 39세를 一期로 순직했다. 자기가 우리 주변에서 제일 먼저 자가용 포니를 가졌다고 밝게 웃으면서 “그 차 좀 태워줘” 하면 언제든지 가깝다 멀다하지 않고 태워주던 그다. 아까운 분을 일찍 잃은 우리는 아직도 슬프다. 그가 보고 싶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