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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세평] 교수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
[신문로세평] 교수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
  • 강정구 동국대
  • 승인 2001.0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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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6 17:58:42
최근 ‘아줌마’라는 인기 연속극이 등장한 이래 교수사회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 연속극에 비추어진 교수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들이 교수사회를 지나치게 비하하였다고 항변하는 교수들도 있다.

이러한 질타에 대하여 즉자적인 방어적 대응보다는 스스로를 되씹는 자성의 계기를 삼는 것이 교수사회의 자가발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 ‘아줌마’식의 외재적 비판과 아울러 내부인 이기에 내재적 비판을 중심으로 성찰적 비판을 하겠다. 물론 이는 내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 의한 것이므로 일면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상당한 보편성을 가졌음을 확신한다.

지난 학기 서울의 아무개 대학에서 일본인 졸업생에 대한 성추행사건으로 중징계를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같은 전공의 외부 교수들이 ○○학자연대라는 이름아래 집단적인 구명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평소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를 위한 서명에는 눈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교수들이 대거 동참했다. 그 유명하다는 ㅅ 대학 동기동창이 중심이 되었다. 성희롱이나 추행문제는 학문적으로나 인권차원에서 지구촌의 보편적인 담론이고 한국사회에서도 여성부의 신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장 예민한 쟁점이다. 그런데도 바로 이러한 성문제를 중요 학문의 내용으로 삼고 있는 ○○학 전공 교수들의 대다수는 탄원서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에 줄줄이 동참했다. 어떤 나이든 교수는 필자에게 전화까지 걸어 그 정도가 성추행이면 자기는 몇 번이고 성추행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일부교수는 한국여자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는 식이었다.

동료교수에 대한 온정주의는 피해 학생에게는 비정주의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같은 전공, 같은 그 유명한 ㅅ대학 동기동창이기 때문에 서명을 한다면 필자의 속 좁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것은 분명히 패거리주의이다. 그것도 지극히 우연의 결과인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이라는 연줄에 매달린 학벌패거리주의이다. 교수사회와 지식인 자신을 여지없이 비판하여 한국 지식계에 신선한 청량제 역할을 한 강준만교수가 그럴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바로 이러한 학벌연고와 무관한 대학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패거리주의가 판치는 한 학문의 발전은 없다. 비판과 논쟁
의 토양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교수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이러한 연고주의가 판을 친다. 그래서 서울대학교를 폐지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아줌마’에서 나오는 그 장 교수는 아주 저급한 수준의 교수(학문)신비주의와 교수(학문)비속주의를 넘나들기에 사람들의 비웃음을 더욱 자아낸다. 우리 주위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흔히들 이러한 모습을 접하곤 한다. 학문이란 속세와 떨어진 고고한 높은 곳에 앉아 초월한 입지에서 연마해야하는 것으로, 또 학문을 마치 수도승의 철학적 깨달음으로 여기곤 한다. 세상사와 유리된 학문주제를 택하는 것은 구체적인 역사현실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추상적인 학문은 대개가 학문자체를 위한 학문으로 지식인 집단의 특권을 장식하는 장식물로 전략하기 십상이다. 여기에 범인들은 감히 접하지 못하는 학문의 신비화라는 장막이 쳐진다.

신비화된 학문은 일상생활의 애환과 고통에서 시달리고 몸부림치는 수많은 민중들의 절규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아니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것은 세속적인 것, 그래서 하찮은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묘하게도 학문신비주의와 학문비속주의는 서로 공존하면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이 모습에서 저 모습으로 오가곤 한다. 학생과 일반대중에게는 자기의 권위와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치 학문이란 게 고고하고, 신비스러운 것이고, 이런 신비스런 일을 담당하는 사람 역시 보통사람이 아닌 저 높은 곳의 사람으로 보여지기 위하여 안달이다.

또 다른 한편 정계나 재계의 고위층 등 소위 권력 앞에서는 조금 전의 학문신비주의는 온데 간데 없고 온갖 교언영색의 모습으로 자기와 학문을 비속화하기에 급급하다. 아마 신비주의와 비속주의가 서로 혼재하여 이 색깔, 저 색깔로 수시로 표변하는 대학교수들이 판치는 교수사회니까 ‘아줌마’는 결코 가공물이 아니라 교수 사회사를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교수사회가 온통 이러한 장 교수와 같은 패거리가 득실거리는 복마전은 아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보통사람의 삶의 현장을 누비면서 이론과 실천, 대중과 학문, 일상생활과 학문의 결합 등을 꾀하고 있다. 이들의 삶과 직결된 생동적이고도 세속적인 학문에 대한 정열과 보통사람에 대한 애정이 결합하여 맺어질 값진 열매들이 학문계를 어지럽히고 있는 신비주의와 비속주의를 어느 정도 씻어내고 있다. 많은 교수들이 ‘아줌마’를 계기로 자기 교정력을 발휘하여 이러한 대열에 동참하였으면 한다. 그러면 제2탄의 ‘아줌마’는 우리 교수들에게 자괴감 아닌 뿌듯한 자부심을 가져다주는 연속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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