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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는 개인 행동의 성숙에서 나와 … 사회적·정치적 뒷받침 지니고 있어야”
“윤리는 개인 행동의 성숙에서 나와 … 사회적·정치적 뒷받침 지니고 있어야”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3.09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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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_ 1강.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윤리와 인간의 삶’

 

시즌3 강연 전체 주제는 ‘윤리와 인간의 삶’이다. 지난 5일(토) 진행된 첫 강연은 전체 강연 프로그램의 기조 강연이라 할 수 있는 김우창 교수의 「윤리와 인간의 삶」으로 진행됐다.
김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 하버드대에서 수학했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 고려대 영문과 교수, 고려대 대학원장, 서울국제문학포럼 조직위원장, 동아시아포럼 한국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6년부터 계간지〈세계의 문학〉(민음사)의 책임편집을 20여 년 맡아 제3의 담론창출을 모색했고, 1999년부터 2009년까지 문예지 〈비평〉(생각의 나무)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서 여러 매체에 칼럼과 평문을 게재하며 왕성한 저작활동 및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김우창 전집 1~7권』(2015), 『깊은 마음의 생태학』(2014), 『체념의 조형』(2013), 『김우창 전집(전5권)』(2006), 『풍경과 마음』(2006), 『행동과 사유』(2004), 『경계를 넘어 글쓰기』(2001), 『심미적 이성의 탐구』(1992),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메시스』(공역·1990) 등이 있다. 팔봉비평문학상(1993), 대산문학상(1994), 금호학술상(1997), 한국백상출판문화상(2000), 인촌상(2005), 제11회 경암학술상(2015) 등을 수상했다.
빼어난 심미적 이성주의자인 그가 오랫동안 공들여 사유한 것도 윤리적 삶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무엇을 말했을까.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시즌2 ‘고전읽기’ 중 미당 서정주에 관해 강연하고 있는 김우창 교수.

오늘날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흔히 경제와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물질적 조건과 집단 조직의 외면적 조건에 한정해 생각하는 것은 삶의 많은 측면을 간과하게 한다. 놓치는 것 중 하나가 윤리 문제다. 인간 존재를 보는 눈이 물질적인 것에 집중됨에 따라, 윤리나 도덕은 물론 의식 또는 마음이 오로지 그에 따르는 종속 변수가 된다. 물질적 차원에서 능동적인 반응의 총체―그리고 다시 그 자체가 대응의 대상이 되는 것이 경제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에서 인간 행동을 집단화하는 것이 정치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제와 정치 그리고 사회의 일정한 구조적 질서 속에 있고, 그것을 이루는 착잡한 관계망에 묶여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큰 틀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이 큰 틀 안에서 일어나는 시시각각의 현실이다. 그것은 사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건으로서의 인간의 삶과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뤄진다. 그리해 이 움직임을 더 세부적으로 조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에 관계되는 것이 윤리다. 이 윤리는 삶 전체를 다스리는 틀이다. 그것은 삶의 규범이다. 윤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실 하나는, 그것이 사람의 삶에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것이면서도 의식화되고 규범이 되며 인간 행동의 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의식화는 경험적 사실에서 시작해 일반화, 더 나아가 이론화가 된다. 이 과정은 최종적으로 경험을 초월하는 선험적 구조와 형식에 이른다.

인간의 삶에서 윤리가 갖는 의미는 이처럼 거창한 철학적 인간론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삶의 현장에서 그것은 문법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활용되는 언어이며 감정의 흐름이다. 말할 것도 없이 집단적 삶의 질서 유지에 궁극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법, 즉 법의 강제력이다. 그러나 어찌 사람의 모든 움직임이 그것으로만 통제되겠는가. 법은 삶의 여러 작은 일들에 자연스럽게 들어 있는 느낌이 제도적 한계로서 표현된 것이다. 그보다 조금 더 유연한 표현이 윤리 규범이다. 그러면서 그 뒤에 있는 것이 윤리 또는 윤리로 명증화 될 수도 있는 인간적 감성이다. 윤리의식은 사회적 존재 그리고 환경 속의 인간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에 두루 작용한다고 또는 작용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공중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줄을 서거나 교통 규칙을 지키거나 또는 그 규칙을 집행하려 할 때만이 아니라, 사회와 여러 인간 공동체를 보다인간적 진실에 충실하게 하려 할 때 움직이고 있어야 할 원리다.

우선 확인해야 할 것은 윤리의식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러 문화 전통에는 인간 심성의 기초에 그러한 의식이 있다는 생각이 있고 그것을 함양하기 위한 여러 방책이 제시돼 있다. 많은 경우 감정과 이성은 일체적으로 작용한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사람의 마음은 일체성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늘날의 사회에서 윤리의식의 보강이 필요하다면, 어느 쪽이 됐든 간에 착함을 키우는 마음의 근본적 성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칸트와 마사 누스바움 그리고 동정심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사회성에 연결된 도덕적 감수성이 단순히 감정에 머물 때, 그것은 튼튼한 보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감정은 변덕스러운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에 대하여 칸트의 ‘실천이성’ 개념은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誘發되는 감정으로부터 해방시켜 도덕과 윤리를 튼튼한 법칙의 차원에 올려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의 비판철학에서 도덕과 윤리는 사실적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근거를 밝히려는 시도의 일부다. 말할 것도 없이 『순수이성비판』은 사실적 인식의 비판적 검토를 시도한 主著인데 비해, 『실천이성비판』은 도덕과 윤리 문제를 다룬 주저다. 삶의 현장에서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많은 경우 이성보다는 감정이다. 그리고 감정 자체도 인식론적 의미를 갖는다.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의 삶에서 감정, 특히 그것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동정심 또는 자비심의 역할을 옹호하고자 하는 철학자다. 그는 『생각의 屈起: 감정의 인지력』에서 행복한 삶을 위해 감정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양상에 대해 논의한다.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길게 논하고 있는 것은 인간 감정의 순치 역정이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능이 있는 동정심 또는 자비심(compassion)이다. 누스바움의 해석으로는, 스피노자에게 있어 연민과 동정심(misericordia)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니까 그가 감정에 대해 하는 말, 이성의 절제 하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연민과 동정 그 어디에도 해당된다. 이 감정론으로부터 스피노자의 이성적 상승에 대한 누스바움의 비판이 시작된다.
누스바움이 검토하는 지적·예술적 상승의 전범들 가운데에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있다. 음악은 무엇보다도 감정에 호소하는 예술이다. 동시에 극히 합리적인 형식 구조 속에 감정을 거두어들인다. 그리하여 음악은 감정과 이성 또는 형상의 접합점에 존재한다. 이 접합에 역점을 두면서도 감정의 역할을 강조하는 누스바움이 말러의 음악을 분석하는 것은 그럴싸하다. 『생각의 굴기』의 말러론이 추적하고 있는 것은 주로 그의 교향곡 제2번에 드러나는 상승과 하강의 이중적 움직임이다. 개성이 있고, 동정심으로 표현되는 보편적 인간애 그리고 그것의 밑바탕이 되는 정신성 또는 靈性을 갖춘 존재, 이것이 말러-누스바움이 보는 인간의 참모습이다. 누스바움은 현세 그리고 현세 그대로의 승화를 말하는 말러의 이러한 비전을 여러 ‘상승’의 기획 가운데 ‘가장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되풀이하건대, 누스바움이 말하는 상승은 강조점을 감정에 둔다. 특히 동정심, 자비심이 관심의 대상이다. 동정심의 사회적 의미를 인정하고 그것의 확산을 돕는 것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이러한 동정심 그리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감정들이 일정한 정화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정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하나가 이성이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 필요한 것은 이성적 규범화다. 이 규범은 윤리가 되고, 보다 臨界的인 사고에서는 법이 되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윤리의 규범화는 사람의 삶에 작용하는 기본 원리를 밝혀주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윤리의 규범화 원리는 무엇인가. 이것을 위해서는 다시 칸트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윤리 감정의 空洞化 상태에서 규범은 오로지 ‘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명령으로 경직화된다.

이에 대해, 필연성에 근거한 원리는 규범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 자유로운 변주를 허용한다. 도덕규범의 필연성은 칸트에게 자연법칙의 필연성에 대응한다. 자연과학은 감각의 세계를 다루지만, 그것을 넘어 선험적(a priori) 원리의 체계에 기초한다. 이 선험적 체계를 밝히려는 것이 ‘자연의 형이상학적 과학’이 된다.칸트를 통해 우리가 상기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과 윤리의 규범이 인간의 많은 행동에서 분명한 지표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순전히 개인의 내면이 지닌 순수성만이 아니고 사회적 조건이 그러한 것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조건이 그러하고 또 사회 속에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이 일반적 규범이 돼야 인간 내면에도 형성된다는 말이다. (칸트가 다시 이러한 사회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확립돼 있지 않더라도, 인간 사회에는 윤리적 성격을 가진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감정적 자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정화되지 않는 한, 드러나 있든 감춰져 있든, 여러 부정적인 이기심과 자기주장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성적 정화가 필요한데, 규범의 명증화는 개인의 일이기도 하고 인간적 사회이기를 바라는 사회 전체의 과제이기도 하다.
 

윤리의 성숙성과 정치적 삶의 성숙성
이제 조금 사소한 사례들을 들어본다. 오늘날의 신문에 보도되는 많은 사건은 참으로 크고 작은 윤리가 소멸돼버린 이 사회가 인간적인 사회로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금치 못하게 한다. 공직자의 부패와 거짓과 야욕은 다소 차이는 있어도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그런데 자주 보도되는바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어떤 참혹한 일들은 사람 사이를 맺어주는 본래부터 주어진 사랑, 동정심이라는 게 과연 있긴 한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것이 왜곡된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 오늘날 우리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러한 혼란한 사건들이 어떻게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기란 물론 쉽지 않다. 윤리는 개인행동의 성숙에서 나오고 그것은 사회적, 더 나아가 정치 구성의 뒷받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즉 윤리의 성숙성은 정치적 삶의 성숙에 이어져 있다. 사랑, 윤리, 법은 긴장과 일치의 관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람의 심성 깊숙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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