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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과 쟁점 : 지중해 문명에서 대항 총체성 모델 읽어낸 ‘지중해의 다양성과 통일성’ 학술대회
동향과 쟁점 : 지중해 문명에서 대항 총체성 모델 읽어낸 ‘지중해의 다양성과 통일성’ 학술대회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2.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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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07 10:20:52

지중해 문명을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대항 총체성’의 모델로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눈길을 끌고 있다. 총체성에 대항하겠다는 주장도 그렇거니와 국내학계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이슬람 문명을 품고 있는 지중해 문명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중해 문명은 근현대의 세계사에서 거의 잊혀진 역사가 아니었던가. 이점에서 지난 22일부터 이틀간 ‘지중해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는 중요한의미를 갖는다. ‘세계화’라는 렌즈 대신 ‘지중해’라는 렌즈를 눈앞에 두기를 주문했고, 바뀐 렌즈를 통해 지중해의 잊혀진 역사를 부활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는 부산외국어대 지중해 연구소(소장 박상진 이태리어과 교수)가 주최했다. 국내에서 지중해 문명을 연구하는 유일한 연구소이자 1998년에 개관한 신생연구소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가 9번째 학술대회임을 생각한다면, 국내 지중해 문명의 연구 토양이 아직은 척박함을 알 수 있다.
행사를 준비한 박상진 교수의 의도는 다소 도발적이다. “세계화라는 무지하고 둔감한 전체성의 테러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할 때 지역적 정체성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지중해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접근하는 작업은 큰 의미가 있다”라는 것. 박 교수는 “근대 이전까지는 다양한 역사와 지리, 민족, 문화의 단위들이 통일성을 유지해온 지중해는 소위 ‘대항 총체성’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항 총체성’은 ‘counter totality’의 번역어로, 총체성의 모습으로 진행되는 세계화에 저항하는 새로운 가치를 의미한다. 지역적 특성을 간직하면서 통일성을 이루는 세계화의 모델을 구상해 보겠다는 당찬 의도를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델을 지중해 문명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주장이다.

‘지중해학’의 성립 기반 검토 요구
이번 학술대회에는 총 13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우선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의 기조발제 ‘지중해문명, 그 이해와 연구’가 눈길을 끌었다. 한동안 학계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정 교수의 발표문이라 반가운 마음도 더했다. 정 교수는 “지역단위로서의 지중해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승화시켜 ‘지중해학’이라 새로운 학문을 일궈내게 하는 당위성과 가능성은 있는가”라고 묻는다. 지중해 문명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지중해학’이 새로운 학문의 위치로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점검한 것이다.
순간 한가지 의문이 든다. 어느 지역에서나 문화간의 이종교배는 존재하는데 왜 하필 지중해의 다종성을 문제삼을까. 그 이유는 지중해의 문명이 지리학적으로 남유럽과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다원적인 문명의 융합에 의해 생성된 복합적 해양문명이기 때문이다. 즉 다종의 문명이 복합적으로 존재하지만 밀접한 상관성을 가지고 공생공영하는 문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중해 문명에서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지닌 문화의 전범을 찾으려는 시도도 설득력을 가진다.
정 교수는 “지중해 문명 속에서 서구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공생하는 동시에 다른 문명으로 존재했지만, 서구문명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이질성을 강조하는 역사가들은 필요에 따라 이슬람 문명을 자신들의 역사서술체계 속에 끌어들였다가 또 제쳐놓은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했다”라고 지적했다. 서구는 물론 우리의 ‘서양사’에서도 그 서술체계 속에서 고대편에는 ‘오리엔트(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중세편에는 ‘이슬람 사회’가 자리잡고 있지만, 근현대사편에서는 아랍-이슬람 세계를 아예 제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사 서술을, 또 그로 인한 총체성의 횡포를 따끔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다양성의 공존’이 ‘대항 총체성’의 핵심
이밖에도 지중해권 문명의 역사, 생태학, 지리 등 전반적인 연구 발표가 이어졌다. 변기찬 부산외국어대 교수(역사학)의 ‘브로델과 지중해 혹은 브로델의 지중해’를 비롯해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의 ‘터키와 동부 지중해의 해상교역’, 윤명철 동국대 교수(역사학)의 ‘동아시아의 지중해적 성격과 역사적 의미’, 정인철 부산대 교수(지리교육학)의 ‘지중해의 지리적 특성’ 등 지중해의 문명이 품고 있는 변화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지중해 문명을 ‘대항 총체성’의 전범으로 제시하겠다는 문제의식을 학계 공통의 과제라고 보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박상진 교수는 “학술대회에서의 몇몇 논문들에서는 지중해 문명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에 그쳐 고르지 못한 수준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아직 그 역사가 짧은 지역학 내에서도 미처 자리잡지 못한 지중해 문명권 연구라는 것은 감안한다면 이 역시 때 이른 아쉬움이 아닐까.
‘다양성의 공존’을 꿈꾸는 학자들이 가야할 길은 아직 멀다. 아직 지중해 연구는 지역학 내에서 명칭을 가진 ‘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문명이 공존한다는 특성 때문에 통일성을 가진 지역으로 평가받지 못한 원인도 있고, 또 지역학 내부의 관심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첫걸음을 내딛는 지중해 문명 연구가 그들의 가설대로 ‘대항 총체성’의 전범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또 한가지,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보안해 지중해 총서로 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가까운 시일 안에 첫 번째 성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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