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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의 'ARCing' 제대로 설계하자
교수의 'ARCing' 제대로 설계하자
  • 이덕봉 동덕여대 명예교수·심리언어학
  • 승인 2016.03.2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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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이덕봉 동덕여대 명예교수·심리언어학
▲ 이덕봉 동덕여대 명예교수

해마다 2천여 명의 교수들이 정년을 맞아 현직을 떠나고 있다. 퇴직 교수들의 일상을 보면 대부분이 취미활동이나 학원가에서 다양한 예능을 익히는 것으로 소일한다. 교육, 연구, 봉사의 세 가지 본분에 충실한 나머지, ‘ARCing(After Retirement Careering)’ 설계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학문공동체로 부터 단절돼 버린 데에서 오는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함일 것이다. 명예교수의 경우에는 2년 남짓 강의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하지만 후진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 같아 눈치도 보이고, 그동안 주어지던 연구 공간과 연구 지원도 모두 끊기게 돼 당황한다.

활용 가능한 고급 두뇌 그룹의 방치는 개인적인 손실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손실이기도 하다. 사회로서는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거액의 비용을 들인 최상의 투자 성과를 방치하는 셈이고, 개인으로서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달성한 최상의 장기를 더 이상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한 고급 두뇌들이 퇴직에 대한 고정관념을 따라 취미생활로 소일한다는 것은 사회로부터 최상의 투자 혜택을 받은 수혜자가 취해야 할 사회 환원의 의무와 기대를 저버리는 무책임의 소치이기도 하다. 대학 초임 연령이 40세를 넘기게 되면서 앞으로는 재직기간 30년을 채우기도 어렵게 됐는데, 재직 기간보다 더 긴 퇴임 후 30년을 마냥 쉴 수는 없는 일이다.

‘ARCing’을 설계함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일은 정년이란 대학이라는 직장으로부터의 정년일 뿐 학자라는 직업의 정년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 정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선별적으로 문호를 개방하는 대학들이 증가하고 있으므로 해당 대학에서는 우선 그 기회를 잡을 일이다. 2010년부터 경희대가 선별적으로 정년을 70세로 연장한 것을 비롯해 서강대, 울산과기대, 이화여대, 한양대, 카이스트, 포스텍, 건양대 등이 여러 형태로 정년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정년 연장이 제도화되지 않은 대다수 대학의 경우, 퇴임 예정자는 ‘ARCing’설계의 방향을 퇴임 후의 작업 능률에 맞춰 조정해야 한다. 현재의 연구 분야 중 가장 자신 있는 영역으로 한정하거나, 연구 방향을 선택적으로 특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구를 위한 공간과 지원이 모두 끊긴 상태일지라도 학자의 연구와 저술활동은 계속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 작업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과 발표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의 전공 분야와 동떨어진 새로운 학습형 ‘ARCing’설계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새로운 분야를 기초부터 익혀본들 고령상태에서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사회에 환원할 수 없는 배움은 무의미한 소일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년퇴임 후의 삶은 퇴임시점 까지 하던 것 중에서 가장 잘하는 일을 중심으로 ‘ARCing’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직 정년 연장을 제도화 하지 않은 대학의 경우 재취업의 기회를 놓친 교수들을 위한 인력 활용방안의 수립이 필요하다. 교육과 관련해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퇴직자들을 입시업무, 취업지도, 상담업무, 대학평가 업무, 각종 자문위원, 논문 심사, 특별강연 등에 활용하는 것은 대학 행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퇴직 교수에게도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특히 학교 행정상의 잡다한 업무에 교수들이 동원되면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에도 일조하게 될 것이다. 이화여대의 이화학술원 운영 사례처럼 우수 원로 연구자 지원 프로젝트는 매우 좋은 사례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퇴직교수의 연구와 강의 및 출판을 지원할 수 있고, 자치단체와 연계해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도 가능할 것이다.

국가는 연금수급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높아진 신체 정년에 맞춰 모든 직종의 정년 연장 내지는 폐지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80년대 중반부터 정년 폐지가 시작돼 1994년 법제화하면서 정년제를 완전히 폐지했다. 평균수명이 60세에도 못 미치던 70년대의 퇴직 연령 기준을 평균 수명 80세를 상회하는 현대에도 적용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처사다. 대학의 정년제 연장과 폐지 등 합리적인 정책 수행은 낮은 교원 충원율을 높이는 길임과 동시에, 첨단지식 생산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이끌어 갈 고급 두뇌 그룹의 연구 의욕을 북돋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덕봉 동덕여대 명예교수·심리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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