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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융복합의 환상
엉터리 융복합의 환상
  •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 승인 2016.02.02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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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전국의 모든 대학이 융합과 통섭의 전시장으로 변해버렸다. 특정 전공의 한계를 넘어선 실용적 융합과 산업 수요 맞춤형 교육을 강조하는 길고 화려한 이름의 융복합 학과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엉터리 융합의 억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경우도 많고, 이름만으로는 학과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알량한 지원금을 앞세운 교육부의 무차별적인 강요에 무릎을 꿇어버린 무책임한 대학들이 만들어낸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이다.

융합과 통섭이 시대적 당위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 모두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의 지혜를 총동원한 창조적 발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 것이나 섞고 합쳐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무차별적이고 맹목적인 융합이 우리의 전문성을 약화시켜 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대학이 융합 실천의 현장이 돼야 할 이유도 없다. 세계적인 융합의 아이콘들이 대학에서 별난 융복합 학과를 다녔던 것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대학에서 ‘스마트폰학과’를 다녔던 것도 아니고, 페더럴익스프레스(FedEx)의 창업자 프레데릭 스미스가 예일의 ‘택배학과’를 다녔던 것도 아니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하버드에서 ‘SNS학’이 아니라 심리학과 컴퓨터과학을 전공했고,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도 ‘전자상거래학’이 아니라 영어교육학을 공부했다. 통섭의 대가인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도 ‘통섭학’이 아니라 동물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의 엉터리 융합은 오히려 학생들의 사회 진출에 毒이 될 수도 있다. 학생들의 전문성을 약화시키고, 시야를 좁게 만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의 학과에서 세부전공이나 전공과목 수준의 내용을 ‘학과’로 과대 포장한 무늬만의 융복합 학과의 경우가 그렇다. 실제로 산업계와 연계가 강조되는 경영·공학·농수산 분야의 상황은 정말 심각하다. 골프·외식·항공 경영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골프장·음식점·항공사에 취업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 융복합을 통해 학제 간 교류를 강화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산업계의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그에 따라 인력 수요도 빠르게 변한다. 그런 현실에서 교육부가 요구하는 대학에서의 ‘맞춤형’ 교육은 비현실적인 환상일 뿐이다. 교육부와 대학이 대학 졸업생의 취업을 보장해줄 수도 없다. 결국 대학이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유일한 길은 어설픈 융합이 아니라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융합 시대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은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변할 수 없는 기초학문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대학도 변해야 한다. 단과대학·학과·전공 사이의 칸막이를 낮춰야 한다. 겉으로만 화려한 융합학과로 학생들을 유혹하겠다는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행태도 바로잡아야 한다.

정작 융합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곳은 따로 있다. 학연·지연·혈연도 모자라 이제는 ‘마피아’들의 칸막이 문화에 찌들어버린 관계·산업계·학계가 바로 그런 곳이다. 교육 정책을 사범대 출신이 독점해야 할 이유가 없고, 정부의 재정을 경제학·경영학·정책학을 전공한 기재부 출신이 독차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원자력 산업 현장에도 철학과·물리학과·화학과 출신이 필요하고, 자연과학과 공학 전공자들이 은행과 증권사에서도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융합 시대의 인재 채용이 학부의 전공에 묶여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진정한 융합과 통섭을 실천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간단하다. 개인은 전문성을 극대화시키고, 부처·기관·기업·부서 사이의 장벽은 적절하게 낮추면 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가 바로 융합과 통섭의 목표이고 실천 전략이라는 뜻이다.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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