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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한 것은 문명 아닌 제국” … 근대에 대한 새로운 성찰
“충돌한 것은 문명 아닌 제국” … 근대에 대한 새로운 성찰
  • 차태근 인하대·중국언어문화학과
  • 승인 2016.03.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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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충돌하는 제국』 리디아 류 지음|차태근 옮김|글항아리|485쪽|25,000원

 

제국은 자신의 보다 안정적인 주권의식을 위해 다양한 담론과 기호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19세기의 서구중심적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이러한 담론적
실천의 한 양상일 뿐이다.

 

이 책은 제국을 연구하는 데 있어 방법론적 성찰을 보여준다. 특히 19세기 동서양 문명의 전면적인 접촉이라는 시기에 두 지역을 대표하던 영국 제국과 청 제국의 역사를 통해 제국의 정치담론이 어떻게 주권을 둘러싸고 전개됐으며, 그 과정에서 근대 중국이 형성됐는지를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분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근대 세계질서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주권이다. 이는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가 근대 세계질서의 기본 토대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주권의 평등성에 입각해 주권 주체들 간의 협약을 통해 근대적 국제질서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형성된 국제질서는 이제 역으로 상호 협약과 승인을 통해 새로운 주권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주체가 된다. 저자는 이를 국제정치학의 기호학적 전환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기호학은 바로 기호의 관습/자의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호의 의미는 바로 한 사회의 약속(협약)에 의해 생명을 지닌다. 영어로 기호의 관습/자의성을 나타내는 말과 국제사회에서의 각종 협약을 나타내는 말은 모두 동일한 ‘convention’이다. 이와 같이 19세기 이후 기호학과 국제정치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문자 ‘夷’를 둘러싼 제국의 갈등과 주권 강박
주권이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 관계적인 것이라면, 주권의식은 항상 타자의 승인여부에 의해 존재하는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말이 된다. 제국은 자신의 보다 안정적인 주권의식을 위해 다양한 담론과 기호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19세기의 서구중심적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이러한 담론적 실천의 한 양상일 뿐이다. 1858년 톈진조약에서의 중국 한자 ‘夷’에 대한 사용금지는 통역자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당시 중국내 일부 서구 선교사들에 의한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로 간주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그 속에서 제국의 주권상상과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타자의 거울 속에 야만인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본 제국의 ‘상처입은’ 주권의식이 ‘夷’에 중국인의 ‘고질적’인 자기중심주의와 대외적 배타심리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강제했다는 것이다. ‘夷’의 의미는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로 논쟁적이지만, 단순히 영어의 ‘barbarian’의 동의어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영어권에서 ‘夷’에 대한 권위 있는 번역어는 ‘barbarian’이다. 저자는 이러한 번역행위 속에 바로 제국의 주권에 대한 강박관념이 빚어낸 결과로서의 유령이 현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번역의 문제가 제기된다. 번역의 대상인 두 언어 사이에 의미의 공약성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두 언어에 대한 다양한 언어지식에 의해 곧 바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등가의 의미를 가진 개념을 서로 상이한 언어 속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번역과정에는 의미의 탈각과 잉여, 혹은 변형이라는 것이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夷’/‘barbarian’도 그러한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이 보여주는 것은 적지 않은 번역어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주권상상과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근대적 개념이 정치학적 혹은 사회학적으로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19세기 제국의 주권상상이나 그 담론의 근거는 결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제국의 주권의식과 그 근거는 대외적인 팽창 혹은 식민지적인 확장을 통해서 순환적으로 완성되는 과정이다. 이는 이미 확립된 근대문명의 서구와 그렇지 못한 비서구의 조우라는 19세기의 세계화과정의 이미지가 수정될 필요가 있음을 말해 준다. 제국의 욕망과 주권상상은 자신을 완성시켜줄 타자와 식민지를 필요로 한다.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과 일본, 조선에게 새로운 국제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정한 조건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데 근거가 된 국제법(만국공법)은 그 자체의 보편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오히려 그 국제법의 동아시아 각 국가 언어로의 번역과 그것에 대한 수용에 의해 완성됐다. 즉 국제정치의 기호학적 전환이 말해 주듯, 19세기 서구의 국제적 규범이란 식민지를 포함한 타자에 의한 승인이 적어도 형식적 필요 요건이었던 것이다.

주권상상은 도처에 존재한다. 외교상의 조약이나 국제법의 적용과정뿐만 아니라 종교와 학술, 문화 각각 방면에서도 항상 존재하며 수시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출몰하고 있다. 저자는 19세기 여성 선교사의 중국에서의 활동을 통해 주권 콤플렉스가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빅토리아 여왕이 아프리카 추장에게 성경을 선물하는 것을 모방한 듯한 재중 서구의 여성 선교사들의 자희태후에 대한 신약성서 증정의식은 당시 제국의 주권상상 뿐만 아니라 당시 서구의 여성참정권 운동을 통해 대두되던 여성의 주권의식 등이 서로 얽혀 있다. 또 중국 최초의 근대적 문법서로 불리는 마건충의 『마씨문통』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저자는 당시 인도유럽어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문법주권이 어떻게 형성됐으며, 역으로 또 문법주권의식이 주권 콤플렉스로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사례의 분석은 서구의 주권상상이 처음부터 서구(혹은 언어적으로는 인도유럽어)에 국한되지 않고 비서구사회의 타자를 통해 이뤄졌음을 말해 주고 있다.

콜로니얼 사회문화 분석의 전형적인 사례
서구에서의 여성의 지위 혹은 주권의식은 비서구지역에서 서구여성의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 특히 비서구 지역의 남성이나 군주에 대한 우월의식을 통해 상상됐다. 그러나 이러한 타자의 거울을 통한 자기주권 상상은 거꾸로 그 주권상상을 위협하는 근거로 작동하기도 했는데, 자희태후는 생일선물로 받은 서구 여성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성경에 대한 답례로 서구와 중국에서의 남성에 대한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활용해 여성들에게 바느질감을 하사함으로써 자신과 서구 여성 선교사들 간의 신분상, 지위상의 현격한 차이를 보여줬다. 또 마건충은 서구의 문법학을 바탕으로 중국어도 인도유럽어 못지않은 문법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인도유럽어 보편성과 우월성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런 서구와 중국사이에 상호조응적 주권상상 혹은 주권 콤플렉스는 제국의 주권담론 자체가 이중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 역사학계에서의 식민지 근대성과 내발적 근대성의 논의는 바로 19세기 서구 제국의 주권상상을 중심으로 한 담론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마건충의 『마씨문통』이 인도유럽어의 보편주의에 도전하려다 오히려 인도유럽어족의 강세담론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처럼 말이다.
문제는 서구와 비서구가 상호 타자로 하여 구성된 근대의 보편성이 우리의 의식과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황제』의 보좌가 말해주듯, 제국의 주권상상은 19세기 한때 혹은 구제국주의 시대의 현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남아 여전히 우리의 사유와 감각, 욕망으로 현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콜로니얼 사회문화분석의 전형적인 연구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기호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문학비평과 비교문화분석을 해오고 있는 저자는 이제 그 관심을 정치학과 역사학, 젠더에서 미디어 비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19세기 제국의 유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적실천을 진행하고 있다.

 

차태근 인하대·중국언어문화학과
주요연구는 중국의 근대 학술사상이며, 저·역서로 『중국문명의 다원성과 보편성』(공저),  『동아시아 근대를 번역하다』(공저), 『중국의 충격』(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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