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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스승 닮으려 부단히 수련했던 시절 떠올라 … 미개척 고고학 분야 외길 걸었다”
“학문적 스승 닮으려 부단히 수련했던 시절 떠올라 … 미개척 고고학 분야 외길 걸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4.05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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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 제22회 용재학술상 수상기념 강연 ‘박물관에서 구석기와 함께 한 나의 50년’

용재학술상은 연세대 국학연구원이 한국학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이 탁월한 사람이나 단체 가운데 선정해 수여하는 학술상이다. 용재는 연세대 초대총장인 백낙준의 아호이며 국내외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교수 중에서 학문 업적이 탁월한 학자를 ‘용재석좌교수’(1년 기간)에 임명하고 있다.
지난달 9일 이융조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가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제22회 용재학술상을 수상했다. 이 교수는 故 손보기 박사와 함께 1964년 공주 석장리유적 발굴과 제천 점말 용굴 발굴에 참여하면서 한국 구석기 연구에 기여해왔다. 충북대 교수로 부임한 뒤에는 청주 두루봉동굴과 소로리유적, 단양 수양개유적과 구낭굴 등의 새로운 구석기유적을 찾아 국내외 학계에 소개했다. 특히 충주댐으로 수몰된 수양개유적을 기념하는 국제회의를 20년 간 21회 개최해, 수양개를 비롯한 우리나라 구석기의 연구를 세계 학계에 소개하고 학술교류를 확대하는 데 앞장서왔다.
연세대 국학연구원은 이융조 명예교수의 그간 학문적 노력을 기려, 지난달 31일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제451회 국학연구발표회 자리를 ‘박물관에서 구석기와 함께 한 나의 50년’ 강연으로 갈음했다. 이 명예교수의 학문 인생 50년은 박물관, 구석기라는 열쇳말과 그대로 이어진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고고학 영역에서 흔들리지 않고 학문 외길을 걸어온 노학자가 회고하는 50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저의 학문과 인생의 길에 큰 가르침을 주신 손보기·홍이섭·민영규 선생님들을 가르쳐주시고 모두 연세동산에 교수로 이끄신 용재 백낙준 선생님을 기리는 상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니, 지난 50년간의 기억들이 가슴 벅찬 감회와 함께 떠오릅니다.
1964년부터 공주 석장리 1차 발굴에 학과 조교의 신분으로 참가하면서부터(사진 1) 손보기 선생님의 ‘박물관에서 구석기를 공부하자’는 사랑을 담은 권유의 말씀에 따라, 진로에 대한 큰 고민을 갖고 있을 때, 홍 교수님께서는 ‘구석기도 한국사니 좋으나, 큰 학자가 돼야 하네’라고 하는 당부의 말씀은 일생의 큰 가르침으로 남아 있습니다.

1965년과 1966년 4월 석장리 제2차·3차 발굴장을 두 차례나 방문하신 용재 선생님께서는 헤어지는 자리에서 저의 등을 두드리며 ‘개척자는 힘들지만 그만큼 큰 보람도 있으니 앞으로 크게 노력하라’고 격려를 주셨습니다(사진 2). 그로부터 20년 후인 1984년 3월에 제가 찾아 발굴한 청주 두루봉동굴 연구로 모교에서 구석기로 첫 번째 박사학위를 받은 기쁨 속에 학위논문을 드리려고 명예이사장실로 찾아뵀을 때 용재 선생님께서는 두터운 손으로 저의 손을 마주잡고 ‘꼭 20년이 걸렸군요. 앞으로 더욱 노력해 세계적인 학자가 되도록 하세요’라는 말씀은 홍이섭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영원히 저의 가슴에 안겨져 있었습니다.
1964년부터 석장리 고고학조사에 참여하면서 연세대 박물관의 개관에 초대 관장이신 손보기 선생님을 도와 미력을 보탠 것이 인연이 돼 1965년 9월부터 박물관에 둥지를 틀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박물관과 구석기’는 제 인생에서의 50년 간 두 길이었습니다.
연세대 박물관에 12년간 근무하며 1976년 11월에 충북대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연세동산과 박물관에서 저는 학문과 인생의 길을 배우게 됐습니다.
박물관에서 구석기를 공부하는 것이 일생 지켜나가야 할 길로 생각하고 노력해 왔습니다. 충북대에 전임강사로, 박물관의 주임교수로 발령받고서 2007년 2월 박물관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박물관과 인연은 계속됐고, 이 박물관에서 구석기만을 연구하는 학자로 퇴임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와 계신 신방웅 전 총장을 비롯한 충북대 역대 총장님들의 특별한 배려와 학교의 기대를 받아 80년대, 90년대, 2000년대까지 여러 차례 박물관장을 맡아서 구석기 조사와 연구 그리고 박물관에 관한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40군데의 구석기유적을 비롯한 51곳의 선사유적을 찾고 유적을 발굴해 이를 통한 학문의 연구로 학계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400여 편의 논문과 각기 40권에 가까운 발굴보고서와 편저서를 국내외 학계에 발표했습니다.”

위의 내용은 지난 3월 9일 제22회 용재학술상 수상자 답사에 있었던 첫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손보기 선생님의 ‘박물관에서 구석기를 공부하자’고 하신 말씀에 따라 50년을 종사하면서 홍이섭 선생님의 ‘큰 학자’가 되라는 말씀과, 용재 백낙준 총장님의 ‘세계적인 학자’가 되라는 말씀은 일생의 지표가 됐기에 이를 명시하고자 서두에 인용했다.

나는 나의 학문에 대한 연구사를 다음과 같이 크게 3개로 구분한다.
‘제1기(1964. 11 ~ 1976. 10): 고고학의 중심에 서기 위하여’라는 시기는 연세대와 박물관에 조교·연구원·수석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철저하게 손보기 교수의 석장리와 점말 용굴의 학술발굴로 하는 조사활동에 참여하면서, 학문적 방법과 스타일을 닮고자 노력했다. 그렇게해서 학문의 목표를 ‘구석기’와 ‘박물관학’으로 정하고, 평생 좋아하던 탁구마저도 멀리 할 정도의 생활로 일관하고자 했다. 이 기간은 철저하게 손 교수를 닮고자 했던 학문의 수련기라고 하겠다.
‘제2기(1976. 11~ 2007. 2): 고고학 교수로서 큰 세계를 위하여’라는 시기로 충북대 역사교육과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박물관의 조사로 또는 독자로 역사교육과· 사학과·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와 학생들의 큰 도움을 받아 구제발굴로 전국의 유적조사로 확대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충주댐·중부고속도로 등 조사단을 조직·구성해, 새로운 학술조사단의 유형을 고고학계에 제시했다.
이 기간에 나의 주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청주 두루봉·소로리, 단양 수양개(사진 3)·구낭굴 등 한데유적과 동굴유적을 찾아 발굴·연구·보고했다. 이러한 유적조사와 함께 이들의 연구결과를 국내외 학계에 발표했으며, 여기에서 더 발전해 중국·러시아·일본·미국·폴란드 등지에서 2~6차례의 국제회의를 조직·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구제발굴로 찾은 단양 수양개·충주 조동리·고양 가와지·중부 고속도로 등 선사유적 박물관을 개관해 새로운 형식의 박물관을 제시했다.
이렇게 찾은 유적 가운데  국가사적으로 수양개(제389호)를, 지방기념물로는 단양 구낭굴(충북기념물 제102호), 각기리선돌(제127호), 옥천 안터고인돌(충북 유형문화재 제10호)과 선돌(충북기념물 제148호), 충주 조동리(제126호), 제천 입석리 선돌(117호) 등의 유적을 들 수 있다. 한편 청주(전 청원) 궁평리 유적조사(1991)를 계기로 경부고속전철 건설부지 전 구간에 대한 정식 고고학 조사계기를 만든 것은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또한 수양개를 비롯해 두루봉과 소로리볍씨 국제회의를 개최하며 우리나라 구석기유적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한국구석기학회·한국박물관학회·아시아구석기학회 등 여러 학회 창립에 깊게 관여했다.
‘제3기(2005. 4 ~ 현재): 새로운 세계에서’의 시기는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원장·이사장으로 청주 만수리·노산리·양평 도곡리·파주 운정지구·제천 고명동유적 등 새로운 구석기유적을 조사해 학계에 발표했으며, 한편 수양개(한데유적)·구낭굴(동굴유적)·소로리(볍씨유적)를 학술발굴로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수양개 국제회의(‘수양개와 그 이웃들’)를 계속 개최하면서(1996~2015. 20회), 중국(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여고인류연구소·하남성 문물고고연구소·길림대학 변강고고연구중심)·러시아(크라스노야르스크 국립사범대·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 분원)·폴란드(우찌대)·일본(동지사대· 도쿄대)·프랑스(파리 10대)와 학술교류협정을 맺어 공동 학술연구진행과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맛있고 멋있는 고고학과 함께
“1963년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에서 198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연세대 박물관 수석연구원으로 재직한 후, 1976년부터 2007년까지 충북대로 자리를 옮겨 30년간 교수로 재직하고, 현재는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그동안 충북대 박물관장, 한국고대학회 회장, 한국대학박물관협회 회장, 한국구석기학회 회장 등을 수차례 역임하면서 평생을 연구와 교육에 매진해오고 있다.
이융조 교수는 충북대에 고고미술사학과를 개설해 고고학과 미술사 전공인력을 양성했고, 고고학자로서 51개의 중요한 유적을 조사·발굴·연구해 선사문화 복원에 이바지했다. 또한 조사 유적 6곳에 박물관을 건립해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교육연구기반 확충에도 주력했다. 그동안 구석기학 및 박물관학 분야에 10권의 저서와 39권의 편저서, 2권의 번역서, 39권의 발굴조사 연구보고서를 제출했고 430편에 달하는 방대한 연구논문을 제출했다.
아울러, 우리나라 고고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특히, 단양 수양개유적은 충주댐으로 수몰됐던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해 국가사적(제398호)으로 지정받고, 이를 세계구석기학자들과 교류하는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국제학술대회를 1996년도부터 현재까지 20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그 연구결과가 그간 중국, 일본, 폴란드, 러시아, 프랑스, 이스라엘 등 총 6개국 언어로 발표된 것 10권이 있다.
이러한 교수의 노력에 대해 ‘국무총리표창(박물관진흥공로)’, ‘근정포장(77929호, 대통령)’, ‘외솔상(35회, 외솔회)’, ‘옥관문화훈장(문화재청, 2015)’ 등의 포상이 있다.
현재도 이융조 교수는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으로 봉직하며, 문화교육적 차원에서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전승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위의 글은 수상식 답사 프로그램의 ‘공적보고’에 소개된 내용의 높임말체를 평어체로 고쳐 쓴 것이다. 석장리에서 만수리까지의 구석기와 함께 한 지난 50년을 이렇게 간결하게 정리할 수가 있는지, 나는 이 글을 10여 차례나 읽으며 지금까지 50년의 궤적이 아니라 인생여정의 모두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에 나는 아래와 같이 답사에서 밝혔다.

“지금 제가 제 연구 인생의 마무리라고 생각하며 애쓰고 있는 것이 앞서 말씀드렸던 충주댐으로 수몰된 단양 수양개유적입니다. 1980년 처음 찾은 이 유적과의 씨름은 지금까지 35년이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미 수몰돼 사라진 수양개유적을 국가사적으로 만들고 또한 이곳에 국가에서는 120억이나 들여서 세운 커다란 박물관을 건립하고 1996년부터 수양개국제회의를 지금까지 20회나 개최했습니다.
최근에는 새롭게 찾아 발굴한 수양개 6지구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지난해 11월 제20회 수양개국제회의(사진 4)에 참가했던 세계 여러 나라의 구석기 학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이 중요한 유적의 보존을 강조했으며, 힘을 보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만, 이 유적도 앞의 수양개 1지구처럼 많은 부분이 이미 물속에 잠겨 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나 문화재청으로부터 6지구를 사적으로 준비하라는 공문을 받아서 이제는 공식적인 사적 지정절차만이 남아 있어 좋은 대책이 곧 마련되리라 믿습니다.
이 유적에서 발굴된 ‘눈금돌’은 자그만치 3만5천 년 전의 구석기인들이 만든 것으로 세계 최초의 계측하는 자로 밝혀지고 있어 수학과 기하학의 기원을 찾을 수 있게 됐으며, 또한 함께 출토된 ‘얼굴돌’은 세계선사예술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사진 5). 이 고고학자료들을 분석하기 위해 조직한 우리 학술팀은 만 2년 동안 이 일에 매달려 왔으며, 곧 세계 유수의 학술지에 그 성과를 발표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수양개 유적이 올바로 평가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다면 세계 구석기학계에 처음 있는 일이 될 터이고, 연세동산에서 가르침을 받은 한 제자가 연세의 정신에 따라 세계학계를 놀라게 하는 개척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받은 이 학술상의 큰 영광은 지금까지 저를 믿고 어려움을 견뎌내면서도 조사 발굴 연구 정리에 매진해 온 충북대 역사교육과와 고고미술사학과 제자들, 두 과의 동료 교수들, 그리고 퇴임 후에 세운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우종윤 원장을 비롯한 젊은 연구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구석기 고고학 연구에 큰 도움을 준 충북대의 여러 인접과학 동료 교수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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