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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다 서류더미에 갇히게 된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서류더미에 갇히게 된 것일까?
  •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 승인 2016.04.2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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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과학本色_ 데이비드 그레이버 런던정경대 교수의 『관료제 유토피아』 (역자 김영배, 메디치미디어, 2015)

관료제 확산은 자유의 역설이다. 관료제를 줄이려고 시장에 기댔다. 하지만, 결국은 더 많은 간섭과 규제를 초래했다. 런던정경대(LSE) 교수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eaber)는 서류 더미에 묻혀버린 창의성과 혁신을 걱정한다. 그는 최근 번역된 『관료제 유토피아』(메디치미디어, 2015)에서 “적어도 내 생각에 세계 역사상 서류작업에 이토록 많은 시간을 쓴 인류는 지금껏 없었다고 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레이버는 ‘자유주의의 철칙’을 소개한다. 관료주의의 대안은 딱 한 가지 바로 시장이다. 하지만 시장의 힘을 키우기 위한 시장개혁은 결국 규제와 서류작업, 관료 집단의 숫자를 늘리는 효과를 나타냈다. 이것을 그레이버는 자유주의가 반드시 가져오게 될 철칙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우리 일상은 관료주의적 특성에 휩싸여 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기까지 온갖 규제와 규칙, 서류들이 인간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자유무역은 국제적 행정 조직 창설로 이어진다. 이 조직은 투자자들을 위한 이윤 추출을 보증해준다. 세계화가 결국 관료화였던 셈이다. 또한 은행의 사기를 적발하는 사법 시스템은 어떤가? 은행이 잘못을 하면 사법 시스템은 각종 규제를 들이민다. 그리고 벌금을 물린다. 국가에 귀속되는 벌금. 은행의 사기에 기생하는 게 바로 사법 시스템이다. 은행들은 다시 강력해진다.

시장개혁이 결국 관료제 불러와
관료주의적 기법들 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성과 분석이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금융 및 기업 영역에서 시작된 관료주의적 방식은 교육, 과학, 정부 등으로 침투했다. 서류작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는 기업의 관리기법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교수나 연구자들은 ‘연구’보다 ‘제안서 작성’에 더욱 열을 올린다. 그 결과, 상상력과 창조성의 싹을 옥죈다. 그레이버는 창의적인 발명이나 진정한 혁신은 기업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숨 막히게 답답한 공무원 집단은 왜 점점 더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 그레이버는 본국에서 추방당한 오스트리아의 귀족 폰 미제스의 주장을 인용한다. 관료주의는 민주주의가 지닌 결함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폰 미제스는 1944년에 『관료제』라는 책을 출간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선의가 파시즘이라는 광란으로 이어진다고 예견했다. 민주주의는 경제적 경쟁구도에서 패배한 이들에게까지 선거권을 준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선 통치를 할 수밖에 없다. 통치를 계획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권력 집단을 형성해야 한다.
관료주의를 이해하는 두 키워드는 ‘폭력’과 ‘기술이다. 먼저 폭력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레이버는 19세기 시장 자유주의가 태동했을 때 현대적 경찰과 사설 탐정기관도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그는 “일상적인 삶의 관료화란 냉정한 규칙과 규제 장치의 부과를 의미한다”면서 “냉정한 규칙과 규제 장치는 결국 힘의 위협으로 뒷받침될 때 작동할 수 있다”고 적었다. 대학 도서관을 출입한다고 해보자. 누군가 출입증 없이 억지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먼저 경비원이 제지한다. 실랑이가 계속되면 경찰이 투입되고 곤봉이 날아들지 모른다.

▲ 데이비드 그레이버 교수 사진출처= 주니퍼tv(http://junipertv.co.uk)

문제는 좀 더 심각해진다. 그 폭력이라는 것이 구조적이다. 이러한 폭력은 사회적 불평등을 불러온다. 우리는 관료주의가 결탁한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레이버는 카리스마 넘치는 관료주의 영웅으로 셜록 홈스와 제임스 본드를 예로 든다.
이번엔 기술을 살펴보자. 관료주의는 기술 없이 작동할 수 없다. 모든 보고서나 성과는 통계와 수치로 기록된다. 컴퓨터는 성과 분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기술의 발전으로 관료제가 나타난 것일까? 그레이버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언급한다. 관료제가 기술을 점차 발전시켜온 것이다. 그레이버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기술의 변화는 독립적인 변수가 아닌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停滯다. 책의 2장은 과학기술의 중요한 발전을 저해하는 절차에 대해 꼬집고 있다. 어렸을 적 늘 들어왔던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왜 정체된 것일까? 지금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2016년이다. 달나라 기지나 로봇이 스스로 로봇을 만드는 공장은 왜 현실화되지 못했을까?
그레이버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기술적 변화의 속도에 대한 인류의 기대가 비현실적이었다. 둘째, 새로 출현한 기술들은 거의 대부분 감시, 노동 규율 그리고 사회적 통제에 큰 도움을 준 것들이었다. 로봇 공학의 연구기금은 대부분 미국 국방부를 통해 조달된다. 전 세계를 감시하는 곳이 펜타곤이다.

개념적 혁명은 언제쯤 일어날까
인류가 고대하던 개념적 혁명은 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거대한 관료적 프로젝트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거대과학이 진행된다. 예를 들어, 인간게놈 프로젝트는 침팬지와 유전자 서열의 유사성만 밝혀냈을 뿐이다. 30억 달러가 투자된 이 프로젝트는 인간의 유전자 서열이 벼보다 ‘덜’ 복잡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연구자들의 창의성보다는 연구기금의 올바른 사용이 더욱 중요해지다보니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한편,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이나 주제 사라마구의 『모든 이름들』은 관료주의에 관한 주목할 만한 문학 작품이다. 위대한 문호들조차 관료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서류더미가 없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바꿔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관료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규제가 나타나지 않을까? 결국, 정치에 해답을 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정치라는 속성은 관료주의적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재호 학술객원기자 kimyita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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