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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위주 전통적인 인문학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전문가 위주 전통적인 인문학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1.12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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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연구회 <안과밖> 제39호(2015년 하반기), ‘위기의 대학과 인문학의 길’ 진단

영미문학연구회(대표 김성호·서울여대)가 펴내는 연구지에는 비매 학술지 <영미문학연구>와 반년간지 <안과밖>이 있다. 후자는 그간 영문학 내부의 혁신을 줄곧 제기하면서 학계 안팎에까지 목소리를 던져왔다. 이 학회가 1995년 6월 창립됐으니, 지난해 20년을 넘어선 셈이다. 2015년 하반기호로 나온 <안과밖> 제39호가 좀 더 의미 있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안과밖> 제39호는 특집으로 ‘오늘의 영미문학 연구, 변화와 도전’을, 쟁점으로는 ‘위기의 대학과 인문학의 길’을 마련해 학계 중진들의 고뇌 어린 목소리를 담았다.

특집에는 「이중과제론과 현대성」(유희석·전남대), 「워즈워스의 ‘자연’ 재론: 영문학의 ‘주체적’ 수용 맥락에서」(김재오·영남대), 「모더니즘의 다른 얼굴과 불가능한 시 읽기」(정은귀·한국외대)를 실었다. 쟁점에는 「구조조정 속의 인문학과 대학: 무엇을 할 것인가」(윤지관·덕성여대, 한국대학학회 회장), 「시력 약한 박쥐의 아름다운 퇴장: 새로운 인문학의 출현을 고대하며」(전인한·서울시립대), 「오늘의 한국 영문학 혁신의 길」(김명환·서울대)을 배치했다. 특집과 쟁점 모두가 ‘지금 이곳의 인문학’과 닿아 있는 현안이란 점에서 시의적절한 기획으로 읽힌다.

영미문학연구회가 던진 ‘특집’의 고민은 제목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오늘날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는 대학 구조조정은 전통적인 외국문학 관련 학과와 이에 연관된 연구자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환경 변화는 ‘지금 이곳에서 외국문학 연구’의 의미를 새롭게 따지게 만든다. ‘변화와 도전’이라고 했을 때, 이 변화는 외국문학 연구 지반을 둘러싼 안팎의 환경 변화를 의미하고, 도전이란 이렇게 조성된 변화 속에서 외국문학의 수용과 재창조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을 시사한다. 세 편의 글은 이 맥락 위에 서 있다. 외국문학 연구자들의 자의식을 짚어볼 수 있는 글들이란 점에서, 그간 ‘영문학’이 누려온 모종의 특권적 지위를 선망의 대상으로 지켜봐온 인접 외국문학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쟁점은 영문학자가 발 딛고 선 제도로서의 대학/학문에 대한 성찰인데, 세 글이 조금씩 상반된다. 인문학 위기 인식에는 공감하지만, 대안을 찾는 데서는 다양한 생산적인 논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윤지관은 한국대학학회 회장으로서 전국을 돌면서 맞닥뜨린 대학들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지적하고 각종 지원사업과 인문학 진흥책 등 관련 법안들의 맹점을 짚어내는 한편, 국공립대의 비율을 늘리는 등 구체적 대안을 내놓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필자는 동료들과 함께 한국대학학회 창립 후 6개월에 걸쳐 구조조정 하의 한국 대학 현실에 대한 실증적 조사를 목적으로 전국순회 집담회를 열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 또는 사안에 따라서는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현재의 획일적이고 졸속한 대학 구조조정이 각 대학의 교육환경을 악화시키고 있고, 권력의 통제가 전에 없이 강화돼 대학 내부의 의사소통 구조가 무너지고 교권의 위기가 가중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현실이 이런데도 대학별, 학과별, 그리고 개인단위에서까지 나타나는 상호경쟁의 풍토에서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전체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패배의식이 만연해 있다는 자기비판도 광범하게 토로됐다.” 이런 패배의식 한 편에는 ‘분노와 비판’도 쏟아졌다.

패배주의 넘어서 ‘대학담론’ 창출로
윤지관은 이를 ‘대학담론’의 형성으로 모아냈다. 전방위적인 구조조정에 맞설 수 있는 이론적 대응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대학담론의 형성에 인문학자들의 개입과 기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대학의 역할을 다시 따지고, 구조조정의 개혁논리를 비판하면서 사회변혁의 과제와 묶어내는 노력이 이에 포함된다. 체념이나 패배주의에 젖을 게 아니라 ‘실천으로 나아가자’는 목소리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안드레아 델싸르또(Andrea del Sarto)」의 한 대목, “나는 농가의 네 벽이 세상 전부인 / 시력 약한 박쥐, 태양은 결코 농가 밖으로 나를 유혹해서는 안 되지”를 인용한 전인한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 안드레아 델싸르또가 자신을 지칭해 했던 말 ‘시력 약한 박쥐’를 한국 대학의 인문학 전문가들에게 투사한다. 그의 지적 혹은 비판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이제껏 사회수요에 부응하지 못하고 전공인문학에만 매몰돼 있던 인문학자들이 과감히 교양인문학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쯤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근대 이후 시장, 다시 말해 현실적 수요와의 관계에서 인문학이 분화했다는 것, 그렇기에 인문학들 중에서 어느 한 인문학만이 인문학적 가치를 독점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다. 이점에서 그의 글은 다소간의 오해와 오독을 피해갈 수 있게 된다. 전인한은 “시장 속의 인문학이든, 반시장주의적 인문학이든, 시장 속의 인문학의 표피를 쓰고 있지만 반시장적인 태도를 담지하고 있는 인문학이든, 반시장적인 태도를 내세워 시장 속에 파고들려는 인문학이든, 또는 필자가 생각하지 못하는 인문학이든, 이런 인문학들 중 어떤 인문학이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적 수요에 부응해서 전공인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관심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언은 이내 ‘전공인문학’의 견인을 수긍하는 데로 이어진다. “전공인문학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인문학 교육에 의해서 양성되는 인문학 나름의 상상력과 비판적 사고가 현실과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현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며, “또한 인문학적 소양과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능력을 동시에 갖춘 인문학 전공자를 교육하는 전공인문학이라면 대학에서 필수불가결한 전공으로 기능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고 타 전공과 구분되는 인문학적 전공 전문성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임을 역설한다. 여기까지 이르면, 전인한이 ‘현실과의 접점’에 釘을 갖다 대면서 인문학 갱신을 모색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전문가 위주의 전통적인 전공인문학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이 박쥐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비켜주는 것이다. 인문학 관련 학과가 융합과 통섭의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인문학 전공자들이 집단지성을 작동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해내는 유능한 인재가 되도록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끔, 그리고 인문학 텍스트가 지식의 전수 수단이 아니라 집단지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을 시도하게끔, 그리고 한 주제를 다양한 학제가 참여해 토론하는 팀티칭 교과목을 운영하기 위해, 길을 터주는 것 정도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인문학 위기는 두 가지 사회적 조건과 관련돼”
전인한이 ‘시력 약한 박쥐’의 갱생 길을 아이디어 차원에서 증폭시켰다면, 김명환은 어떨까. 그의 접근은 앞의 전인한과 상반된 것처럼 읽힐 수 있다. 교수업적 평가체제의 불합리함이나 교양인문학 논의의 허와 실을 짚고, 전공인문학의 효용과 가치를 재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명환의 글은 송승철 한림대 교수의 「인문대를 해체하라!」(<안과밖> 제34호)를 겨냥해 씌어졌다).
그는 이렇게 비판한다. “학부 인문학 전공교육의 존립근거에 대한 인문학자 자신이 내비치는 허무주의 내지 패배주의는 시급히 극복돼야 할 사회적 조건 두 가지에서 비롯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하나는 입시경쟁 속에 파행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 중등교육의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강고한 한국의 대학서열구조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행 학부교육의 한계를 경험론적 차원에서 하나씩 짚어가면서 김명환은 전공인문학과 이를 담당하는 건실한 학문공동체 건설을 주문한다.

대학 구조조정은 지금 ‘프라임사업’이 기지개를 켜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사회적 수요를 우선시하는 학과 배치가 가져올 대학의 풍경은 더욱 삭막해질 것이라고 인문학 교수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학과 차원이 아니라 학문 전체 차원에서 ‘문학의 갱신’이 요청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과밖> 제39호가 이 문제를 연속적으로 다뤄온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영문학계를 넘어서 文史哲 학문 분야에서도 성찰과 대안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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