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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새학기 강의안은 다 짜셨나요?
교수님 새학기 강의안은 다 짜셨나요?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6.01.18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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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수요 맞춤형’ 강의, 실제로는?
▲ 일러스트 돈기성

경희대 미대, 예술보다 정부 교육정책 탐구 ‘열공’
인하대 철학과, 철학사상 탐독 대신 ‘글쓰기’ 첨삭 

‘예술이란 쓸모 있는 것인가, 아닌가? 여기서 쓸모란 무엇인가?’

지난 학기 경희대 미술대학의 1학년 학생들이 받아든 기말고사 시험문제다. A교수는 시험 두어달 전부터 문제를 알려주고 시험날엔 ‘오픈북’을 했다. 정답지가 별도로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A교수는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학기 중엔 강의당 300~600쪽에 달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했고, 다양한 해외 미술관 사이트를 소개하며 전 세계 미술가들의 정보를 최대한 수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미술학도들은 어떤 답을 적어냈을까?

“예술은 (학문의 특성상) 취업하기 어려운데 프라임사업, 대학구조조정 등 교육부정책으로 인해 (예술가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다.”

채점을 하던 A교수는 깜짝 놀랐다. 학생들의 절반 가량이 교육부정책을 비롯한 정치적 측면에서 논지를 이어가는 답안이 많았기 때문이다. A교수는 “놀랍게도 학생들은 지금 예술이 직면한 본질적 문제, 사회적 위치를 고민하고 있었다”며 “미술학도 1학년 수준에서 이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훌륭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편으론 그간 교육부가 강조해온 ‘취업 중심’ ‘사회수요 맞춤’이라는 교육기조가 예술교육에도 깊숙이 파고 들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학부 1학년생들의 시선에도 예술이라는 가치는 학문탐구의 대상보다는 정부 정책의 하나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교육이 현실과 동떨어져서도 안 되기에 A교수는 이 같은 세태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한층 더 높은 차원의 교육과정으로 녹여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실기수업도 학생 한명한명에게 정치·사회·철학적 질문을 던지거나 학생의 상황에 맞춰 책을 쥐어준다. 이렇게 자연스런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학생 스스로 ‘예술작품’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부터 A교수의 교수법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취업을 목표로 한 융복합 교육과정을 커리큘럼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하는 탓이다. 경희대는 교육부의 프라임사업(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사업)에 지원하려다 지난 11일 이를 ‘전면 재검토’로 선회했다. 프라임사업은 선정되지 않아도 사업신청 계획서대로 운영해야 한다. 더구나 사업을 ‘철회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A교수에겐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다시 말해 경희대가 신청 포기선언을 하지 않는 이상 커리큘럼과 교수법 역시 수정해야 한다.

취업중심의 커리큘럼 변화에 대한 압력은 비단 프라임사업에 국한하지 않았다. 학부교육에 4년간 100억원에 달하는 지원금을 제공한 에이스사업(학부교육 선도대학 지원사업)도 예술교육의 자율성을 크게 흔들어 놨다. 실제로 에이스사업을 준비하면서 A교수는 서너 차례 융복합 커리큘럼을 개발했다. 작곡과, 무용과, 공학 계열 전공 등과 융복합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A교수는 자신의 강의에 대한 평가를 내릴 겨를도 없이 학기마다 ‘전혀 새로운’ 강의를 내놔야 했다.

교육부 등 사업을 추진하는 입장에선 새로운 교육방법론을 제시하고 대학에 정책이 스며들길 원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은 스스로 검증해 보지도 않은 단발성 강의를 반복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짜여진 강의로 학생들에게 깊이있는 학습을 기대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A교수는 “캡스톤디자인, 융복합 등 교육부정책에 맞춰서 강의안을 짜다보면, 교육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언어들만 남는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정책사업화 된 교육방법론들은 ‘페이퍼’(문서)로 쓰면 좋은 말과 뜻이 많이 나오지만 결과물(교육효과)은 ‘말 붙이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거나 실제 교육수준이 매우 낮은 편”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전공교수들을 주축으로 단기간에 개발되는 융복합과목은 사업계획서를 풍성해 보이게 만들 뿐, 실제 교육효과가 취업역량과 어느 정도로 연결되는지 검증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현장에서 “융복합교육은 석사과정 이상 수준에서 가능하다”는 말이 꾸준히 제기됐던 것이다.

교육부정책에 따른 융복합 커리큘럼을 수차례 운영해 본 A교수는 새학기부터 ‘정통강의’로 과감히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학부 수준에서 융복합 강의는 교육효과가 미미할 뿐 아니라 학생들을 하향평준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강의시간엔 학문 자체를 가르치고, 취·창업이나 진로·진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사는 강의 후 일대일 면담으로 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철학과 실습’ 철학적 질문에 빠진 철학과

인하대도 프라임사업 참여의사가 언론을 통해 공개됐고 구성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지난해 12월 9일 최순자 인하대 총장은 ‘대학 발전 및 특성화 방안 설명회’에서 구성원 투표로 결정하겠다고 하면서 경희대처럼 사업참여계획을 재검토할 것을 내비췄다. 하지만 교수들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더구나 최근 인하대는 프라임사업과 코어사업(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 중 어디에 참여할 것인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선 지난해 11월 문과대학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다 급히 철회했는데 이때 철학과를 교양대학으로 소속을 옮기고 2017년부터 신입생 모집을 중단키로 했었다. 사실상 ‘학과 폐지’ 절차에 착수했다는 게 인하대 교수들의 관측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철학과 교수들도 ‘산업연계 교육’으로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있다.

이달 초 강의안 작성을 앞두고 인하대 철학과에는 3학년 이상 전공강의에 ‘실습형 과목’을 만들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종합설계 교육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캡스톤 디자인’ 지표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이 학과의 B교수는 새 학기 강의안을 짜다가 ‘철학과 실습’이라는 매우 철학적인(!) 질문에 직면했다. 철학과 전공과목이지만, 철학보단 실습에 강의의 초점을 맞추라는 안내도 받은 터라 강의안은 더 복잡해졌다.

결국 B교수가 제출한 실습용 강의안은 ‘글쓰기’다. 학생들에게 매주 에세이를 써오게 한 후 발표와 토론을 시킨다. 그제서야 B교수는 논지를 바로잡거나 맞춤법을 고쳐준다. 바꿔보면 철학과 고학년 강의는 철학가·사상을 심화된 수준에서 분석하던 기존의 것보다 글쓰기·발표가 취업준비에 더 용이하다는 것이다.

B교수는 그러나 “이 정도는 수용할만한 변화”라면서도 “결국엔 철학교육도 융복합교육으로 가는 것이 맞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최근 프라임사업을 비롯해 교육부 재정지원사업이 교수법의 변화를 명분으로 ‘강제적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특히 프라임사업에 대해 B교수는 “인원을 빼가기 위해서 사업을 한다고 의심을 받으니 구성원들이 저항하는 것”이라고 바라봤다.

융복합교육은 개별 강의프로그램 안에서 개발할 게 아니라 대학이 전체 학과를 대상으로 교육방식을 완전히 ‘뒤섞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교육전문가들은 말한다. B교수가 융복합교육을 시도했지만 글쓰기·발표 수준에 그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B교수는 “학과 칸막이(학과 정원에 따른 지분 혹은 이해관계)를 열어놓고 융복합을 중심으로 한 자율조정이 순환되도록 유도해야 한다”며 “지금은 ‘구조조정을 위한 융복합’을 내세우니 대학교육이 교수조차 책임지지 못할 방향으로 떠밀려 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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