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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오퍼상’ 넘어 우리의 진보이론 모색하고 싶었다”
“‘수입오퍼상’ 넘어 우리의 진보이론 모색하고 싶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1.20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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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출간한 이도흠 한양대 교수
▲ 이도흠 교수는?한양대에서 고전시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로 있으며,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과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의 상임의장 등을 역임했다. 4대강사업 반대운동, 교육개혁운동, 노동운동, 불교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계간 <불교평론>의 편집위원을 10년 동안 수행하며 불교학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 『표준법요집』 편찬위원으로 이에 들어가는 경전과 의례문의 전문을 한글로 번역했고, 『한국철학사전』을 기획·편찬함과 아울러 고대철학 전체와 불교철학의 일부 항목을 집필했다. 지은 책으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신화/탈신화와 우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틱낫한의 『엄마』가 있다. 2002년 <교수신문> 학술에세이 공모전에서 「생태 사상과 화쟁 사상의 종합」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지금의 이 미친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데 마르크스주의만한 것은 없다.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근대성의 사유를 극복하는 데 불교만한 것도 없다.
원효는 나의 변혁에, 마르크스는 세상의 변혁에 큰 가르침을 줬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 수식이 따른다. 대표적인 게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호칭이다. 거리? 아마도 한국 교수 가운데 가장 많이 집회 현장에 참여한 데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좀 묵직한 책을 냈다.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자음과 모음)다. 원효와 마르크스라니? 그것도 ‘인류의 위기에 대한’이란 부제가 앞에 놓여 있는 840쪽 분량의 책이다. 물론 애초 분량에서 많이 줄어들었지만, 국문학자이면서 불교에 밝은 그가 ‘원효’와 ‘마르크스’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한국 고전시가 가운데 ‘향가’에 관심을 가졌던 이도흠 한양대 교수(55세, 국어국문학과)가 ‘불교’와 가까워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향가의 배경에는 당대 신라의 ‘불교적 세계관’이 깊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으로 대한불교조계종 『표준법요집』 편찬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을 10년 동안 수행하면서 불교학의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가 원효의 ‘화쟁’에 눈을 떠서 일찍이 이 분야에서 밝은 글을 여럿 발표했다.
그렇다고 그가 ‘불교’에만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학 대중화에도 애썼듯, 그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의 상임의장을 지내며 대학 민주화와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에 노력을 보탰다. 4대강사업 반대운동을 비롯해 교육개혁 운동, 노동운동, 불교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수가 ‘원효’와 ‘마르크스’를 들고 나왔을 때, 생소한듯하지만 ‘이도흠’다운 접근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기자의 손에 책이 들어온 지 6일째 되는 날인 12일 그를 만났다 .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집회 현장에 가장 많이 참여한 교수라는 말도 있는데, 언제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나?
“2001년 이후로는 거의 매일 이 책을 썼다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다. 어디에 있건 하루에 잠깐이라도 이에 대해 생각했으니까. 2001년에 <법회와 설법>에 연재가 끝나자마자 책으로 묶어 15년 동안 각 장, 혹은 주제별로 다듬어서 논문으로 펴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보완하는 작업을 했다. 마침 작년에 연구년이라 이 책을 쓰는 일에 집중하면서 인지과학, 진화생물학, 양자물리학 등을 공부하며 환골탈태시켰다. 재작년에 심장병 진단을 받은 뒤로는 잠을 늘렸지만, 그 전까지는 합숙하며 입시출제를 같이 했던 교수들이 나의 하루를 지켜보고는 ‘외계인’이라 칭할 정도로 30년 가까이 네 시간 가량 자고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는 게 습관화 됐다. (웃음)”

△ 책이 무거운 것은 840쪽의 분량 때문만이 아니다. 다루는 주제(인류의 위기), 그리고 동서 사상을 가로지르는 그 광범위한 지적 시도도 한 몫 한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인가?
“지금의 이 미친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데 마르크스주의만한 것은 없다. 마르크시즘을 비롯해 근대성의 사유를 극복하는 데 불교만한 것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수입오퍼상을 넘어 우리의 진보이론을 모색하고 싶었다. 붓다가 아니라 원효를 내세운 이유다. 무엇보다도 양자가 상극인 것 같지만 실은 서로 보완관계다. 마르크시즘은 근대성의 사유인데, 원효는 탈근대의 지평을 열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치밀하게 분석하면 원효는 그 너머 세계를 그려준다. 마르크스가 혁명으로 이 체제를 전복하자고 선동하면, 원효는 너 자신부터 성찰하고 깨우치라고 일갈한다. 마르크스가 이원론적이고 실체론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원효는 일원론적이고 연기적인 관계로 세계를 보라고 한다. 마르크스가 치열하게 대립물 사이의 투쟁과 모순을 분석하면, 원효는 그 대립들을 하나로 화쟁하라고 이른다. 무엇보다도 내가 변해야 세계가 변하고 세계가 변해야 나의 거듭남도 유지된다. 원효는 나의 변혁에, 마르크스는 세상의 변혁에 큰 가르침을 준다.”

△ 책은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에서부터 폭력과 학살, 소외의 심화, 세계화의 모순, 과학기술의 상품화, 근대성의 위기, 분단모순, 욕망, 정보사회의 모순, 가상현실 문제 등을 두루 살폈다. 사실 이 모든 주제를 아우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10개의 토픽을 ‘화쟁사상’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읽어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화쟁사상’이 이 모든 주제를 관통할 수 있는, 그래서 어떤 대안을 이끌어낼 수 있는 데 실마리 역할 이상을 할 수 있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자연과 인간이든, 노동자와 자본가든, 가상과 현실이든 10개 주제가 모두 대립자에 의한 모순 때문에 빚어진 것들이 아닌가? 화쟁은 두루뭉술하게 화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립과 다툼[諍]을 인정하고 이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나로 아우르고자[和] 하는 것이다. 내 아들 녀석도 서너 살 때 뜨거운 곰탕을 먹으면서 시원하다고 하더라. (웃음) 우리 민족에게는 ‘뜨거움’과 ‘시원함’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뜨거운 시원함’이 최고의 맛이기 때문이다. ‘눈에 밟힘’, ‘죽이는 삶’이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우리 민족은 원효가 있기 이전부터 A or not-A가 아니라 A and not-A의 역설적이고 待對的인 화쟁의 사유를 했다. 待對란 상대방이나 적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이다. 내가 팔을 펴는 것이 양, 팔을 구부리는 것이 음이라면, 양의 기운이 작용해 팔을 펴는 순간에 구부리려는 기운이 작용한다. 이에 팔을 최대로 펴면 다시 구부리게 된다. 파란 태극 문양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고, 빨간 태극 문양에 파란 동그라미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각장 별로 주제도, 대립도 다양하지만, 어떤 것이든 이런 방식으로 화쟁을 시키면서 그 너머를 열고자 했다.”

△ 저자가 독창적 대안으로 내세운 개념들이 있다. 눈부처, 눈부처주체, 눈부처-차이, 눈부처공동체란 것인데,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화쟁의 辨同於異를 ‘눈부처’로 해석한다. 내 눈동자에 맺힌 상대방의 모습을 눈부처라 한다. 눈부처를 보는 순간 나와 너의 대립은 무너진다. 이성과 교양이 가장 증대됐던 20세기에 왜 집단학살이 끊이지 않았을까? 한나 아렌트는 ‘순전한 생각없음’ 때문이라 하고,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타자를 ‘유태인, 이교도, 유색인, 이민족, 빨갱이’ 등으로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그 근거로 집단학살 이전에는 상대방을 타자화하는 증오언어가 먼저 난무하게 된다. 이 세계를 올바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주체는 살려야 하지만, 이 주체가 동일성에 갇혀서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지양해야 한다. 때문에 들뢰즈는 차이(difference)의 철학을, 레비나스는 타자성(alterity)의 사유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눈부처는 양자를 포괄하면서도 넘어선다. 이에서 파생된 눈부처-차이는 동일성으로 회귀하지 않도록 관념이 아니라 감성에 의해 도달하는 ‘차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눈부처-주체는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from freedom), 노동과 창조를 통해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을 통해 자신을 해탈시키는 적극적 자유(to freedom), 타자를 자유롭게 해 내가 자유로워지는 대자적 자유(for freedom)를 모두 쟁취하고 종합해 타자와 상생하는 주체다. 눈부처공동체는 그런 주체들이 자유롭게 연합해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는 코뮌이다.”

△ 주제 또한 굉장히 넓다. ‘인류의 위기’라고 했지만, 실은 ‘우리 한국인’의 위기로 좁혀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고, 자본주의의 병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이런 진단이 너무 ‘근본주의적’ 아니냐는 거다. 어쩌면 너무 단순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진보 진영에 있는 사람조차 자본주의를 해체하자고 하면 과격하다고 한다. 나도 과격하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는 않다. 윤리적 자본주의나 자본주의 4.0 등을 주장했으면 보수로부터도 박수를 받고 책도 아주 잘 팔렸을 것이다. (웃음) 나는 냉정하고 엄밀하게 분석했다. 분석할수록 그 근본에는 자본주의 모순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러 모순과 원인이 인드라망처럼 얽혀있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 모순이자 주요모순이고 중심고리였다. 10개 주제에서 모두 이것을 극복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대안도 미봉책에 그칠 뿐이라고 판단했다. 거대 이윤의 원천이 시장이 아니라 시장의 작동을 억제하는 독점이기에 공정한 시장이란 불가능한 유토피아다.”

△ (앞의 질문 2와 이어서) 아마도 이 책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사상이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것과 불교를 연결하는 작업은 좀 더 나아간 것 같다. 불교학 내부에서도 이런 논의가 있나? 이 둘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있는가.
“유승무 교수가 「불교와 맑시즘의 동몽이상(同夢異床)」이란 논문으로 선편을 잡았고, 박경준 교수는 마르크시즘과 비교한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서 사회사상과 경제사상을 추출하고 종합해 『불교의 사회경제사상』을 펴냈다. 붓다와 마르크스는 상극 같지만, 접점이 많다. 붓다와 마르크스 둘 다 가장 싫어하는 인간과 가장 좋아하는 인간이 같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이기적이고 탐욕에 넘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해 이를 버리고 이타적이고 대자적인 실천을 행하라고 가르쳤다. 두 분 모두 꿈도 같았다. 붓다와 마르크스는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없이 만인이 평등한 이상 사회를 꿈꿨다. 둘 다 이 세계와 인간 사회를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의 사유로 바라봤다. 붓다는 인간은 물론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 관계임을 갈파했고, 마르크스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다른 인간, 토대와 상부구조,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모두 신적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세계가 변한다고 봤으며, 이 세계를 쉼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無常의 관점에서 파악했다. 기존 질서와 논리는 물론 기존의 텍스트에 대해 비판을 넘어 해체적인 입장을 취한 것도 같다.”

△ 어려운 주제를 ‘에세이 형식’으로 기술한 게 어쩌면 이 책의 빼어난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학자들의 책은 대개 논문 형식의 중후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에세이’ 형식으로 밀고 나간 것은, 에세이에 어떤 다른 내파의 힘이 있다고 봐서 인지 궁금하다.
“치밀하게 논거를 종합해 논증하되, 전체는 에세이처럼 읽히도록 기술했다. 이성이 다다를 수 없는 지평으로 인도하는 것이 감성 아닌가. 에세이는 감성을 담아 사물과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짝퉁 가방처럼, 원본과 재현 사이에는 늘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글이란 진리와 사고의 언어적 재현이다. 이것이 논리로 채워질 때 간극은 더 벌어진다. 에세이는 그 간극을 조금이마나 메워줄 수 있다. 인지과학을 통해 밝혀진 대로, 이성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보완하는 것은 실은 감성이다. 에세이는 감성의 주름과 결을 담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거나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끌려서’ 결단한다. 감성의 현을 건드려 울림을 줄 때 글 속의 진리나 메시지는 실천과 결단을 이끈다.”

△ ‘민교협 상임의장’을 지냈다. 지금 대학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정부는 등록금을 묶어두고, 각종 지원금으로 대학을 ‘관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학 구조조정이 인문학과 같은, ‘당장의 쓸모’는 좀 떨어지는 학문 단위를 희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화쟁’의 관점에서 뭔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대학은 기업연수원으로 전락했다. 대학의 목표는 진리의 탐구와 창달이 아니라 발전기금 확보와 더 높은 대학평가와 취업률이다. 당장의 이윤이나 교환가치로 따지면 교육은 당연히 손해 보는 장사다. 하지만, 교육은 말 그대로 백년지대계다. 당국자들이 좀 더 멀리, 깊이 봐야 한다. 당장 써먹을 직업인을 국화빵처럼 찍어내는 풍토에서 어찌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겠나? 스마트폰은 곰삭은 인문학과 발 빠른 공학의 합작품이다. 등에가 쏘지 않는다면 누가 게으른 말을 살리겠는가? 모든 사람이 이득과 탐욕을 좇아 혈전을 벌일수록 이익과 탐욕을 초월한 가치를 추구하고 이것을 익히고 묵히고 곰삭혀서 성스런 진리로 빚어내는 영역이 있어야 그 사회는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화쟁적 방식으로는 학생, 교수, 직원, 대학 당국, 교육 관료가 모두 동등한 권력을 갖고 참여하는 교육위원회를 구성해 여기서 21세기에 부합하는 한국 대학의 미래상을 그리고, 그에 걸맞은 정책들을 마련하고 재정을 투여해야 할 것이다. 구조조정도 이 위원회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거시적 전망 아래 마스터플랜을 만들고 그에 부합하게 합의를 통해 조정을 해야 한다.”

△ 교수사회가 많이 위축되고 있다. 설문조사를 해보면, 지식인에서 전문가로 자기인식이 굳어져가고 있다. 그 누구보다 현장을 더 많이 찾는 선생님 처지에서 본다면, 이러한 ‘위축’을 넘어설 수 있는 방안이 있지 않을까? 또 시간강사들 문제, 학문후속세대 문제가 너무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학문공동체의 바람직한 지향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지금 대학가에서는 교수들이 논문 쓰느라 공부 못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과도한 업적 압박과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대학정책 및 학교 당국, 신자유주의 체제가 교수를 위축시키고 있다. 교육자로서 교수의 여러 권리를 보장하는 대학 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져야 하고, 교수평의회나 교수협의회가 대학정책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한 주체가 돼야 하며, 교육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을 하지 말고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해야 한다. 지금의 ‘연구재단시스템’과 대학평가방식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내가 일전에  「입시 철폐와 대학평준화의 방안-박근혜 정권의 교육 정책 비판 및 근본적 대안 제시」( 『입시·사교육 없는 대학 체제: 대학 개혁의 방향과 쟁점』, 한울)에서 지적한 대로, 우선 대학평가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평가로 대학 서열화를 하던 것을 지양하고, 각 대학의 교육 이념과 역량에 맞게 다양화와 특성화를 지향할 수 있도록 다양한 모델을 만들고, 대학 자율로 모델을 선택하게 하고 그에 따라 지표와 기준을 설정해 평가해야 한다.

시간강사 문제는 심각한 정도를 넘어 대학을 디스토피아로 만들고 있는 주범이다. 김민섭 씨의 지적대로, 시간강사의 현실은 패스트푸드 알바보다도 못하고,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위하지 못하는 디스토피아가 됐다. 시간강사가 주체가 돼야 하지만 권력을 가진 교수들이 나서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대학을 공공화해 모든 대학을 국공립화하고 등록금도 없애야 한다. 특성화와 거점대학을 매개로 대학 서열화를 해체해 교양대학을 운영하고 여기서 시간강사를 전임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당장 대학의 재정 지원을 확대해 시간강사의 절반 이상을 정규직 교수로 수용하도록 하고, 나머지 강사 또한 4대 보험과 연구실, 일정 정도의 생활이 보장되는 연구교수로 임용해야 한다.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느냐? 장기적인 것이든, 단기적인 것이든 별도의 세금이 필요하지 않다. 부자감세를 이리 돌리면 충분할 것이다.”

△ 다시 책으로 돌아가겠다. 맺음말에서 자본주의가 50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했는데,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가.
“자본주의가 30년이나 50년 안에 망할 것이라고 하면 진보인사마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당연하다 지금 자본주의는 확고부동하게 우리를 지배하며 번영을 누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윤율 저하, 기술혁신에 따른 재생에너지 사용, 한계비용 제로의 공유경제의 확대, 민중의 저항, 지역공동체의 확대 등 다섯 가지 요인으로 머지않아 망한다.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기계와 기술에 투자해 유기적 구성을 높이려 하는데, 그럴수록 총량은 늘어나지만 이윤율은 저하된다. 신자유주의 체제도 이로 인한 적자를 보전하고자 노동유연성, 민영화, 세계화 등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착취를 강화해 이윤을 더 늘리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초국적 자본부터 연이은 적자로 고전하고 있다. 지금 지구촌은 석탄과 석유, 가스는 거의 고갈되고, 태양광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앞으로 30년 안에 태양광이 석유나 석탄보다 싸게 생산될 것이다. 더구나 태양광은 인터넷과 유사한 시스템을 통해 공유가 가능하다. 예전에는 학생들 사진 찍어주면 인화비가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수천 장을 찍어도 거의 비용이 들지 않아 마음대로 찍어 이메일로 보내준다. 한계비용이 제로이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수백 만 원 주고 샀지만, 요즘은 집단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위키피디아가 더 정확하고 찾기 쉽다. 불평등이 점점 심화해 ‘점유(occupy) 운동’과 같은 대중저항이 곳곳에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 곳곳에서 공동생산하고 공동분배하는 코뮌들이 세워지고 있다. 독일에서 재생에너지가 20%를 넘자 환경단체나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화석연료나 원자력 발전소가 경쟁력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해 건설을 기피하고 있다. 지금 재생에너지나 공유경제가 차지하는 비율이 10%에 남짓하지만, 곧 20~30%에 이를 것이고 이 지점만 돌파해도 자본주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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