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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부터 선망없인 살 수 없는 자아도취 문화 … “나야, 이건 나의 세대야”
타자로부터 선망없인 살 수 없는 자아도취 문화 … “나야, 이건 나의 세대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4.21 2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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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디지털 숭배의 기원은 무엇일까?_ 『디지털 현기증』 앤드루 킨 지음|진달용 외 옮김|한울엠플러스|301쪽|29,000원
▲ 사회에서 유리될수록 ‘사회적인 것’에 심취하게 된다. 하버드대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이것을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고 정의했다.

토플러는 “사람들이 서로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또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다고 가장 크게 불평하던 사람들이 바로 더 큰 개인성을 촉구하는사람들인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라고 관찰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쉽게 페이스북에 글과 사진을 올리고, 구글에서 검색하고, 유튜브로 동영상을 감상한다. 자신의 내밀한 사생활을 공개함으로써, 개인들은 소셜미디어 네크워크와 연결된다. 이렇게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소셜미디어 기업들의 알고리즘을 통해 다양한 데이터로 변환된다. 소셜미디어 기업들은 이 데이터로 엄청난 수입을 올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미디어 제국의 건설을 도모한다. 소셜미디어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총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셜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실리콘밸리의 기업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엔드루 킨의 『디지털 현기증: 소셜미디어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은 주관적 해석이 강한 단점을 지녔지만, 소셜미디어의 홍수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독을 짚어볼 수 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자는 소셜미디어가 제러미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처럼 소셜미디어상에서 모든 사람들의 사생활을 관찰하고, 이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또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현기증」을 언급하면서, 소셜미디어상에서는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리고 소셜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것은 소셜화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소셜미디어 네트워크에 연결되면 될수록 인간은 외로워지고 개인화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저자는 또 21세기 초반의 소셜미디어 혁명이 19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 이래 가장 강력한 문화변혁을 가져오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이야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 소셜로 대표되는 디지털 숭배의 기원을 언급한 대목이다. 오늘날 ‘온라인’으로 상징되는 소셜로 흘러들어온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앤드루 킨의 설명을 들어본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1957년 9월,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설립되기 한 달 전에, 잭 케루악(Jack Kerouac)의 『길 위에서(On the Road)』가 출간됐고, 이것은 빠르게 전체 세대들에게 전달됐다. 밥 딜런(Bob Dylan)도 그 세대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비트 제너레이션의 시인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에게 이것이 “모든 다른 이들에게 그랬듯이 나의 삶을 바꿨다”라고 고백했다. 케루악은 불만족의 풍요를 문학으로 바꾸고, 사회의 경계에 서 있는 아웃사이더, 즉 방랑하는 보헤미안으로서 현대적 가정, 학교, 교회 그리고 직장의 참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관습들을 비웃음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긴즈버그나 티머시 리어리(Timothy Reary) 그리고 게리 스나이더(Gary Snider) 같은 다른 자유주의자 비트 시인들과 함께 케루악은 모든 형태의 전통적인 권위―주류 언론 및 거대 정부부터 조직 일반과 회색 플란넬 정장의 남자에게까지―에 도전했다. 이것은 새로운 진동이었는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가 1964년 그의 베스트셀러인 『일차원적 인간』에서 ‘관습적 산업사회’라고 불렀던 것에 대항하는 보헤미안주의의 다채로운 폭발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설명은 전통적 권위에 대항하는 비트족(Beatnik)들의 보헤미안적 반란에 그치지 않았다. 이것은 런던정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의 말을 빌리자면 ‘공동의 환상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적 인성’을 가진 공동의 봉기였다. 그리고 그 환상은 세넷이 ‘사회적 관계들의 친밀함’이라고 부르는 것에 집중돼 있었다. 보헤미안 반란의 급진적 자유주의와 동시에 마르쿠제나 작가 폴 굿맨과 같은 1960년대 급진주의자의 공동체주의적 이상주의도 존재했는데, 역사가 시어도스 로스작(Theodore Roszak)은 이들을 대항문화의 ‘최전선’이라고 칭했다.

인간 정신에 대한 전문가인 마르쿠제와 굿맨 같은 이론가들은 1950년대 기업의 일차원적 인간을 전 인류의 통합자인 사회적 버전의 인간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새로운 유형의 인류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공동체주의적 시녀체계는 개빈 엘스터 스타일의 허구적 과거에 대한 향수에 근거했는데, 이 허구적 과거란 마음이 즐거운 산업화 이전의 시대, 곧 ‘소규모의’ 산업주의가 ‘마을이나 지역의 정신(ethos)의 시녀’ 역할을 하는 끝나지 않는 러브인(love-in)을 의미한다. 식민화되기 이전 인디언들의 지역사회를 재건한다는 폴 굿맨의 시대착오적인 믿음이건, 자본주의로부터 인간의 정신적인 소외나 혁명 후 사회적 통합에 대한 허버트 마르쿠제의 이론과 약속이건, 샌프란시스코 디거스 같은 공동체주의 히피 집단의 자발적인 원시주의이건 간에 상상 속에서 과거의 집단 사회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소셜 이상주의자인 돈 탭스콧이나 제프 자비스가 현재 이상화하고 있는 구전 문화와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귀결을 지닌다. 다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석학인 발터 벤야민은 이에 대해 “새로운 것의 출현에 동반되는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는 언제나 동시에 원래의 과거로 돌아가게 돼 있다”라고 말했다.

과거 공동체의 순수성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확실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두 세기 전에 장 자크 수로는 머나먼 과거를 근거로 아마도 비정하고 불평등했을 당대의 사회에 대해 비슷한 공격을 시작했다. 귀중한 다섯 권짜리 책 『사생활의 역사』에서 프랑스 역사가 장 마리 굴망은 루소의 ‘스스로에 대해 투명한 시민 개념’에의 집착을 묘사한다. 루소가 1758년 직접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특유의 공동체주의적 향수를 가지고 썼듯이, “상대를 사랑하는 데 매우 많은 이유가 있고 언제나 결합된 채 머무는 사람들보다, 가끔씩 만나 그들 사이에 기쁩과 즐거움의 다정한 결합을 만드는 사람들이 무엇이 더 낫단 말인가?”
우리가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굿맨과 마르쿠제가 루소적인 향수의 논리를 펼치기 전으로, 록히드와 IBM 이전으로, 조직인과 군산복합체 전으로, 모든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았던 때로, 마을과 이웃으로 이뤄진 참된 사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진짜 색조, 흥분, 강인함 그리고 자유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했어야 하는지를 재발견할 것이다.

허버트 마르쿠제의 뮤즈 카를 마르크스는 실패한 1848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에세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람은 그들의 고유한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이 선택한 상황에서가 아닌, 과거로부터 직접 마주치고 주어지고 보내진 상황하에서 만든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1848년에 사실이었던 만큼 1967년에도 사실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시위자의 해였던 2011년에도 사실이었다. 사랑의 여름 동안 산업 이전 사회에 대한 집착 때문에 1967년 해이트-애시버리의 러브인에 모여들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은 시어도어 로스작의 말을 빌리자면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의 아이들―그들이 도망치려 했던 괴물 같은 후기산업사회의 산물―이었다.

이것은 개인 존재의 고유함과 집단적 공존 모두를 추구하며 점점 더 자발적으로 변하는 시위자들의 세대였고, 런런정경대학의 리처드 세넷이 ‘친밀한 사회’라고 부른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고독하고 분열적인 개개인이 모인 군중 무리였다. 하버드대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사랑의 여름 때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숭배를, 사회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 정반대로 달랐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고 묘사했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외로운 사람들은 점점 더 전통적인 사회집단으로부터 분리됐고, 그럴수록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념에 점점 더 심취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회적인 것의 정의란 너무나 개별화됐고 지나치게 그들 각각의 정체성이 반영돼 있어서 그들의 사회적 진실성에 대한 숭배는 동시에 진실한 자아에 대한 숭배였으며, 문화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시의 기억에 남는 표현에 따르면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을 선망하는 관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아도취의 문화가 만들어졌다.

갈수록 개인화되는 사회와 커져가는 공동의 정체성에 대한 열망 사이의 아이러니는 앨린 토플러가 1970년 작 베스트셀러 『미래 쇼크』에서 포착한바 있다. 이 책은, 주식시장에서의 거래가 개인적 평판을 따르고 정보의 흐름이 세찬 오늘날 웹3.0 시대의 비영구성에 대한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확한 경고였다. 토플러는 “사람들이 서로와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또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다고 가장 크게 불평하던 사람들이 바로 더 큰 개인성을 촉구하는 그 사람들인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라고 관찰했다. 따라서 토플러가 지적했듯이, 산업화 시대 이후의 인간은 산업시대 이전의 선조들과 달리 우리를 공동체에 대한 강한 정체감에서 멀어지게 하는, 다른 여러 가지 ‘임시적 대인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조립인간(modular man)’이다. 토플러는 『미래 쇼크』에서 “사물들과 장소들이 우리의 삶을 빠른 속도로 흘러 지나가듯이 사람들도 그렇다”라고 썼다.

불행하게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에 왔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의 강한 개인주의와 공동체를 향한 열망 사이의 모순에 대해 많이 생각하기에는 임시적인 대인관계로 너무 바빴다. “이건 나의 세대야, 이건 나의 세대라고, 자기.” 더 후가 몬터레이에서 노래 불렀다. 이것은 또 다른 1960년대의 주제곡 「나의 세대(My Generation)」의 가사다. 그러나 이것은 소셜미디어가 나의 공간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의 세대였다. 즉, 그들 각자의 개인적 필요에 따라 그 자신의 공동체를 만드는 자도취적인 보헤미안의 세대였다. 이 보헤미안들은 돌턴 콘리가 말한 인트라비주얼의 초기 선조들이었거나 셰리 터클과 조너선 프랜즌이 말한 자신에게 몰두한 디지털 시대의 젊은이들, 즉 오늘날 포스퀘어, 에어타임 그리고 플랜캐스트의 시대를 떠도는 파편화된 나비들, 네트워크화된 공동체에서 공동체로 또 개인화된 온라인 체험에서 체험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나르시스적인 나비들이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고 부유한 매들린 엘스터처럼, 사랑의 여름은 현실이 되기에는 너무 좋은 것이었다. 한편으로 대항무화는 새로운 인간, 즉 전통적 사회의 족쇄에서 벗어나 아주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인간형을 장려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산업사회 이전의 마을들에서 볼 수 있었던 공산 사회의 자궁으로의 귀환을 약속했다. 이 보헤미안적 개인주의와 원시적 집단주의를 성공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히치콕 영화의 플롯이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에 비할 만한 것이었다. 사랑의 여름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실제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보아온 그림이다. 『일차원적 인간』과 『길 위에서』를 배낭에 넣고 1967년 샌프란시스코로 흘러들어간 이 유행을 따르는 젊은이들은 재물을 찾아 떠난 1849년의 속물적 황금 사냥꾼들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적 러브인에서 모든 인류를 통합하려면 그들의 해방운동에 대한 꿈은 금을 발견하겠다는 포티나이너들의 믿음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혁명적인 ‘사랑의 여름’의 실험이 전 세계의 연결이 아닌 다툼으로 끝났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늙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더 후가 몬터레이 무대에서 청소년들의 열망에 카타르시스를 주기 휘애 악기를 부숴버리기 전에 노래했다. 이 행위는 바로 1960년대가 어떻게 끝날 것인가에 대한 예언과도 같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친절한 사람들’ 중 다수가 실제로 1960년대 말이 되자 폭력적이고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급진적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가 위험할 정도로 팽배함에 따라 점점 더 불안을 느꼈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애덤 커티스가 주장하듯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추방되기로 예정돼 있던 것, 바로 권력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유로웠다. 강한 인물들이 약한 이들을 지배했지만 규칙은 억압에 대한 어떤 조직화된 반대도 허용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조직화된 반대는 정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맨슨 패밀리(Manson family)가 러브인을 대체했다. 노숙, 굶주림, 먀악중독, 범죄 그리고 질병이 가득했던 1969년의 해이트-애시버리가 점점 더 부서진 사람들과 꿈들의 시체가 늘어선 공동묘지였던 1849년의 샌프란시스코처럼 보이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알 수 있듯이, 시체는 결코 보이는 것만큼 죽어 있는 상태는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가 1848년의 실패한 혁명에 대한 글에 썼던 인상적인 말처럼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살아 있는 이들의 두뇌에 악몽처럼 작용한다.” 진실은 이렇다. ‘사랑의 여름’ 세대, 나의 세대는 사실 1969년에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온라인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파장은 우리 주변 모든 곳에 있다. 그것은 ‘소셜미디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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