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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뿜는 술탄의 군대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했다
불을 뿜는 술탄의 군대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했다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12.2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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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54. 셀주크와 오스만 투르크의 서진: 투르크족 세상을 얻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의 화려한 내부.

“지구는 돌고,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도태된다. 변화의 주역이 돼야 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주역이 될 수는 없다.”―정자

 

2012년 2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겨울여행을 떠난 건 몇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구소련시절 중앙아시아는 물론 흑해와 카스피해 북부 등지에서 발굴된 고대 스키타이, 사르마타이 등의 황금 유물이 그곳에 있어서다. 둘째, 묵직한 러시아 바리톤과 베이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로 대표되는 그 동네의 겨울 연주, 공연 문화를 느끼고 싶어서다. 셋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러시아 기행』에서 묘사한 과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모습이 남아있을까 해서다.

모스크바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따주 박물관, 우크라이나 역사박물관 등에서 보낸 시간은 흥분되고 의미 깊은 것이었다. 무거운 줄 모르고 박물관 도록과 필요한 책자를 사들고 오며 나는 무척이나 뿌듯했다. 이미 몇 번이나 본 것이지만 발레의 본향에서 볼쇼이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비롯, 마린스키(과거 키로프), 키예프 발레단의 공연을 본 것은 겨울 한기를 잊기에 충분했다.
인문학 기행 冒頭에 언급했지만, 러시아의 기원은 9세기 후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바이킹의 일파인 바랑고이족이 남하해 드네프르 강변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올레그공 주도 하에 키예프 루스 혹은 키예프 공국(882~1283년)이라 불리는 정치체제가 탄생하고, 후일 키예프 루스의 일부였던 모스크바 공국(1283~1547년)이 세력을 얻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이주하고, 그런 과정에서 선주민들과 갈등하고 타협하고 오버독과 언더독이 생긴다. 역사는 승자인 오버독의 편이고 그들은 자신들에 유리한 역사 기록을 남긴다.

이른바 켈트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다. 할로윈이 바로 오래된 켈트 문화의 흔적이다. 이들은 아리안 인종의 한 분파로 아일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 고지 등에 살고 있다. 지금까지의 정설은 켈트족이 유럽에서 철기 시대가 시작될 무렵인 기원전 800년경에 중부·서부유럽을 중심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외부에서 이주해 온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곳에 살던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발전하면서 형성된 집단이라는 것이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직전 동지중해 지도.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사라진 민족 사라진 나라의 살아 숨 쉬는 역사』(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3)에서 저자는 ‘푸른 눈동자의 거인’ 켈트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켈트족은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며, 짧은 목과 높은 코, 움푹 들어간 눈과 큰 체격을 지닌 백인계 민족이다.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은 켈트족을 키가 크고 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아주 드물게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거인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켈트족은 어디에서 유래한 집단일까. 일부에서는 그들의 원래 고향이 남부 독일이나 우크라이나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언어학적으로 인도 유럽어족(아리안족)의 일파에 속한다는 점으로 미뤄 볼 때,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타고 유럽으로 이동해 왔다는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다. 역사에 켈트족의 이름이 처음 언급된 시기는 기원전 730년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온 ‘켈토이’라는 무역 상인들을 만났다는 그리스인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스인들이 기록한 ‘켈토이’가 바로 켈트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17일 전파를 탄 <KBS> 특집 다큐 「밀크로드」를 통해서다. <KBS> 제작팀이 프랑스 오베르뉴 지역의 한 동굴에서 터키처럼 치즈를 숙성시키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하드 치즈’를 전파한 주인공이 중앙아시아에서 유목하던 켈트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점령했다는 또 다른 동굴을 방문한 제작팀은 1만 년 전 이곳에서 사육한 중앙아시아 염소의 흔적을 목격한다. 프랑스의 밀크 문화가 아시아에서 비롯됐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사람들이 움직이며 말과 문화가 함께 따라간다. 외래문화가 기성의 문화와 접촉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먼저 있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창조라 한다. 중앙아시아 인문학기행은 월지의 서천을 시발점으로 주로 중앙아시아 무대에서 펼쳐진 역사적 사건과 그로 인한 문명의 전파와 교류 과정을 살펴봤다.
이번 글은 우리나라의 자랑 한글의 기원도 자생적이 아니라 문명 교류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조선의 위대한 군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3년 전인 1443년(세종 25년) 12월 이미 세종이 직접 諺文 28자를 창제했고 그 후 신중하게 검토하며 다듬고 실제로 사용해 본 뒤 발표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선 성종조의 학자 成俔(1439~1504년)은 『齋叢話』에서 “세종이 諺文廳을 설치하고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명해 언문을 만들게 하니 초종성 28자다. 自體는 梵字를 본 따 만들었다”고 전한다. 한글의 원형이 된 글자꼴 篆字가 산스크리트였음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와 먼 인도 사이에 오래전부터 문화적 교류가 긴밀했던 셈이다. 세종의 위대한 업적은 백성을 위해 기존의 글자를 정리해 통일된 표준 소리를 자리매김한 데 있다.

나더러 사람들은 ‘비리비리’하다고 한다. 우리말 ‘비리비리’는 인도말 beriberi에서 왔다. 이 말은 영어로 들어가 脚氣病을 의미하게 됐다. 우리말 설날의 어원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건 어떨까? 티베트에서는 새해 첫날을 로사르(Losar)라고 하는데, lo는 ‘year, age’를, sar는 ‘new, fresh’를 뜻한다. 우리말 설날은 티베트말 sar를 차용한 것일 수 있다.

일찍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借字表記法으로 吏讀 혹은 吏書(『帝王韻紀』)라는 것이 있었다. 신라 때 원효대사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인 요석공주 사이의 소생인 薛聰이 만들었다는 이두는 吏道(『大明律直解』), 吏刀(『선조실록』), 吏頭(이두 개설서인 『儒胥必知』), 吏吐(『儒胥必知』), 吏札(『東國輿地勝覽』), 吏文(『典律通補』), 吏套 등으로 이표기 됐다. 이두와 그 외 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과거의 소리는 어떤 것인지를 알면 이두의 정체가 어느 정도 파악될 것이다.

우선 이두 등은 이트(it)가 아닌 리트(-lit)로 읽어야 한다. 이 말은 ‘글’이라는 의미의 梵語 krit가 와전된 것으로 나는 본다. 별로 존재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문자 加臨土 또는 加臨多 역시 동일한 소리 krit의 차용이다. Krit의 말뜻은 ‘writing’이다. ‘holy script’인 Sanskrit는 刪修加臨多로 음차자됐다.

조선이 개국 초의 불안정한 정치를 청산하고 新國이자 태평성대로 나아갈 무렵,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87년 전인 1405년 6월, 명나라 중국은 이미 낯선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永樂帝의 명령을 받은 宦官 鄭和가 이끄는 중국 함대가 대항해시대를 연 것이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했고, 가장 멀리까지 도달한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Malindi)였다. 말린디는 인도양과 접한 케냐의 항구 도시다. 1418년 정화가 이곳을 발견한 후 149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이곳에서 아마드 이븐 마지드를 항해사로 고용해 인도 항해를 이어나갔다. 정화가 지휘한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寶船은 전체 길이가 무려 120미터가 넘는 대형 선박이었다고 한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쪽 바다에 대한 대원정을 준비해 1405년 6월 제1차 원정을 떠났다. 『明史』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44丈(약 137미터), 폭 18丈(약 56미터)에 이르는 대형 선박이 포함된 함선 62척에 승무원 총 2만7천800명이 탑승했다. 훗날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120톤급 3척, 승무원 170명이었고, 콜럼버스의 함대는 250톤급 3척, 승무원 88명에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의 함대였다.

이렇게 시작된 정화의 해양 대원정은 7차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7번째 원정은 영락제의 사후 그의 손자 宣德帝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1431년 12월에 출발해 1433년 7월에 귀국한 뒤 얼마 못가 정화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무렵 서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중앙아시아와 관련된 사건, 역사적 대사건이 발생했다. 1453년 4월 12일,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 군대의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투르크군의 전력은 육상만 해도 16만여 명. 여기에 대규모 비정규군이 가세해 겨우 오늘날의 이스탄불만 남은 비잔틴제국을 포위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기독교 군대(약 7천여. 이중 2천여 명은 서구 상인 등 외국인이었다)는 필사적으로 垓字를 방어했으나 역부족. 2개월 가까이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켰다.

비잔틴 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구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상징인 자주색 망토를 벗어던지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 330년부터 1123년간 존속하던 비잔틴 제국은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돌궐족에 의해. 그러나 사실 그 이전에 이미 비잔틴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태양이 솟는 곳’ 아나톨리아 반도(터키어 Anadolu) 즉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가 차지한 것이다. 셀주크 왕조의 투르크 제국(1037~1194년)은 1037년 투그릴 벡(Tughril Beg, 990~1063년)에 의해 건국됐다. 투그릴은 오구즈 야브구 연맹의 고위직에 있던 할아버지 셀주크 벡(Seljuk Beg)이 길렀다. 그 보답으로 손자는 할아버지 이름을 딴 왕조와 제국을 선물했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이었던 셀주크 왕조의 창건자 토그룰 벡 혹은 투그릴 벡의 이슬람 姓(laqab)은 루큰 앗두냐 와앗딘이다. 이슬람 작명 방식은 악명이 높다. 무엇보다 이름이 너무 길다. 이름 속에 선대의 계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토그룰과 함께 셀주크 제국의 공동 통치자였던 차그리 벡의 온 이름은 아부 술레이만 다우드 차그리벡 이븐 미카일(Abu Suleiman Dawud Chaghri-Beg ibn Mikail)이다. Abu Suleiman은 쿤야(kunya), Dawud는 이름, Chaghri-Beg은 돌궐의 별명이다. 이름 Dawud는 영어로 David에 해당한다. 현대 터키어로는 C¸agri라고 하는 Chaghri는 투르크어로 ‘작은 송골매’ 혹은 ‘도롱태(매의 일종)’라는 뜻이다.

쿤야는 출세한 장남이나 장녀의 이름을 가져다 쓴 어른의 이름이자 일종의 칭호로, 장남 혹은 장녀의 이름 앞에 남자에게는 abu, 여자에게는 umm을 붙여 쓴다. 그러면 ‘아무개의 아버지/어머니’라는 뜻이 된다. 대개 결혼한 여성은 쿤야로 불린다. 예를 들면 ‘알리의 어머니’ 이런 식이다.

토그룰 벡에게는 공식적으로 왕비가 5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형인 차그리 벡(Chaghri Beg, 989~1060년)의 미망인 풀라나 카툰(Fulana Khatun)이었다. 사정은 이렇다. 989년에 태어나 20년간 호라산 지역 총독을 하던 형이 1060년 세상을 버리자 동생인 토그룰 벡이 미망인을 카툰(왕비)으로 삼은 것이다. 명백한 유목민 풍습이다. 이미 술탄(황제)이였던 토그룰 벡은 얼마든지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의 이란 지역인 레이(Rey)에서 자식 없이 죽었다. 죽기 전 그는 형의 아들 술레이만을 입양해 그를 후계자로 임명했으나, 술레이만의 형제인 ‘용맹한 사자’ 알프 아르슬란과 투그룰의 사촌 쿠탈미쉬가 반발했다. 결국은 알프 아르슬란이 술레이만을 밀어내고 쿠탈미쉬를 죽임으로써 계승전쟁은 막을 내렸다. 알프 아르슬란은 1064년 4월 27일에 셀주크 투르크 술탄제국의 2대 술탄으로 등극했다. 비잔틴과의 싸움인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아나톨리아에 투르크족의 정착이 가속화 됐고 동유럽도 투르크족의 판도에 들어왔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몰락 후 흔히 이반 대제로 알려진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 바실레비치가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로서 황제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인 안드레아스의 누이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와 혼인을 하며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비잔티움식의 전제주의를 도입하고 러시아의 대공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 및 정교회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며, 로마 황제의 상징인 쌍두 수리를 러시아의 紋章으로 삼고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로서 정교회의 총본산이 됐다. 러시아 제국이 세 번째 로마라는 생각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러시아인의 마음속에 존속됐다. 이반 3세의 손자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러시아의 차르(tsar)가 됐다. Tsar는 ‘황제’를 가리키는 카이사르(Caesar)의 러시아어 차용어다.

한편 유럽에서는 1492년 스페인 카스티유의 여왕 이사벨라가 남편인 아라곤의 군주 페르난도 2세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사라센 세력을 몰아냈다. 그해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 콜럼버스가 인도 탐험을 위한 후원을 부탁했다. 스페인의 정치와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제시한 조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기사와 제독 작위, 발견한 땅을 다스릴 총독의 지위, 획득한 총 수익의 10분의 1이라는 실현 가능성 없는 제안을 했다. 그렇지만 당시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은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에 더 넓은 선교지역이 필요했기에 콜럼버스를 대신해 여왕을 설득했고 결국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의 요청을 수락했다.

이렇게 도처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1517년 독일, 카톨릭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 앞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 붙이며 종교개혁이 시작됐다. 종이와 인쇄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신부였던 칼뱅도 종교개혁의 물꼬를 텄다. 구텐베르크도 신부였다. 성경을 많은 이들이 읽기를 바라는 그의 바람이 인쇄기 발명이라는 결과를 나았다.

당시, 아니 언제나 유럽은 가난했다. 영화 「향수」의 도입부를 보면 서민의 삶이 얼마나 모진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비율과 정도의 문제지 대중의 삶은 고달프다. 과거에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수탈, 현재는 간접적이고 교묘한 방식의 착취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유럽은 가진 것이 없었다. 대서양을 건넌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인의 탐욕과 잔혹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감자와 고추는 물론, 금과 은이 유럽 각국 왕실로 대량 유입됐다. 그 바람에 유럽은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동방으로의 진출도 같은 결과를 나았다. 중국은 없는 것이 없는 나라였다.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당나라를 거쳐 송대의 개봉은 국제도시였다. 인구도 백만을 헤아렸다. 중국 북송시대 한림학사였던 장택단이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의 청명절 풍경을 그린 「淸明上河圖」를 보면 당시 개봉이 얼마나 번화한 곳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대륙 식민지를 통해 확보한 은으로 영국은 중국에서 청화백자, 비단 등 온갖 물건을 사들였다. 당시는 은본위제 경제였다. 중국산 제품에 열광한 나머지 마침내 은이 동났다. 중국은 은을 감춰두고 내놓지 않았다. 그들은 구태여 다른 나라에서 은을 주고 살 물건이 없었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을 무상으로 중국인에게 제공했다. 아편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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