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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경제번영의 원천은 ‘혁신의 문화’에 있었다
근대 경제번영의 원천은 ‘혁신의 문화’에 있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3.15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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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대번영의 조건』 에드먼드 펠프스 지음|이창근·홍대운 옮김|열린책들|576쪽|25,000원

펠프스는 번영의 원천이 평범한 개인들의 무수히 많은 ‘작은 혁신’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몇몇 탁월한 혁신이 아니라 비록
작더라도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는 작은 혁신이다. 대번영, 즉 대중 번영이란
오직 이 요건이 충족될 때만 가능하다.

 

“국가들은 최근 수십 년간 그들을 짓누른 전통적 가치관의 부활을 막아내고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향해 과감히 나아가도록 북돋은 근대적 가치관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는 국가들만이 과거의 빛나는 성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에도 다 함께 번영할 수 있을 것인지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200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컬럼비아대 정치 경제학 교수 에드먼드 펠프스(Edmund Phelps)가 이 책의 저자다. 원제는 ‘Mass Flourishing: How Grassroots Innovation Created Jobs, Challenge, and Change’(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펠프스는 이 책에서 무엇이 국가의 부를 만드는지, 그리고 그 번영의 원천이 왜 오늘날 위협받고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주장을 제시한다.

펠프스는 혁신의 문화, 근대적 가치의 추구가 번영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번영이란 단순히 경제적 풍요를 뜻하지 않는다. 이에 더해 다수의 개인들이 도전하고 모험하며, 일로부터 만족을 얻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좋은 삶’을 영유하는 것이 바로 번영이다.
19세기에 출현한 근대 경제는 이전의 상업 자본주의와는 달리 개인의 혁신을 장려하는 문화와 제도를 정비했고, 따라서 전에 없는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번영이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오늘날 번영은 수십 년에 걸쳐 약화되고 있다. 이 ‘약화’의 요인을 설명하는 펠프스의 논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경제의 기반이 되는 근대적 가치관이 공동체와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시하는 전통적 코포라티즘적 가치관의 부상으로 위협받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번영의 기원으로서 ‘근대 경제’
펠프스가 주목한 번영은 그 기원이 근대 경제에 있다. 펠프스는 자본주의 대신 근대 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번영의 조건을 두루 갖춘 경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영국 등의 ‘자본주의 경제’를 지칭한다. 상업 자본주의에서 진화한 근대 경제는 19세초부터 놀라운 번영을 구가했다. 물론 이러한 ‘놀라운 번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에 따른 생산성 도약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펠프스는 실증 지표를 통해 이 같은 설명이 사실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공정과 이론의 개선에 따른 생산성의 개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번영의 핵심 요인일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저자의 설명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번영의 원천이 평범한 개인들의 무수히 많은 ‘작은 혁신’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몇몇 탁월한 혁신이 아니라 비록 작더라도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는 작은 혁신들이다. 대번영(Mass Flourishing), 즉 대중 번영이란 오직 이 요건이 충족될 때만 가능하다. 예컨대 저자는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실제로 경제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지적하는 대신, 기층 대중으로부터 일어난 거대한 혁신의 파고, 즉 ‘자생적 혁신’이 경제에 역동성을 불어넣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증은 그렇다면 근대 경제가 어떻게 ‘자생적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었냐가 된다. 상업 자본주의 시대의 혁신은 몇몇 귀족과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으며, 이는 국가를 부유하게 했지만 대중의 부에는 기여하지 않았다. 19세기 초는 근대의 출발이었다.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로 명명한 이 시기에 개인의 성장과 참여를 강조하는 ‘근대적 가치관’이 점차 보편성을 확보했다. 참정권이 확대되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회사법 등의 상업 및 금융 제도가 경제 참여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전과 모험, 혁신을 강조하는 ‘문화’가 힘을 얻었다. 근대는 개인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상에 나아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이 일에 탁월했던 몇몇 국가에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혁신이 잇달았고, 마침내 번영이 도래했다는 것이다(저자의 이 같은 접근에서 재미있는 대목은 예술(특히 음악)과 철학의 앞선 진보를 눈여겨봤다는 점이다).

근대 경제의 쇠락과 번영의 상실
이렇게 잘 나가던 근대 경제는 어째서 1960년대 이후 쇠락하기 시작했을까. 근대 경제 내부의 역동성을 헤치는 구조적 문제들을 살핀 펠프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기업 규모의 거대화’는 의사 결정 구조의 효율성을 저해함으로써 역동성을 훼손했다. ‘단기 성과주의’와 경영자 그룹에 대한 ‘과도한 보상’은 기업 경영의 장기적 전망을 어둡게 했다. 그리고 ‘돈에 대한 탐욕’도 이러한 쇠락에 일조했다. 특히 주식이나 투기를 통해 수십억씩 버는 사람들이 출현하면서 ‘돈에 대한 탐욕’은 이제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한다. 그는 이러한 문화가 혁신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좀 더 궁긍적인 쇠락 원인은 없을까. 저자는 외부적인 것을 지목한다. 그는 미국 경제(즉, 한때 가장 선도적이었던 근대 경제)가 역동성을 잃어버린 주된 원인을 코포라티즘에서 찾고 있다. 프론티어 정신으로 대변되던 미국의 경제적 역동성은 코포라티즘이 강조하는 가치들이 도입됨으로써 힘을 잃었다.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최대한 ‘개입하는 국가’, 네오코포라티즘적 관리형 국가에 가까워진 미국은 이제 규제를 통해 기득권을 보호하고, 과도한 보조금과 사회 복지로 혁신 의지를 저해한다. 그래서 미국 경제는 결코 더 이상 근대 경제에 가깝지 않다.
과거의 미국 경제 성장에 대한 과도한 향수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저자의 진단에는 두 개의 철학적 기둥이 내재해 있다.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철학적·윤리적 관점에서도 근대 경제가 우월성을 지녔다는 게 그의 주된 생각인데, 그가 내세운 기준은 두 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후예들이 논의해 온 ‘좋은 삶’, 그리고 롤스가 『정의론』에서 피력한 ‘정의로운 경제’가 그것이다.

실상 정의로운 경제를 규정하는 데 핵심은 ‘분배’ 문제에 있다. 사회적 소득은 어떻게 분배돼야 하는가. 저자는 다양한 논쟁들을 검토하는 한편으로 자신만의 원칙을 세운다. 그는 ‘좋은 삶’, 즉 번영에 기여하는 분배가 곧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근대 경제가 번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행해지는 분배는 정의롭다. 반면, 근대 경제의 번영을 저해한 코포라티즘적 분배는 불의로 규정된다. 예컨대 최저 임금에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극단적인 양극화를 해소하는 분배는 더욱 많은 경제 참여자들이 ‘좋은 삶’의 조건을 갖추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정의로울 수 있다. 반면, 코포라티즘의 영향을 받은 ‘사회 부조’의 확대는 매서운 비판을 받는다. 펠프스는 경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지’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부를 분배하는 것이 어떤 관점에서도 정의롭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게 수많은 인구를 경제로부터 이탈시켜 역동성을 심대하게 저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부제 ‘모두에게 좋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 자신의 해답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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