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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부진아 위해 개발한 프로그램에서 가능성 발견 … “학습동기는 에너지다”
학습부진아 위해 개발한 프로그램에서 가능성 발견 … “학습동기는 에너지다”
  • 교수신문
  • 승인 2016.05.1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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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한국행동과학연구소 40년을 말하다_ 6.연구의 낙수(4)

1969년에 중학교 무시험 입학전형제도가 시행됐을 때다. 다인수 학급 신입생 중에는 학습결손이 심해 정상적인 학습 진전을 기대할 수 없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기초 학습내용을 습득케 하고 학습하는 요령과 방법 등의 기능을 길러주자고 마음먹고 KIRBS는 당시의 우리 현실에 맞는 효과적인 전략을 구안하기 위해 학습기능개발 연구에 착수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학습부진아는 知的으로 기초학력이 부족하고, 애초에 학습 습관이나 요령 같은 학습 전략이 없는 학생을 말한다. 또 情意的으로는 학습동기가 낮고 자아개념이 부정적이며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부족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며 사회적 부적응을 보인다고 규정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관련 서적을 들춰 보면 학습부진아는 대개 어릴 때의 성장환경이 좋지 않았다고 말한다. 부모의 관심이 절대적인 성장기에 어쩔 수 없는 ‘강제된’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해 아이의 성장발달에 필요한 영양소가 되는 문화적·교육적 자극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아이에게 신경 쓸 시간이나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몇 년 동안 성공과 실패에 대한 생각 없이 그냥 신나게 놀다가 학교에 입학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실패보다 성공경험을 많이 하지만 그중에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학습에 실패하곤 하는 학생도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성격의 문제, 친구와의 갈등, 건강과 신체적 결함 등의 문제로 자신의 지적능력 수준(IQ)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학생들이 나타난다. 이들이 학습부진아다.

공부는 하기 싫어지고 학습 성과는 오르지 않는다. 밖에서 오는 압박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고, 내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학습 동기가 약하거나 없어서 공부를 하려고 해도 하기 싫어진다. 이러한 학습실패의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고 쌓여 급기야 학습 낙오자가 되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학습에 대한 동기는 고갈되고 만다. 다시 학습실패와 학습동기 저하가 맞물려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래서 결국 학습부진아가 된다.
사전이 규정한 학습부진아의 특징은 知와 情意를 별개의 범주로 규정하는 것 같은데, 사실 知와 情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교호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관계의 맥락을 유지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학습에 실패하면 학습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하게 되고, 그것이 원인이 돼 다음에 이어지는 학습에 또 실패하게 된다.
이 이슈는 간단하지 않다. 학습기능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상할 때, 우리들 역시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학습부진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프로그램 내용의 성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토론 과정에서 학습동기의 개념이 불거지면서 학습부진 현상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학습부진 현상이란 게 知的 과제에 실패한 데서 오는 동기저하가 원인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습동기가 부족해서 학습실패를 초래했느냐가 논점이었다. 다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 관심이 있었던 우리는 학습동기가 아동의 초기 성장환경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보고, 동기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학습과정에서의 동기 문제는 상당히 광범하고 복잡한 이론적 전개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개입할 계제가 아니었다). 결국 프로그램도 이 원칙에 따라 개발했다.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를 재미있게 하게 하면 되지”라는 심정으로 동기를 앞세웠던 것이다. 우리가 운영한 프로그램은 실제로 언어(국어)와 수리를 핵심 주지과목으로 취급했지만 프로그램 운영의 요체는 학습동기였다. 이렇게 知와 情의 상호작용을 이론적 대전제로 하여 KIRBS의 학습부진아 학습기능 프로젝트가 發進하게 된 것이다.

연구계획에 따라 학습기능개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예비실험연구를 위해 중학교 한 곳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생각처럼 순탄치는 않았다. 우리 프로그램에는 참가학습, 견학 또는 개인상담 등 학교의 통상적 스케줄을 벗어나는 활동이 포함돼 있었는데, 학교 측에서 담당교사의 부담이 추가된다며 실험 협조에 난색을 표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 학습기능개발 프로젝트가 당시 전도유망하게 착수한 완전학습 프로젝트와 자매 관계에 있는 연구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간곡히 설득, 실험연구를 하게 됐다.
우리의 학습기능개발 프로그램은 우선 도구과목인 언어(국어)와 수리력(수학)의 기초지식과 기능을 터득하게 하는 것으로 프로그래밍 했다. 이외 모든 하위 구성 프로그램의 대원칙은 프로그램 제작과 학습자 지도를 꿰뚫는 상호 관련된 아홉 가지 규칙으로 구성했다. 참고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학습목표의 명확한 제시를 시작으로 ②주어진 과제의 충분한 학습, ③학습성과의 평가, ④필요에 따른 개별지도, ⑤각종 하위 프로그램의 참가학습 등을 위시해 ⑥성취행동에 대한 정적강화(positive reinforcement), ⑦학습목표로의 점진적 접근, ⑧학습자에 대한 처벌이 아닌 긍정적 피드백, ⑨학습자의 장점 인정 등이다. 이 시행규칙들(⑥~⑨)은 행동수정이론의 몇 가지 유용한 원리들이기도 하다. 행동수정의 원리와 기법이 한국에서 1970년에 처음으로 학습개발 프로그램에 시도된 것인데, 상당히 이채로웠다. 우리 프로그램에 응용된 행동수정 원리를 간단히 소개한다.

행동수정이론은 결손행동을 정교한 방법으로 학습시키는 한 묶음의 기법이다. 하버드대 스키너(B.F. Skinner) 교수의 학습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이 이론의 핵심인 강화 법칙은 동기이론이다. 학습부진아의 학습기능 습득에 효과 있게 응용할 수 있는 기법의 이론을 내발적·외발적 동기 개념에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학습부진아의 학습동기가 낮다든가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내발적 동기를 전제하는 접근이다. 내발적 동기를 전제한다면 내발적 동기가 행동의 학습에 직접 작용하게 해야 하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단 외발적 동기를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여 그 행동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학습기능개발 프로그램에 활용한 동기화 방법은 외발적 동기유발에서 시작한다.
첫째, 학습부진아의 경우 행동유발은 외발적 동기화가 효과적이다. 교과학습에 대한 관심과 동기가 비교적 약한 학습부진아에게 처음부터 내발적 동기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점진접근의 방법은 말 그대로 점진적으로 목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접근 단계마다 그때까지 학습한 행동을 고착시켜야 그 행동의 소거와 망각을 방지할 수 있다. 쉬운 것부터 어려운 최종목표로 전진한다는 원리와 비슷하다. 셋째, 정적강화는 행동수정이론의 핵심이 되는 법칙이다. 인간의 행동은 정적강화에 의해 습득된다는 법칙이다. 흔히 긍정적 피드백이라고도 한다. 넷째, 처벌은 행동을 제거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행동 학습에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처벌은 행동 학습의 방법이 아니다. 벌은 벌 받은 사람으로부터 부정적 정서반응을 유발하기도 한다.
KIRBS 학습기능개발 프로젝트의 예비실험연구는 1970년 초 서울 시내의 한 중학교 1학년 학생 가운데 학습부진아로 판정된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90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투입된 실험 프로그램은 언어, 수학, 성취동기, 문화경험, 개인상담 등이었다. 사전·사후검사의 결과 이 프로그램이 학생들의 학습력, 독서력 등의 기초적인 지적 기능과 학습에 대한 적극성 등 정의적 특성에서 상당한 향상을 보여 그 효능을 입증했다.

이 실험연구의 결과에 힘입어 1971년에는 좀 더 다양한 하위 프로그램으로 확대돼 실험 실시 시간도 늘어났고, 참여 학교와 학생 수도 크게 증가했다. 특히 1972년부터 1년간 실시한 현장연구는 이 프로그램이 학습기능 육성에 구체적인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확신을 더 많이 갖게 만들었다. 특히 참여 학생들이 보여준 학습에 대한 자신감과 자아개념의 긍정화, 그 밖의 정의적 특성 육성은 학습부진아를 위한 우리 프로그램의 가능성과 효험성을 한층 더 분명하게 보여줬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열정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프로젝트의 계획단계부터 열성적으로 참여한 김형립 팀장(서강대 명예교수)은 KIRBS의 학습부진아 지도프로그램에 참여한 중학교 교장들을 대상으로 의견조사를 실시했다. 김 팀장은 프로젝트 초기에는 긴가민가하던 학교들이 실시 후에는 완전히 호의적으로 변해 대부분의 학교장이 학습부진아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특히 학습부진아가 정규수업에서 학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교장들의 소견은 주목할 만하다. 여담이지만 그 당시 미국에서도 학습부진아의 정상학급 수업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때였다. 사후 교장회의에서는 보충수업시간에 학생들의 개인적 필요에 맞는 특수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도 제안했다.
연구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허작 연구원(서원대 명예교수) 역시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허 연구원은 학습부진아들이 형식적 언어능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일상적인 비형식적 언어능력은 정상적이며, 또한 단기 암기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장기 암기력은 정상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다른 영역으로 전이되는 효과도 보인 것이다.
학습기능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프로그램이 학습부진아를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새삼스럽지만 정의적 교육의 중요성도 부각시켜줬다. 공식적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후 우리 프로그램은 그대로 또는 약간 변형된 형태로 많은 중학교에 도입돼 자체적으로 실시됐다고 한다. 최소한 우리나라 학습부진아 교육에 밝은 전망을 제공했다고 자부한다.

학습부진아 교육에서 학습기능 습득과 학습동기의 관계는 밀접하고 중요하다. 이 관계를 축음기를 비유하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어릴 때 봤던 축음기 이야기다. 축음기 옆구리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그 구멍에 지렛대를 꽂고 태엽을 감는다. 그것을 밥 준다고 한다. 밥을 적당히 준 뒤에 레코드판을 올려놓고 그 위에 사운드박스를 살며시 얹어놓으면 레코드판이 돌아가면서 판 안에 들어있는 음악이 나온다. 한참 시간이 지나면 태엽이 풀려서 음악의 박자가 느려진다. 음악이 끊길 새라 밥을 더 주면 음악은 다시 제소리로 돌아온다. 밥을 너무 많이 주면 태엽이 끊어질 수 있고 잘못하면 고장이 날 수도 있다.

이 축음기를 인간에 비유해본다. 인간으로 치면 레코드판에 들어있는 것은 인간의 지능, 지식, 의식 등 ‘머리’에 해당하고, 축음기 속의 레코드판을 돌리는 태엽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동기, 정열, 노력 등 ‘가슴’에 해당한다. 태엽(가슴)을 감아주지 않으면, 이 레코드판(머리) 속에 담겨있는 음악은 나오지 않는다. 음악을 담은 레코드판과 적당하게 감긴 태엽이 ‘손발 맞을 때’ 비로소 음악이 흘러나온다. 知와 情이 합주해야 멋진 심포니가 울려 퍼진다.
학습동기가 에너지다. 그것 없이는 머리에 든 것은 아무 소용없다. 학습부진아에게 학습동기를 불어 넣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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