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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논문 제출도 미루면서 집필
草原이 부르는 소리에 가슴 떨렸다”
“박사논문 제출도 미루면서 집필
草原이 부르는 소리에 가슴 떨렸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2.02 17: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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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기행’ 2년 연재 마친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교수
▲ 연호택 교수는 충청도에서 났다. 한국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준비 중에 있다. 가톨릭관동대에서 30년 가까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30여 년 세상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등이 있다.

중국 감숙성 기련산맥 일대에서 활동하던 월지가 흉노에 몰려 서천하게 된
것이 동서양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전 인류 역사의 판도를 바꾼 대이동이 월지의 서천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고, 문명의 교류가 촉발됐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구르게 했다.

 

“중앙아시아는 인문학적 탐구의 보물 창고다. 중국이 오랑캐라고 불렀던 유목민들이 이곳의 주인이었다. 스키타이를 필두로 월지, 흉노, 오손, 선비, 유연, 돌궐, 카라키타이 등이 시대별로 중앙아시아 초원의 문명을 이끌었다. 이들은 결코 문명의 주변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의 것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것을 수용할 줄 알았다. 동서양 문화의 교류는 이들이 있어 가능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흥망성쇠가 유럽 역사에 변화를 가져왔고 아시아 제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인종의 혼혈과 문화의 혼융이 이들의 선물이다. 나는 중앙아시아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 야생마가 돼 중앙아시아 인문학기행을 썼다. 때로 창공을 나는 독수리가 되기도 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고단한 삶이 있었다. 더러 기쁨도 있었다. 사는 일은 그런 것이다.”

지난 1월 12일 <교수신문> 814호에 실린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교수(영어학, 사진)의 ‘중앙아시아인문학기행’ 마지막 회의 끝 부분이다. 연 교수는 2013년 12월부터 2년에 걸쳐 55회에 이르는 ‘인문학기행’을 주파했다. 영어학자인 그가 중앙아시아 지역의 문화와 삶, 역사와 운명을 나그네 길의 시선으로 읽어낸 데는 그의 역마살 같은 여행 욕망이 깊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어학 전공자로서 ‘중앙아시아사’라는 역사 연구에 관심을 둔 지적 배경도 한 몫 한다. 원래 그는 올 2월 중앙아시아사 연구로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학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그의 학위일정에 차질을 준 것은 다름아닌 ‘중앙아시아인문학기행’이다. 도대체 ‘紀行記’가 뭐길래 그는 박사논문까지 미루고, 낯선 사람들의 삶과 문화의 냄새에 이끌렸던 것일까. 연재를 마치고 출판사로 원고를 넘긴 연호택 교수를 지난달 27일 만났다.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2년에 걸친 연재를 마쳤다. 중앙아시아사로 현재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원래 전공이 ‘영어학’ 아닌가. 영어 교수가 중앙아시아사에 관심을 둔 이유가 궁금하다.
“처음부터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아니, 중앙아시아에 대해 몰랐다고 하는 편 맞다. 계기는 있다. 여행. 여행을 하기 위한 사전 공부, 여행을 통한 직접적 체험, 여행 이후의 지속적 관심이었다고 할까? 최초의 관심은 인도에 있었다. 우연히 가야국 시조 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한 책을 읽고 사람들의 이주, 그 원인과 배경, 결과 등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됐다. 수로왕의 이름이 수로와 수릉으로 얼핏 다른 한자를 사용하지만, 실은 ‘해’를 의미하는 ‘surya’의 음차어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안다. 허황후가 인도 阿踰國(아요디야) 출신 공주라는 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와 있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내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당나라든 송나라든 중국 공주라고 해도 좋았을 것을 왜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인도 땅 아요디야라고 수로왕비의 고향을 적시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김해김씨 후손이신 김병모 박사께서 허황후의 고향과 출신을 확인하기 위해 무척 애를 많이 쓰신 것으로 안다. 그런 분들의 학문적 열성과 역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언어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시호가 普州太后인 허황후가 과연 인도 출신인지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은 없다. 뭐든지 의심하고 알려고 하고 집요하게 추적하다 보면 어떤 학문적 결과가 생겨나고 그래서 학문이 발전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요디야가 부처 생전에는 사케타(Saketa)로 불렸고, 중앙아시아로 간 월지인 貴霜, 玉의 부족 쿠시족이 세운 쿠샨왕조의 카니시카 대왕에 의해 127년에 정복당했다는 사실을 안 건 그런 지적 호기심 덕분이었다. 그리고 아요디야의 또 다른 이름이 보즈푸르(Bhojpur)였다는 사실을 안 건 아요디야 현지인을 통해서였다. 학문적 발견은 이런 과정 속에 이뤄진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점에서 우연은 없다고도 생각한다. 고대 범어인 보즈(Bhoj)의 말뜻이 뭘까? ‘나눔과 봉사’라는 의미에서 Bhakti와 같은 말이다. 요즘 시대에 요구되는 지식인의 덕목이랄 수 있다.

15년 전 쯤 우즈베키스탄을 시작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게 됐다. 아니다. 그보다 5년 전 쯤 파키스탄 여행을 먼저 시작했다. 겨울여행이었다. 처음에는 이국적인 면,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가 닮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 생김새, 종교, 언어, 음식은 달라도, 음악은 달라도 그 안에 동질적인 뭔가가 느껴졌다. 운명인지 자꾸 초원이 나를 불렀다. 그래서 몇 차례 다니다 보니 이 동네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이 감지됐다.
사람은 접촉하며 살게 마련이고, 또 때에 따라 갈등하고 떠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전파와 교류가 이뤄지고 그런 일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 문명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것이라 싶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유목민이 중심이 돼 동서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했다. 이들은 걸핏하면 싸웠다. 식량이 떨어지면, 기후가 나빠지면, 혹은 욕심 사나운 사내가 이웃 부족의 여자를 빼앗아 가면 자존심을 걸고 보복하고 또 보복하고. 이런 인간사가 다 인문의 영역이다. 문명은 그 속성상 혼혈일 수밖에 없다.”

△ 중앙아시아사와 관련해서는 학계에서도 굵직한 저작들이 소개돼 있다. ‘중앙아시아 인문학기행’은 그런 학술서와 방향을 조금 달리해, ‘기행’의 형식 즉 에세이적인 접근을 강조한 연재였다. 또, 여행의 여정을 특별히 ‘에세이’ 형태로 담아냈는데, 에세이란 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아직까지는 공인된 역사학자가 아니다. 나는 영어학 전공자다. 그러나 관심 가는 영역은 많다. 학문적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수년전부터 명지대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는 그렇게 하면 좀 더 체계적으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코스웍은 진즉 마쳤지만, 교수신문에 꼬박 2년간 연재하느라 박사학위논문 쓰는 일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겨울방학에 집중적 글쓰기를 해서 여름에는 학위를 받고 싶다. 나는 나 스스로 학문적 깊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를 깊이 보지는 못하지만 두루 보는 안목은 있다고 믿는다. 여행을 통한 현장 경험이 나의 강점이다. 책과 지도에서 보는 히말라야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생경하다. 차를 타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더러는 걷다가 한 자리에 서서 히말라야를 바라보는 경험은 다르다. 감동이 있다. 히말라야의 실체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안고 서적을 뒤적이며 공부하는 재미는 남다르다. ‘백문이 불여일견’임을 나는 안다. 여행은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사람살이를 엿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다름과 같음을 보는 것이다. 인간사의 보편성(universality)과 특이성(uniqueness)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점을 월지의 移住史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 형식으로 편하게 전하고 싶었다. 내가 기행에세이 형식을 빌어 중앙아시아 인문학기행을 쓰게 된 배경이다.”

△ 이번 연재와 관련해 월지의 서천으로부터 여행의 의미를 풀어냈는데, 전체 연재의 중심축에 이 ‘월지’가 놓여있다. 이들 부족(민족)의 이동을 중심에 놓은 것은 어떤 이유인가.

“우선 우리나라에서 월지에 대한 연구가 다소 부족하다 여겨졌다. 사회언어학 혹은 접촉언어학의 관점에서 언어변화는 접촉과 갈등을 전제로 한다. 접촉은 이동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동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유목사회에서 이동의 주원인은 기후변화와 전쟁이다. 그 가운데 후자가 이동에 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문명은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접촉이 이뤄져야 가능하다. 현 중국 감숙성 기련산맥 일대에서 활동하던 월지가 흉노에 몰려 서천하게 된 것이 동서양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서양 중세의 시발이라면, 그 이전 인류 역사의 판도를 바꾼 대이동이 월지의 서천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고, 문명의 교류가 촉발됐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구르게 했다.

월지 서천의 첫 희생자는 일리 초원과 천산 및 파미르 일대를 무대로 유목생활을 하던 塞種이었다. 이들은 월지의 압박으로 더 깊은 산중으로 숨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색종은 흔히 사카족이니 스키타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한 갈래가 靑藏高原을 건너 蜀(사천성)을 거쳐 운남성 서부지역까지 내려간다. 운남은 國의 영역이었다.

당시 전국의 중심 민족은 ‘越人’. 그 밖에 ‘濮人’, ‘昆明人’, ‘羌人’이 있었다. 여기에 塞人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叟人’으로 불렸다. 물론 이주 과정에서 현재의 四川 서부, 貴州, 甘肅과 靑海 일부 지역에도 수인이 정착해 소수민족으로의 삶을 꾸렸다.

동쪽으로 이주해간 세력도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의 内蒙古 어퉈커 일대로 옮겨가 그곳에서 정체성을 상실하고 모진 삶을 살았던 유목민 색인도 있었다. 월지 또한 사방으로 이주해 갔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역사적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삼한시대 백제의 모태가 된 마한 54개 부족국가 중에 월지국이 있었는데, 이것이 흉노에 내몰린 월지의 한 집단이 東으로 이동해 와 세운 나라일 수도 있음을. 그러나 역사 해석은 사실(fact)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 2013년 12월 말, 연재를 시작하면서 “중앙아시아 그곳에 문명의 오해를 넘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경계’가 있다고”말했다. 2년에 걸친 연재를 마무리한 지금, 과연 인문학기행은 무엇을 확인했다고 생각하나.
“흔히 정주문명과 비교해 유목문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4대 문명은 강을 기반으로 형성됐음에 비해, 드넓은 초원을 무대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목민에게 문명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들을 했다. 유목민은 성곽을 쌓는다거나 외부의 침입에 대비할 줄 모르고, 당연히 변변한 건축물도 없는데다, 번듯한 집도 없이 천막이나 치고 살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사납고 우악스럽고 잔인하다.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건 오해에 불과하다. 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다르다. 차이 혹은 다양성에 대한 이해, 그것이 유목문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첫걸음이다.

유목민은 저들 나름의 사회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독특한 풍속을 지녔다. 정주인들과 다른 색깔의 예술을 남겼다. 무엇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은 문명의 전파자였다.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더듬다보면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그릇되고 편견에 가득 찬 것이었나를 깨닫게 된다. 중앙아시아 인문학기행이 중앙아시아에 대한, 유목문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었을 것이라 믿는다. 세상은 서로 연결돼 있음을, 먼 나라가 가까운 나라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믿는다. 거듭 말해 중앙아시아는 인문학적 탐구의 보물 창고다. 중국이 오랑캐라고 불렀던 유목민들이 이곳의 주인이자 세상의 지배자였다. 스키타이는 페르시아를 침공해 다리우스 황제를 괴롭혔다. 흉노는 훈, 훈나 등의 이름으로 유럽 역사를 뒤바꿔놓았다. 월지는 비록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배해 중앙아시아로 옮겨왔지만 기존 세력을 압도하고 끝내 쿠샨제국을 건설했다. 순록유목민이던 탁발선비는 서방에 중국의 이름을 타브가치로 기록하게 만들었다. 중국을 카타이로 알게 한 것은 거란족이었다. 돌궐족은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했고, 자신들의 족명을 터키라는 나라 이름에 주었다. 위대한 문명의 땅 인도에 무굴제국을 세운 인물은 칭기즈칸의 후예 바부르였다. 몽골은 명실상부한 세상의 지배자였다. 
이렇듯 유목민은 결코 문명의 주변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의 것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것을 수용할 줄 알았다. 동서양 문화의 교류는 이들이 있어 가능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흥망성쇠가 유럽 역사에 변화를 가져왔고 아시아 제국의 운명을 바꿔 았다. 인종의 혼혈과 문화의 혼융이 이들의 선물이다. 이를 확연히 알고자 한다면 어느 날 중앙아시아로 직접 여행을 떠날 것을 권한다.”

△ 동서 교류에 관한 통찰이랄까, 이번 연재는 비록 에세이 형식으로 자유롭게 주제에 접근했지만,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부분에서는 특히 언어학적 요소를 많이 반영한 게 특징적이었다. 고대사와 언어학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의식한 것인가.
“그렇다. 역사를 이해하고 복원하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과거를 말해줄 옛사람은 사라지고 남아있는 유물과 유적은 적다. 역사적 실체 혹은 진실을 규명하는데 있어 고고학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고고학적 성과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문헌사학과 고고학은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옛사람들이 남긴 역사 자료는 주관적 선별과 왜곡에 따른 신뢰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사료를 읽고 역사적 실상을 파악하는 문헌사학은 현존하는 자료를 믿고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료 해석에 있어 중요한 것이 명칭이다. 특히 한문 사료는 지명, 족명, 국명, 인명 등 온갖 명칭의 음과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경우가 많다. 고대사 연구에 언어학적 지식이 결합돼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지금 대학이 많이 변화하고 있다. 구조조정도 한창이다. 이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 ‘돈 안 되는’ 인문학 분야를 대폭 축소하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세계와 오래 만났으니, 인문학이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역사의 흥망성쇠를 더듬어낸 결과, 대학과 인문학의 바람직한 관계도 생각했을 듯하다.
“흔히들 ‘全人敎育’이라는 말을 한다. 영어로 말하자면 ‘a whole being’ 혹은 ‘a complete being’을 만드는 것이 전인교육이다. 사람은 절대 완전할 수 없다. 그러나 교육은 완전체인 전인을 목표로 한다. 대학교육이 추구할 바가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나라 대학교육은 실용학문 위주로 흐르고 있다. 학교 운영이 비즈니스라는 인식 속에서 돈 안 되는 학과는 쉽게 버려진다. 인문학은 전인교육에 필요한 귀한 재료다. 전인은 단순히 남에 의한 지식의 주입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유하는 존재가 전인이다. 사유하는 인간은 시와 소설을 읽고, 인생의 의미와 우주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역사를 통해 인간 삶을 이해하고, 급기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할 줄 안다. 이런 전인을 육성하는 일을 대학이 해야 한다. 대학 이전 교육이 못하는 일이기에 대학이 해야 한다. 취업률에만 신경 쓰는 한 대학교육의 미래는 없다. 그러자면 인문학을 소멸시킬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부활시켜야 한다. 대학교육의 르네상스는 인문학의 재생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사람이 우선이다.”

△ 앞으로 계획은?
“정년이 4년 반 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안식년 휴가를 받아 이탈리아 볼로냐로 가고 싶다. 거기 천년 역사의 볼로냐 대학이 있다. 그 근처에 집을 얻어 생활하며 오래된 학문의 냄새를 맡고 싶다. 가능하다면 박사학위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음식문화사나 인류학 뭐 이런 분야를 생각하고 있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 궁극적으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서다. 학위가 목표가 아니라 학위를 얻기 위해 공부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부가 취미는 아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취미다. 볼로냐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그곳을 거점으로 유럽 각지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많이 보고 많이 느끼려 한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불편 없이 이용하게 하기 위해 좀 넓은 집을 얻으려 한다. 누군가 오면 나는 집을 빌려주고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물론 때로는 친절한 가이드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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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서 2016-02-11 15:40:34
가끔 연재물을 읽으며 흥미로웠고 또한 서역의 초원을 여행하며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단행본을 빨리 접했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