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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나를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
세마나를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
  • 권오대 포스텍 명예교수·전자전기공학
  • 승인 2016.02.2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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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권오대 포스텍 명예교수·전자전기공학

한신 1군사령관이 나의 '이기자' 사단사령부를 방문 시찰했던 때는 작전처 작전과장(대위)이 그 전 날 준 지시를 따라서, 영화간판 그리다가 입대하여 뽑혀온 차트병들이 투명 포일 위에다 밤새도록 도식하고 단어들을 또박또박 그렸다. 다음날 작전참모(중령)는 브리핑룸 스크린 앞에 서서 현황을 설명했다. ROTC 소위인 나는 스크린 뒷방에 숨어서 그의 설명 템포에 맞춰가며 OHP 위의 포일들 이곳저곳을 짚었다. 미군VIP 방문엔 FM용어로 영어문건도 만든다.

다시 몇 달 후 (1970년경) 군단CPX훈련이 화천지역에서 있었다. 사단주력 전투 병력이 산에서 야영하였다. 2미터 높이의 사단 작전현황 차트가 대형 텐트 속 벽에 설치되었다. 갑자기 전 사단에 비상! 수십 명의 미 군사고문단이 몇 대의 헬리콥터에 나눠 타고 현지 시찰하러 떴다는 소식이 사단 지휘부를 경악시켰다. 도착 즉시 훈련현황 브리핑이다. 작전처, 아니 작전참모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현황차트만 짚어대며 영어브리핑을 해야 한다. 영어 문건이 있으면 보고 읽을 텐데 없다. 갑자기 '권소위가 해!' 군대는 명령. 헬리콥터 굉음이 골짜기를 울렸다. 나는 키높이의 포인터봉을 잡고 현황차트를 꼼꼼히 훑었다. 내가 뒷방에서 1년쯤 익히던 현황자료들이다. 왔다. 텐트 속을 꽉 채우고 앉은 수십의 번쩍이는 미국 한국별들 앞에 선 밥풀떼기가 정신없이 소리 질렀다. XX 연대는 이곳, YY 대대는 전선의 저 골짜기, 후방 포병 및 병참보급선은 저기…. 약 30분 후 등골에 땀이 밴 나는 차렷 자세로 'Any question, sir?' 했다. 앞에 앉은 Smith 중장이 고맙다며 빙긋이 웃었다.

1980년대초 일본의 반도체가 세계를 주름잡을 때 샌프란시스코 학회장엔 일본 청장년 전문가들이 세미나를 하고 미국인들이 세미나장을 채웠다. 대개 알듯이 장년의 일본학자는 발음이 엉망이지만 청년들은 나았다. 미국인 청중이 질문을 하면 우스꽝스런 광경이 벌어지곤 했다. 질문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대답이 빗나가고 그럼 질문이 더 꼬인다. 어떤 경우 세미나를 하고 질문을 받으면 그냥 서있다. 그럼 설명형질문을 다시 던지는데 또 답이 없자 '아 됐어'하고 포기한다. 서툴게 영어 세미나를 한 일본 전문가들의 말을 그래도 청중들은 ‘경청’하였다.

1980년대 후반 포스텍 초창기 국내학회를 다녔다. 침침한 OHP 위에 데이터를 얹어놓고 세미나들을 했다. 거의 전부 학생들, 내가 질문을 하면 화들짝 놀랬다. 피차 질문을 삼가는 시대였다. 예쁘게 그리던 솜씨가 90년대 들면서 컴퓨터로 대체되고 2000년을 기준으로 PPT가 세미나 포일을 지배했다. 정적인 PPT포일 원시시대가 또 진화하여 동영상도 담는 USB시대이다. 풀칼러 전산시늉 자료들이 펼쳐지고 인터넷 연결까지 1분 영화처럼 전개되니 옛날처럼 들으면서 졸아볼 틈도 없고 질문도 많아 좋다. 브레인 fNMR 영상에다 뉴런 액손 신경망들이 우주 은하의 성간구름처럼 찬란하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현란한 세미나기술들과 남의 것 흉내가 아닌가? ‘경청’할만한 주요내용일까? 울긋불긋 찬란한 세미나를 듣고 가끔은 허전하다. 우리사회에 얼마나 허세가 판치는지 겁난다. 겉치레 유행병이 학자들에게 전염된 걸까?

4년간 코넬대의 통계물리그룹에 있었다. Widom/Fisher/Wilson이 주축이던 코넬그룹은 통계물리학의 메카로 1982년 Wilson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 1년 전 35세의 젊은 네덜란드 학자 't Hooft가 초빙되고, 메모지도 없이 약 3시간 복잡한 방정식들을 한 줄 한 줄 분필로 차분히 쓰며 세미나를 하였다. 항상 매주 화요일 1시5분 호수가 보이는 7층 클라크홀에서 수많은 초빙강사가 세미나를 했다. 침묵의 시선만 흐르던 수도원의 강론 같은 그날의 그를 특히 잊을 수 없다. 그는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우리에게도 그가 있을까? 헛된 교육의 암기왕이 아닌, 창의가 솟아나는 혼들이 저렇게 조용히, 그러나 몸서리치는 춤을 출 날이 올까.

권오대 포스텍 명예교수·전자전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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