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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패턴과 정신은 건축물에 어떻게 스며들었을까?
철학의 패턴과 정신은 건축물에 어떻게 스며들었을까?
  • 김 율 대구가톨릭대·서양중세철학
  • 승인 2016.02.1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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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 에르빈 파노프스키 지음|김율 옮김|한길사 |247쪽|22,000원

한국이라는 나라의 일상적 삶의 풍경 몇 가지를 떠올려보자. 아파트라 불리는 집단거주양식, 빽빽한 상가간판과 가도의 깃발들, 적대적 공존이라는 정치권력의 작동방식, 연예산업 아이돌 상품들의 의상과 동작, 정답 체크 연습으로 구성된 학생들의 참고서, 사원연수로 활용되기도 하는 해병대 극기 훈련 캠프, 그리고 필시 독자들도 써보았을 한국연구재단의 각종 문서양식. 이런 삶의 풍경은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과연 이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아마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가 3~400년 후에 되살아나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 또는 동아시아 미술을 연구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미술관 바깥의 이런 자료들에 ‘함께’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흩어져 있는 이 동시대의 자료들을 무엇인가의 ‘기록’으로 간주하고 그 자료들에 기록돼 있는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찾아내려 할 것이다. 생시에 그랬듯이 가상의 미래에 그가 끈질기게 찾아내려 하는 것은, 그가 정초한 ‘도상해석학’의 탐구 대상으로 알려져 있는 저 ‘본질적 의미’일 터.

이 탐구 대상 자체가 수수께끼 같아 미술사학 내부에서 논란도 없지 않으나,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이 현대 미술사학과 문화학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단 확고하고 명료하게 정립한 뒤 정작 그 자신은 ‘도상해석학’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 뿐 만아니라, 도상해석학의 방법론적 핵심 개념들인 ‘본질적 의미’ ‘징후’ ‘기록’ ‘내용’ ‘세계관’ 같은 단어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고딕대성당과 스콜라철학 문헌들만을 놓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고딕대성당의 건축 기법과 세부 구조물의 표현 기법, 그리고 그 변화의 양상과 논리. 또 한편으로는 스콜라철학 문헌양식의 유래와 특징,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고의 어떤 패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이라는 두 문화적 현상이 평행을 이룬다는 단순한 명제다. 물론 이 명제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파노프스키가 1948년 망명지 펜실베니아의 작은 대학에서 학술강연(그 강연원고가 이 책이다)을 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 가까웠다. 이 책의 일차적 가치는 상식으로 통하던, 그러나 상식에 불과하던 이 명제를 충분히 ‘실증적’이면서도 동시에 탄탄한 개념적 토대 위에서 논리적으로 입증해냈다는 데 있다. 그는 그 어느 중세건축 전문가 못지않은 정밀함으로 여러 건축물을 생생히 분석하고 비교한다. 그리고 스콜라철학의 사고 패턴과 정신이 어떤 경로를 통해 그 건축물들에 배어들었는지, 그리고 거기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논리적인 설명의 바탕에는 중세철학사에 대한 그의 깊은 조예가 깔려있다.

중세철학사 연구자인 옮긴이로서는 짧은 분량 안에 스콜라철학의 방대한 흐름을 요령 있게 정리하고 그 정신사적 의미에 대한 논평까지 덧붙인 그의 철학적 역량을 겸허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은 단순한 직관의 소산이 아니다. “모든 내적 유비를 접어두더라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전한 사실 영역에서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은 결코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는 뚜렷한 동시발생을 보여준다. (……) 그래서 중세철학사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재료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은, 그들이 여타의 고려 사항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중세미술사학자들이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과 똑같았던 것이다.”

▲ 랭스 대성당은 아미앵 대성당과 함께 전성기 고딕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철학사학자’가 아니라 ‘미술사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서 이런 식의 분과 학문적 구별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근본 없이 유행하다 ‘창조경제’에 버금가는 주술이 돼 버린 용어를 써서 유감이지만, 본래적 의미에서 ‘학문융합’을 시도한 이가 바로 파노프스키다. 말이 쉬워 융합이지 자그마치 학문을 융합하려면 여러 학문을 섭렵하는 넓은 시야 외에도 필시 그 시야를 하나로 모으는 뚜렷한 원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말하자면, 파노프스키에게 그 원리는 위에서 언급한 ‘본질적 의미’다.

철학전공자로서 미술사전공자에게 훈수를 두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다. 도상해석학의 문제 설정은 파노프스키가 흡수했던 1920년대 후반 독일철학계의 논의들을 자양분으로 한다. 동시대의 학설보다는 옛 시대의 기록에 매료되는 성품 때문에 동시대인에 대한 적극적인 인용을 하지 않았고, 구구한 방법론적 개념들을 동원해 여하튼 이론을 구축해놓으려는 욕심보다 수많은 실물 자료(기록물)를 해석하려는 ‘종합’과 ‘직관’의 열정이 늘 앞섰기 때문에, 이 철학적 연원은 그의 텍스트에 상세히 드러나지 않는다.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에서 파노프스키는 조금 더 도전적인 시도를 한다. 여기에 이 책의 백미가 있다. 그는 스콜라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습성’ 개념을 빌려와서, 한 시대의 다양한 문화 현상들의 내적 유비 또는 평행을 설명해주는 원리로 확장시켜 사용한다. 아퀴나스에게, 그리고 이 개념의 본래 특허권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습성이란 인간 영혼에 속하는 여러 능력들이 유독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또 발휘되도록 하는 각 능력의 ‘구조’였다. 예를 들면, 매사에 따지고 들려는 까탈을 일삼다 보면 한 사람의 지적 능력에는 ‘학문’이라는 습성이 들어서서 추론과 증명을 잘 할 수 있게 되고, 두려울 때 굽히지 않고 소신 있게 행하다 보면 감정적 능력에는 ‘용기’라는 습성이 들어서서 싸움터에서 후퇴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작용의 내용(증명된 결론이 무엇인가, 무엇에 대한 용기인가)이 아니라 작용의 ‘방식’이다. 사람들이 흔히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을 말할 때, 굳이 도드라지지는 않는 그 ‘방식.’ 파노프스키는 습성 개념의 이 요체를 정확히 포착한 후, 그것을 과감히 개인 단위가 아니라 한 시대와 사회 전반에 적용한다. 예컨대 부당하다고 생각하나 맞서기는 어려운 총장의 횡포를 적당히 눈감아주고 그럭저럭 사는 ‘김 교수’의 일상적 삶과 행위방식이 사실은 ‘비겁함’이라는 습성이 발현된 것일 수 있듯이 한 시대의 건축양식과 문헌양식도 뭇 개인들을 아우르는 초개인적 심적 습성의 의식적-무의식적 기록일 수 있다는 뜻이다. 도상해석학이 찾는 예술작품과 문화적 자료 ‘속에’ 몰래 기록되는 바로 그것.

그 본질적 의미의 개념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것의 역사적 형태를 탐지해서 설득력 있게 명명하는 것은 더 어렵다. 이 책에서 파노프스키는 그 일을 한다. ‘명료화’와 ‘일치’가 그가 찾아낸 13세기 심적 습성의 이름이다. 부르디외는 1967년 이 책을 불어로 번역하고 바로 이 대목을 해제하며 파노프스키의 ‘심적 습성’ 개념을 따낸다. 그가 이 개념을 사회학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파트 건축, 깃발 게양, 정치언어 사용, 교육방식과 한국연구재단 서류양식이 행위의 대상이자 주체인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사회적 습성의 작동이 아닐까하는 의심은 분명히 갖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파노프스키에게 배운 것은 바로 이 의심이다.

 

김 율 대구가톨릭대·서양중세철학
필자는 독일 레겐스부르크대에서 중세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양중세철학과 미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왔으며, 저서로는 『서양고대미학사강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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