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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은 어째서 더 이상 울리지 않았을까?
자명종은 어째서 더 이상 울리지 않았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6.01.04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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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자 강명관 부산대 교수, 조선의 서양 문물 수용사를 읽다

홍대용은 자명종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수많은 조선 사신이 북경 천주당을 방문했지만, 자명종 누각의 내부를 꼼꼼히 관찰한 것은 그가 최초일 것이다.

▲ 강명관 부산대 교수

안경, 망원경, 자명종은 조선 후기 청나라 북경이나 부분적으로는 일본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온 이국적인 물건들이다. 유리거울, 양금도 이 무렵 같이 들어왔다. 이들은 조선 후기를 살았던 당대의 사람들이 서양을 어떻게 인식하고 생각하고 대했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기기들이다.

흔히 한문학자라면 고전산문이나 고전시가 등 한문학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이들로 생각하기 쉽지만, 강명관 부산대 교수라면 조금 사정이 달라진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이들 주제를 놓고 자료를 모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쉽게 ‘저술’로 나아가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쉽게 원고를 쓰지 못한 것은 언제 어떤 물건이 들어왔다는 식의 범상한 서술을 넘기 위해 챙겨 보아야 할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이들 자료의 배후에 있는 과학사와 기술사에 대한 이해 부족도 저술 지연을 한몫 거들었다고 말한다. 그가 최근에 출간한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휴머니스트 刊)은 과학사·기술사·한문학의 새로운 접점에서 빚어진 흥미로운 시도다.

물론 이 책은 강 교수의 말대로 과학사와 기술사에 대한 저자의 무지로 인해 오류가 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학문적 대화, 그리고 서술의 깊은 맛, 다양한 한문서지의 활용은 빈약한 과학사·기술사 서술에 인접 인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사례로 응집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강 교수는 조선후기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중국(북경)발 ‘서양 문물’의 이동 경로를 두 가지로 파악했다. 하나는 종교-천주교고 다른 하나는 ‘물건들’이었다. 종교-천주교는 그의 말대로 “士族의 일부와 많은 수의 민중을 감염시켰고, 마침내 사족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위협했다.

그것은 분명 사족 체제가 전면적으로 대응해야 할 정도로 사회 전체에 깊고 넓은, 그리고 위험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물건의 형태로 들어온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안경, 망원경, 유리거울, 자명종, 양금 등이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이들 다섯 가지 물건은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어떤 것은 신분과 계층에 상관없이 확산됐는가 하면 어떤 것은 극히 일부 사람들만 인지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물건의 배후에 있는 과학과 기술을 얼마나 이해했던 것인가?” 강 교수가 읽어낸 ‘조선에 온 물건들’ 가운데 자명종을 재구성해본다.
 

▲ 흥선대원군 초상」, 이한철(1812~1880)·유숙(1817~1873) 합작,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그림의 오른쪽에 색을 넣은 안경(수정안경으로 추정됨)이 있고, 왼쪽에 네모난 상자 같은 것이 보인다. 오른쪽이 열려 있어 내부가 약간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자명종의 내부에 설치된 톱니바퀴다. 그리고 위쪽에는 손잡이가 있어서 필요에 따라 쉽게 이곳저곳으로 옮김수 있다. 이 자명종은 추동식이 아니라 확실한 태엽식이다.

자명종: 자명종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문헌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일 것이다. 자명종에 대해 언급한 『續耳譚』(명말의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란 책을 인용하고 거기에 나름의 해설을 추가했다. 『지봉유설』은 1614년에 탈고했으니 이수광은 적어도 1614년 전에 자명종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테오 리치가 북경 거주 허락을 받은 것이 1601년이니, 이수광이 마테오 리치와 자명종을 인지한 것은 대단히 빨랐던 것이다.

자명종의 실물이 조선으로 건너온 것은 1631년 정두원에 의해서다. 중국 등주에서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로드리게스로부터 받아온 물건 중에 ‘열두 번의 시간마다 저절로 우는’ 자명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명종이 어떤 종류의 자명종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36년(인조 14) 7월 김육은 성절천추사로 북경에 파견됐다가 해를 넘겨 1637년 6월에 귀환했다. 북경에서 그는 자명종을 구입해왔다. 추동식인지 태엽식인지는 알지 못한다. 자명종의 작동 원리를 파악한 이는, 김육에 의하면, ‘밀양의 巧匠 劉興發’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파는 자명종’을 구해 궁리한 끝에 운용의 묘를 터득했다고 한다. 김육이 사망한 것은 1658년이니 유흥발이 자명종을 이해해서 제대로 작동시킨 것은 1637년에서 1658년 사이의 일이다. 金(1766~1822)의 이민철 전기인 「이안민전」에 의하면, 이민철은 ‘동래 사람’이 이경여에게 바친 자명종을 분해해 구조와 원리를 파악한뒤 다시 조립했다고 한다.

18세기가 되면 자명종은 더욱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 역시 자명종 즉 시계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1766년 북경 천주당을 방문해 서양 선교사들과 천체망원경을 보고 대화를 나눴던 그가 자명종에 대한 묘사를 직접 남겼기 때문이다(『을병연행록』과 『연기』). 

1788년에서 1789년 사이에 저술된 이덕무의 日本志인『蜻蛉國志』에서 자명종을 일본에서는 ‘時計’라고 부르며, 그중에는 종루 위에 자명종을 놓은 樓時計臺도 있고, 또 품속에 넣을 수 있는 아주 작은 회중시계도 있다고 소개한다. ‘시계’, ‘회중시계’란 명사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과의 접촉이 전면화된 이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사용됐고, 그 이전의 용례는 이덕무의 『청령국지』에서 사용된 것이 최초이자 끝이다. 다만 이덕무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이 어떤 문헌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19세기로 넘어오면 시계에 관한 자세한 문헌이 하나 등장한다.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가 그것이다. 이규경은 이 책의 다양한 글에서 시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대표적인 글은 「自鳴鐘辨證說」이다. 그는 다양한 자명종을 언급했는데, 곧 다양한 자명종을 목도했거나 아니면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명종을 제작한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은 사람은 나경적이다. 나경적도 홍대용과 연관이 있다. 홍대용은 아버지 홍역이 1758년 나주 목사로 발령이 나자 임지로 따라갔다가 그 이듬해인 1759년 유람차 광주 북쪽의 瑞石을 찾아가던 길에 동복현 물염정의 나경적을 찾아갔다. 유명한 자명종 제작자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홍대용은 나경적이 ‘서양의 법’을 따라 만든 자명종을 보고 그 정교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계가 확산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시계에 관한 자료들이 주로 양반들, 특히 경화세족 사이에서만 나타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계가 대단히 널리 사용됐더라면 비양반층과 시계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자명종을 구입할 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는 층이 두텁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경화세족을 제외하면 시계를 구입할 경제적 능력을 가진 층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자명종의 제작 역시 크게 확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자는 관상감에 매인 장인이나 동래 등 부산의 왜관과 가까운 지방의 장인이 한 줄기를 이루고, 양반층이 또 다른 줄기를 이룬다. 다만 양반 출신 제작자는 대체로 양반이기는 하되, 나경적·염영서처럼 지체가 낮은 사족이거나 아니면 최천약처럼 무반직이었다. 각별히 흥미로운 것은 庶派였던 이민철·강이중·강이오의 경우다. 이들의 당시 최고의 양반 가문의 서자, 서손이었다. 자연히 이들은 집안에서 자명종을 볼 기회가 많았기에 자명종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명종, 곧 시계가 좀 더 값싼 물건이 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다.
시계는 조선에 정착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시간은 농업 사회의 시간이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 측정할 필요가 없었다. 24절기만 알아도 충분히 생을 영위할 수 있다. 시간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쪼개지고 측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명종이 수입되던 조선은 여전히 농업사회였다. 요약하자면 자명종 시계는 조선 사회에 맥락 없이 던져진 셈이다. 그것이 자명종의 확산과 제작을 막았던 결정적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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