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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 하고 나는 근사한 소리를 따라가보면
‘뿌’ 하고 나는 근사한 소리를 따라가보면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16.01.26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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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147. 나팔고둥
▲ 나팔고동사진출처= www.doopedia.co.k

올 정월 초에 강원도 평창군 봉평초등학교 6학년 학생 12명으로 구성된 취타대가 중국 상하이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홍보활동을 펼쳤다는 기사가 났다. 취타(吹打)란 관악기를 불고 타악기를 침을 이르고, 대취타와 소취타로 나뉜다. 대취타는 징·자바라·龍鼓·螺角·나발(나팔)·태평소들로 갖춘 대규모의 軍樂(隊)을 이른다. 소편성엔 각각 4명씩 24명이, 대편성엔 8명씩 48명의 취타수가 참가한다고 한다.
주로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군영의 陣門을 크게 여닫거나 군대가 행진하고 개선할 때, 고관의 나들이행차 시에, 또 임금이 능에 거둥하는 陵幸에 취타했다고 한다. 소취타는 진문을 개폐 때 하던 약식 취타로 매일 새벽과 밤에 행했다. 때문에 앞의 봉평초등 학생들이나 광화문 등지에서 행하는 취타대는 소취타인 셈이다.
그런데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웅장한 대취타를 보고 있으면 시끌벅적함에서 ‘뿌’ 하는 우람한 소리를 듣게 된다. 길쭉하고 커다란 고둥 일종인 螺角이 내는 소리다. 그런데 취타대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이 고둥(螺角)을 어디서나 여태 ‘소라’라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 제주도를 상징하는 소라(Batillus cornutus)는 소랏과의 연체동물로 껍데기길이 10cm, 지름 8cm 정도로 조그맣고 둥글넓적한 것이 껍데기에 뿔 닮은 거칠고 긴 돌기들이 잔뜩 나 있어 나각과 사뭇 다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소라란 바다에서 나는 고둥무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일 뿐이고, 그것을 불어도 ‘뿌’ 하는 근사한 소리가 날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취타대에서 불어대는 그 螺角(소라 螺, 뿔 角)은 결코 소라가 아니고 길이가 무려 30cm나 되는 아주 큰 海産腹足類인 나팔고둥(Charonia lampas)이다. 나팔고둥의 끝자리를 뭉툭 자르고 다듬어 거기다 입을 대고 불면 이토록 우렁찬 나팔소리가 난다. 따라서 서양인들도 나팔(trumpet)을 부는 패류(貝類, shell) 즉 ‘trumpet shell’이라 불렀고, 마땅히 중국과 일본에서도 악기로 썼다한다.
또 나팔고둥을 ‘Triton's trumpet’이라 한다. 트리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半人半魚의 海神으로 해마(sea horse)를 타고 다니면서 바다가 잔잔할 때는 물위로 올라와 자신의 상징물인 소라고둥(나팔고둥)을 불어 물고기와 돌고래들을 불러 모아 놀았다고 한다.

부연하면, 나팔고둥을 데삶아 살을 빼버리고, 뾰족한 꽁무니(꼭지, 殼頂) 부분을 잘라내고, 곱게 갈아서 입김을 불어 넣는 구멍(mouthpiece)으로 삼는다. 취구에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입김을 불어넣어 입술진동으로 소리를 낸다. 고둥 안은 여러 바퀴 휘휘 꼬인 관으로 갈수록 점점 더욱 굵어져(소리를 공명증폭시킴) 이윽고 맨 끝자락(입)은 나팔주둥이처럼 활짝 펴진다.
螺角은 서양 호른(horn) 악기의 전신인 이른바 각적(角笛, 뿔피리)과 영락없이 비슷하다하겠다. 나각(나팔고둥)을 원형대로 쓰기도 하지만 겉을 노리개로 치레하고, 천으로 둘러싸기도 한다. 현재 국립국악원에 보존돼 있는 나각(나팔고둥)은 길이 약 30cm로 지름은 약 3cm라 한다.

그런데 貝類는 크게 껍데기(貝殼)가 여러 층으로 배배꼬인 복족류고둥(골뱅이, 卷貝)과 껍데기가 두 장인 부족류조개(二枚貝) 둘로 나뉜다. 결국 나팔고둥은 앞의 복족류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러 고둥무리와 꽃, 인체 따위를 X-선으로 촬영해 영상작품으로 만드는 X-ray artist인 강남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 교수가 온 세상에 이름났다.
나팔고둥은 수염고둥과의 연체동물로 세계적으로 3종이 있으며, 복족류 중 가장 커서 다?자라면 길이가 무려 35cm가 넘는다. 껍데기는 아주 단단하고 묵직한 것이 매우 소담스럽고 멋진 연체동물이다. 길쭉한 원뿔형에 螺層(꼬임 켜)은 일고여덟 층으로 높은 편이며, 體層(주둥이에서 한 바퀴 돌아왔을 때의 가장 큰 아래 층)이 몸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껍질(殼皮)은 자줏빛 갈색(紫褐色)으로 선명하고, 예쁜 무늬가 굵게 나며, 겉은 윤기가 나서 몹시 반드럽다. 아주 넓고 둥근 입(aperture) 속은 희고, 입 바깥쪽으로 퍼져있는 입술(殼脣)은 두꺼우면서 나팔처럼 벌어진다. 자웅이체로 체내수정을 하고 알을 낳는다.

그리고 나팔고둥은 발칙스런 ‘바다의 폭군’ 불가사리의 천적이다! 침샘에서 마비타액을 분비해 고둥·조개·해삼은 물론이고 가시가 가득 난 대형 악마불가사리(crown-of-thorns starfish)까지도 잡아먹는다. 태평양·대서양·인도양·지중해에 나고, 우리나라에는 남해안의 수심 8~50m 지역에 분포한다. 필자도 사력을 다해 방방곡곡 바다채집하면서 허구한 날 허탕치다가 巨文島 白島에서 뜻밖에 한 어부로부터 나팔고둥을 간신히 구했었다.

나팔고둥은 껍데기의 무늬가 탐스럽고 아름다워 패류수집가들에게 인기 있고, 우리나라 우표에도 나왔었다. 데치거나 삶아 짭조름한 알(살)은 무쳐먹고, 껍데기는 조개공예재료로도 쓴다. 아무튼 무참한 남획과 무분별한 연안생태계 훼손으로 마침내 몽땅 거덜 나 시방 멸종위기야생생물 1급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살려내려고 연구 중에 있다니 참 천행이라 하겠다. 어디 나팔고둥 뿐이겠는가. 물뭍의 동식물들이 온통 전전긍긍 사경에 처했다. 하지만 그나마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 했으니….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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