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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사주의’가 아닌 ‘역사법칙주의’여야 할까?
왜 ‘역사주의’가 아닌 ‘역사법칙주의’여야 할까?
  • 교수신문
  • 승인 2016.04.1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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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법칙주의의 빈곤』 번역한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의 어떤 선택

 

나는 ‘historism’은 ‘역사개성주의’로, ‘historicism’은 ‘역사법칙주의’로 번역하고자 한다. 이렇게 번역돼야 강조점이 다른 역사주의의 두 흐름이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historism’을 ‘역사상대주의’로 번역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그것은 ‘historism’의 상대주의적인 인식론적 측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개성을 강조하는 존재론적 측면을 사장시키는 폐단이 있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칼 포포의 책 The Poverty of Philosophy(London: Routledge, Kegan Paul, 1961)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Economica New Series>(1944년 11권 42호와 43호, 1945년 12권 46호)에 발표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책의 구상은 1919~20년 겨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몇 차례의 발표를 거쳐 <Ecinomica>에 연재됐고, 1954년에 이탈리아어 번역이, 그리고 1956년에 프랑스어 번역이 단행본으로 나왔으며, 1957년에는 영어 단행본이 나오게 됐다. 그 후 1960년에 재판이 나왔고, 1961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이 책의 기본 주제는 역사적 운명에 대한 믿음은 순전히 미신이며, 인류의 역사의 행로는 어떤 합리적 방법으로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표제 『역사법칙주의의 빈곤』은 마르크스의 책 『철학의 빈곤(Poverty of Philosophy)』을 암시하기 위해서 붙여졌는데, 마르크스의 이 책은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Philosophy of Poverty)』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먼저 이 책을 읽는 독자는 ‘historicism’이 ‘역사주의’가 아니라 ‘역사법칙주의’로 번역된 것에 어리둥절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 ‘historicism’을 ‘역사주의’로 번역해 왔기 때문이다.
‘역사주의’란 말은 처음 사용될 때부터 혼란스럽고 다의적인 개념이었다. 용어상으로만 보면 독일어 ‘Historismus’(영어 ‘historism’)가 19세기 중엽부터 사용되기 시작했고, 19세기 말엽부터는 ‘Historizismus’란 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말은 니체나 캘러에서 보듯 ‘Historismus’에 대해 더 강한 비판적 의미가 담긴 용어였다.
후설은 이 말로써 딜타이의 상대주의를 지칭하고, 그것을 비난하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말은 포퍼가 새롭게 규정할 때까지는, 비난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 외에는 ‘Historismus’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미 학계에서는 역사주의를 의미하는 말로서 20세기를 전후해서 ‘historism’이 사용되다가, 1930년대 후기부터 1940년대에 걸쳐 ‘historicism’이 등장해 이것이 더욱 일반적인 용어로서 정착됐다.
이 말들은 모두 독일어 ‘Historismus’나  ‘Historizismus’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historicism’이 ‘historism’보다 더 일반적인 용어가 됐는가? 이에 대해 역사주의의 의미로 크로체가 사용한 이탈리아어인 ‘storicismo’가 다시 ‘historicism’으로 영역돼 학계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말하자면 크로체의 영향 때문에 ‘historicism’이 더욱 일반적인 용어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historicism’은 포퍼에 의해 ‘historim’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나타내게 됐다. 그는 ‘historim’으로는 독일의 전통적인 역사주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했고, ‘historicism’으로는 자신이 새로이 규정한 역사법칙주의를 표현했다.

나는 ‘historism’과 ‘historicism’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우리말에서도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에서 나는 ‘historism’은 ‘역사개성주의’로, ‘historicism’은 ‘역사법칙주의’로 번역하고자 한다. 이렇게 번역돼야 강조점이 다른 역사주의의 두 흐름이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historism’을 ‘역사상대주의’로 번역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그것은 ‘historism’의 상대주의적인 인식론적 측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개성을 강조하는 존재론적 측면을 사장시키는 폐단이 있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전통적인 역사주의만을 역사주의로 고집하면서 역사법칙주의는 아예 역사주의로부터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사주의가 실제로 사용되는 현실을 무시하고 혼란만 가중시키는 공호한 주장일 뿐이다.
랑케나 마이네케 등이 대표하는 독일의 전통적인 역사주의는 역사적 사건들의 개성과 발전을 강조하는 이론이며, 포퍼에 의해서 새로이 규정된 역사주의는 역사가 거시적인 역사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이론이다. 이들은 강조하는 초점이 다르므로 한 단어로 포괄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것이 포퍼의 역사주의를 역사법칙주의로 번역한 이유다.

□ 포퍼의 『역사법칙주의의 빈곤』(칼 포퍼 지음, 철학과현실사)은 이한구 교수를 비롯, 정연교 경희대 교수, 이창환 충북대 강사가 함께 번역했다.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는 사회철학, 역사철학, 과학철학 등의 분야에서 비판적 합리주의의 철학을 발전시키면서, ‘열린 유포피아의 사회’,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 인류 보편사의 이념’, ‘비판적 이성과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 ‘문명의 융합’ 등의 주제를 논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역사주의와 반역사주의』, 『역사학의 철학』 등과 옮긴 책으로 『열린사회와 그 적들Ⅰ』, 『추측과 논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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