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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문학의 게으름
한국 인문학의 게으름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
  • 승인 2016.04.21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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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한국 인문학에 부여하는 당면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가 있다면 도대체 무엇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크게 여섯 가지다.
첫째 과제는 한국 사회가 성장 중심의 경쟁 사회에서 성숙 지향의 인문 사회로의 전환함에 있어서 요청되는 의제와 담론을 제공하는 일이다. 물신 사회에서 벗어나는 일, 곧 정신과 물질의 균형의 유지가 시급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국 사회가 혈연, 지연, 학연을 바탕으로 움직여지는 봉건 사회에서 보편 가치와 보편 이념이 상식과 양심의 기준이 되는 시민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서 요청되는 읽을거리와 생각거리를, 곧 정신의 양식을 제공하는 일이다. 셋째는 한국 사회가 생존 사회에서 생활 사회로, 즉 문화 사회로 나가도록 추동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는 고립과 배제에서 소통과 통합의 정신이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자리 잡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이 ‘따로 또 같이’ 잘 사는 공영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외국의 통합 사례들과 역사 선례들을 담고 있는 문헌들과 논의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한국 경제가 모방 단계에서 선도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요청되는 지식 사회의 모판을 짜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믿고 참조할 만한 개념 사전 하나도 못 만드는 나라다. 여섯째는 한국 문화와 역사가 식민지와 근대화의 과정에서 단절된 전통 사회의 미덕과 장점을 다시 살려내는 일과 외래의 문화와 문명이 상호 융합하는 개방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의 틀을 제공하는 것일 것이다. 정리컨대, 인문 사회, 교양 사회, 시민 사회, 지식 사회, 전통 사회와 개방 사회, 공영 사회로의 진입할 수 있는 기반 마련이 한국 사회가 한국 인문학에 부여한 과제라는 소리다.

문제는 ‘어떻게’이다. 물음은 복잡하지만 답은 간단하다. 문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뀌어야 사회도 바뀌기에. 위의 과제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인의 기본 가치와 한국인의 정체성을 정립 혹은 재정립해야하는 의제들이다. 물론, 선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종홍 선생이 지은 「국민교육헌장」이다. 하지만 이 글은 시효를 다한 것이다. 물론 수긍할 만한 대목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글로벌 문명 시대의 국제화와 세계화의 요구를 담는 데는 한계가 많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시민 정신을 담은 교양 선언이 제시돼야 한다. 「마그나 카르타」, 「미국 독립 선언」과 같은 ‘시민 헌장(carta civilis)’ 혹은 조금 보수적으로 말하자면 ‘국민 헌장’이 선언돼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사회의 내부 통합과 남북 소통을 위한 최소 공통성의 마련함에 있어서 이제는 민족 담론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도 그럴 것이, 나날이 군사적으로 첨예화되고 있는 동북아 세계가 서로 공존-공영-공생할 수 있는 이념과 논리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내부 통합을 위해서는 시민 사회를 착생시켜야 하고, 남북 소통과 관련해서는, 특히, 분단이 남긴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교양 사회의 착생이 매우 시급하다. 한국 사회가 사회적으로 앓고 있는 몸살도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일베’라 불리는 일부 극우 세력의 준동과 ‘종북’이라 지칭되는 극좌 세력의 발호는 한국 사회가 균형과 평형을 잡아줄 平衡水가 없는 사회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현상일 것이다. 교양!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회의 균형과 조화를 잡아주는 평형수가 바로 교양이다.

정신의 평형수인 교양 부재의 문제와 관련해서, 단적으로 유교의 충효 사상이나 분단 상황의 산물인 반공 이념도 더 이상은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가치를 대변하지 못한다. 예컨대, ‘춘향이’처럼 살려는 여학생은 이제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대의 반공 이념만으로는 이미 산업 사회를 넘어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 만연된 ‘양극화’의 폐해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충돌만 만들어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 낸 폐해들에 대응해서 만들어진 사회 제도와 조직들에 대해서도 그 정치적 실체를 인정해야 되는 규모의 단계로 한국 사회가 성장해 버렸다는 소리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이와 같은 구조적인 성격 변화에 대한 분석이 시급하며, 이 분석을 바탕으로 할 때에 계속 유지해야 하거나 앞으로 형성해야 하는 한국인의 기본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소리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이제는 성장 사회에서 성숙 사회로의 전환을 혹은 이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로 이미 들어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제 갓 70년이 된 신생 국가다. 아직 국가 형성(nation building)도 안 된 나라라는 소리다. 이른바 ‘좋은 나라(civitas bona)’ 혹은 ‘살고 싶은 나라’에 대한 최소의 합의나 동의도 마련되지 않는 나라라는 소리다. 그동안 한국 인문학이 너무도 게을렀다는 말이다. ‘살고 싶은 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를 담은 ‘시민 헌장(carta civilis)’하나도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기에.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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