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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자유의 길 보장하는 제도로 재탄생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유의 길 보장하는 제도로 재탄생할 수 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2.2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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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 출간한 김성국 부산대 명예교수

아나키스트는 천 마디 말보다는 한 가지 직접행동을 더 선호한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을 위한 현실적 과제로서 권력의 폭력화 혹은 폭력적 권력에 맞선다. 구체적으로 모든 권력형 부정부패, 일상적 폭력, 관행적 권위주의, 제도적 억압을 철저히 제거하고자 한다.

2012년 8월 정년퇴임한 김성국 부산대 명예교수(68세)는 오랫동안 강단에서 이론·불평등·산업화 등을 강의해온 ‘사회학자’이지만 그에겐 그보다 더 강렬하게 따라다니는 수식이 있다. ‘아나키스트 연구자’라는 이름표다. 그런 그가 2007년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에 이어 최근 932쪽에 이르는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학사 刊)을 내놨다. 8년 전 그 스스로 밝힌 ‘아나키스트 3부작’의 세 번째 책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이란 중심축을 연결하는 동시에 맥락화 하고 있다. 사회학자라 기본 체력을 갖추긴 했겠지만 그가 이 방대한 지적 영역에서 ‘새로운’ 발상을 보였다는 것은 의외라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김 교수는 이번 책에서 ‘동아시아주의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 책은 어떤 책일까. 김 교수를 이메일로 만났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8년 전인 2007년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를 출간하면서 ‘아나키즘 3부작’을 완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 3부작의 세 번째 책이고, 두 번째 책은 내년에 완성할 계획으로 들었다. 아나키즘 3부작을 구상한 배경이 궁금하다.

“3부작은 한국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 운동의 과거(1부)와 현재(2부)를 설명하고, 나아가 세계적 차원에서 아나키즘의 미래(3부)를 조망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두 번째 책의 내용이 될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아나키즘적 분석은 이미 축적된 상태이기 때문에 수정·보완해 2016년에 출간할 것이다.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탈계급적 시민전선으로서 5·18 광주 민주항쟁의 아나키스트적 차원, 기존 시민사회론 및 신사회운동론의 자유해방주의론적 접근, 한국사회구성의 기축원리로서 ‘국가 혹은 자본’에 대한 손호철 교수와의 논쟁 등등이 포함될 것이다.”

△ 선생님의 책은 20세기 시대정신으로 추구한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한 칼 포퍼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연상케 한다. 선생님은 아나키즘과 자유주의를 연결해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를 제안했다. 국가 개입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자유주의는 접점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를 제안한 건 의외다. 좌우로부터 시선이 곱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어떤 동지는 위험성을 경고했고, 어떤 후배는 나의 변신을 의아해 했다. 그러나 좌우 진영에 있는 진지한 연구자나 활동가들은 오래 전부터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정통과 순수를 고집하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아나키즘은 출발부터 자유 없는 사회주의와 평등 없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양자를 아우르는 제3의 길을 추구했다. 아나키즘의 반국가주의 혹은 탈국가주의는 21세기 전지구시대를 맞아 새로운 정치적 비전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자유주의의 지향점인 최소국가론과 아나키즘의 연방/연합주의가 결합되면 진정한 세계연합의 틀이 짜여 질 수도 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는 아나키즘의 실용화와 자유주의의 급진화를 목표로 삼는 일석이조의 잡종화를 겨냥한다.

아나키즘은 극단적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벗고, 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 보수화하려는 유혹을 떨칠 수 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 3의 길이 기존 좌편향 사회민주주의의 우회전 혁신이라면, 나의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는 기존 좌우를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前衛라고 감히 자회자찬하고 싶다. 잡종사회론자로서 나는 좌우라는 이념구도를 존중하나 그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인이다. 나는 20세기를 대변한 포퍼의 자유주의 정신을 계승하되 21세기 잡종사회라는 변화된 현실과 문명전환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것을 아나키즘의 틀 내에서 더욱 급진화-공고화 시키고자 한다.”

△ 특히 책의 2부 4장 ‘자유주의의 재인식’, 6장 ‘자유주의 비판의 재조명’, 7장 ‘한국의 자유주의 논쟁’ 등 국내외 논자들의 주장을 조명하고, 때로는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는 ‘대화와 토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인상적이다. 국내의 자유주의 비판과 논쟁으로부터 얻은 성과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런 성과가 이 책에 어떤 형태로 녹아들었는지도 궁금하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국내외, 특히 국내 학자들의 주장을 논쟁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월러스틴이나 부르디외, 바디우 그리고 김동춘 등은 비판적 관점에서만 검토했으나, 다른 학자들(차인석, 최장집, 민경국, 박세일, 주대환, 윤평중 등)은 적극적 차원에서 수용했다. 동료 사회학자들(김경동, 배동인, 임현진, 김문조, 정수복, 강수택, 홍승표, 정철희, 김상준, 이철, 김홍중 등)에 대한 소개와 논의도 나의 연구가 소속되는 한국적 맥락을 수립하고, 생산적 쟁점을 발굴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비판적 논쟁과 논의에서 얻은 수확은 현재 거의 무비판적으로 통용되는 반공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선입관과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자유주의자는 스탈린이 확립한 전체주의적 공산독재체제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반공주의자다.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반공주의를 독재체제 유지용으로 활용했다고 해서, 반공(산독재)주의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양자를 분명하게 구분해 사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또한 그 개념의 출처나 원천에 대한 아무런 숙고 없이 사용되는 가운데 현실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과 문제를 초래하는 악마로서 간주된다. 너도 나도 이 저주의 대열에 동참해 신자유주의를 만악의 원천으로 규탄한다. 자유주의적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선동가들이 이룬 수사학적 성공이 아닐 수 없지만, 참으로 근거 없고, 위험천만한 유행이다. 민경국 교수가 이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한다.

최장집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한국적 이념지형에서 합리적 좌파가 도달한 참으로 의미심장한 결실이고, 사회민주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많은 것(특히, 국가주도형 사회의 비판)을 생각하게 한다. 박세일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동아시아적 자유주의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단연 독창적이다. 주대환이 추구하는 과잉 자유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에로의 길은 자유주의(자)의 사회적 책임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만든다. 윤평중의 급진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선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큰 격려가 됐다. 끝으로 차인석의 혁신자유주의는 과거 한국정치사에서 (아나키스트들도 참여했던) 혁신세력의 이념적 지향을 계승할 뿐 아니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도 접합하는 선구적 작업이다. 이 밖에도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구체적인 도움을 받았다.”

△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는 아나키즘과 자유주의의 연결 고리를 개인주의, 특히 佛家의 유아유심론과 슈티르너의 절대적 개인주의에서 발견하면서 집합적 표상인 국가, 계급, 민족, 공동체, 연대, 도덕 등을 허구적 관념으로 철저하게 비판한다. 다소 지나치지 않은가? 동일한 맥락에서 동아시아적 개인주의 또한 과장된 것이 아닐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개인주의는 근대 민족/국민 국가체제의 성립과 (구조론의 한 형태인)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의 흥기와 함께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왜곡되고, 폄하돼 왔다. 그리하여 이기심은 나쁜 것, 자기중심주의는 잘못 된 것, 개인은 국가나 민족을 위해 살아야 할 것, 개인의식은 역사구조적 계급의식에 용해되는 것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일찍이 슈티르너는, 마르크스를 경악과 분노에 빠뜨리면서, 이 모든 집합적 추상개념들은 개인을 억압하고, 기만하는 잘못된 고정관념이라고 외쳤다. 동아시아의 선각자들은 훨씬 이전에 개인의 수신수행과 구도득도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老壯의 위아사상, 佛家의 유아독존과 일체유심조, 儒家의 수신수기가 바로 동아시아 개인주의의 요체다. 유불도가 치자의 술에 동원되거나 국교가 돼 권력화하면서 그것은 집합주의적 논리로 둔갑했을 뿐이다.

개인의 수신이 없다면 제가치국평천하는 공염불이다. 나, 개인이 바로 국가요, 사회요, 공동체다. 국가, 사회, 공동체가 어디에 있는가? 한번 곰곰이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도덕과 연대가 어떻게 생기고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지 의심을 가져 보자.”

△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를 제안한 지적 배경 가운데 ‘자본주의의 진보적 역할’에 관한 생각도 정리돼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는 무소불위의 착취자가 아니라 개인의 잠재력과 욕구를 개발하는 봉사의 이념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이에크와 전략적 동맹을 맺은 것처럼 읽힌다.

“정확한 지적이다. 자본주의는 문제가 많은 사회체제이나 역시 엄청난 잠재력과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경쟁이 협동을 지나치게 압도하고, 상품화 혹은 물신화의 가치가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소위 진보적 역할은 퇴색하게 됐다. 여기에서 우리는 독점자본의 탐욕적 횡포 뿐 아니라 권력독점 국가와 가치독점 종교가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조장한 자본주의의 왜곡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정부패의 직접적 온상이 되는 국가의 경제개입 혹은 정경유착 그리고 종교의 상업화가 초래한 물질주의적 세속화는 하이에크가 기대한 자본주의의 자생력을 억제했다.

자본주의가 창조적 파괴의 혁신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독점자본과 독점(국가)권력의 무소불위를 제어해야 한다. 물론 자본주의는 결코 만능의 제도는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인 개인적 이기심 혹은 爲我에서 비롯되는 협동심과 경쟁력을 최고로 발휘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하이에크가 말한 노예의 길 대신에 자유의 길을 보장하는 경제제도로 재탄생할 수 있다.”

△ 선생님께서는 ‘잡종사회의 도래’라는 현실에 주목해 ‘잡종’을 핵심 키워드로 내세웠다. 이를 통해 ‘탈근대 문명전환’을 모색하겠다는 생각이다. ‘차이를 가진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작용’(잡종화) 속에서, ‘잡종의 존재론적 의의와 가치가 적극적으로 인식되는 사회’(잡종사회)로 진입한 게 21세기 탈근대사회라는 지적인데, 이것이 구체적인 현실 분석의 결과인지 아니면 담론 차원에서의 소망인지 불투명하다. 나라 안팎을 보더라도 여전히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작용은 상호 배제와 불신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잡종사회의 도래라는 주장은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경험적 분석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잡종화는 모든 존재의 속성이자, 사회변화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충돌하면서 잡종화를 야기했고, 문화는 모방과 전파를 통해서 잡종화를 확산시킨다. 이미 전 세계의 네트워크화는 잡종화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하나의 연속적 개념으로서 잡종(화)는 두 가지 혹은 쌍방향 에너지를 갖는다. 한 차원은 융합과 같은 통일적-전일적-구심적 지향성을 갖는 것이고, 다른 차원은 파편화, 혼란화, 이질화와 같은 원심적 지향성을 갖는다. 이합집산이라는 잡종화의 양면적 동태성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가 불신과 적대 속에서 사분오열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적 여유와 정치적 자유가 초래하는 당연한 결과다. 너무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이미 새로운 기운이, 혹은 정치사회적 세력이 굳은 땅을 뚫고 나오는 중이다. 낙관적 비관주의라는 잡종적 시각을 권유한다.”

△ ‘낙관적 비관주의’라는 잡종적 시각을 생각해보겠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는 잡종사회의 확대와 심화에 필요한 다섯 유형의 친구를 상정했다. 타협적 탈국가주의자, 절제적 탈물질주의자, 협동적 개인주의자, 상대적 허무주의자, 현세적 신비주의자다. 이들은 각각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각 기능적 영역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이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 탈국가주의, 탈물질주의, 개인주의, 허무주의, 신비주의를 가리켜 선생님께서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의 동아시아적 가치 지향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조금 설명이 필요하지 않나. 또 이들이 ‘문명전환에 필요한 동아시아주의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도 궁금하다.

“사상사적으로 서구에 대비되는 동아시아의 특징은 탈물질주의, 허무주의, 신비주의적 흐름이다. 막스 베버가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발흥하지 못한 원인으로 주목했다. 탈국가주의와 관련된 아나키스트 전통도 서구에 비해 동아시아가 훨씬 심원하다. 자유주의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주의 또한 불가, 도가, 유가에서 그 진수를 발견할 수 있다. 잡종사회의 다섯 친구를 음양오행에 입각해 구성할 수 있었던 것도 동아시아적 논리의 발현으로 평가받고 싶다. 문명전환의 비전을 극즉반과 천지개벽으로부터 도출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주기 바란다.

이어지는 질문은 핵심을 찌르는 물음이다. 추상적 미래 담론의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합리화가 가능하다. 궁금한 것은 아마 구체적인 현실적 추세를 지적해 달라는 요구일 것이다. 책에서도 독립된 3개의 절을 할애해 언급했지만, 한국, 중국, 일본의 선구자적이고 선도적 역할이 동아시아연합으로 결집되는 현존성과 (결집돼야만 하는 혹은 결집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발견/발명/방법/비판적 지역의식으로서 동아시아주의와 그 제도적 구현으로 동아시아연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문명전환이 이뤄질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중국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잡종화를 (유교의 개인주의적 차원을 적극 활용해)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일본은 脫歐入亞해 (동아시아적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동서문명의 합류를 주도하고, 한국은 분단이라는 전쟁과 폭력을 제거하는 세계평화의 기수가 되는 과정이 바로 문명전환의 과정이 될 것이다. 한중일이 연합해 동방의 등불이 돼 세계의 빛이 되면 그것이 문명전환이다. 동아시아시대가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또 다른 지역패권주의로 빠져들지 않도록 우리는 전력을 다해 투쟁해야 한다. 서구의 동양화(Easternization of the West)가 동아시아의 동양화(Easternization of East Asia)와 화합하는 가운데 세계적 수준의 문명전환이 이뤄질 것이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서아시아로부터도 전환에 필요한 에너지와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

△ 책의 결론이랄까. 잡종화와 아나키스트 자유주의가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자기 성찰의 두 측면으로 ‘삶의 쾌락과 슬픔’, 그리고 이론적 실천으로서 ‘하나와 사랑’을 언급했다. 이게 ‘자기 성찰의 두 측면’이라고 한다면, 국가·지역적 차원에서의 과제 즉, ‘탈권력 사회국가’를 위한 현실적 과제가 있다는 것인데,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들은 자기 성찰의 두 측면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나.

“이 문제를 서구에서는 미시와 거시의 문제로 파악해 그 간격을 방법론적으로 메우려고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대오각성이나 깨달음과 같은 찰나적 비약과 초월로서 경계 넘나들기를 시도한다. 나의 접근을 설명해 보자.

아나키스트는 천 마디 말보다는 한 가지 직접행동을 더 선호한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을 위한 현실적 과제로서 권력의 폭력화 혹은 폭력적 권력에 맞선다. 구체적으로 모든 권력형 부정부패(뇌물, 청탁, 특혜, 월권 등), 일상적 폭력(부모, 교사, 상급자, 폭력배와 범죄/폭력집단에 의한 언어적, 물리적 폭력 등), 관행적 권위주의(가정, 학교, 군대, 직장 등에서의 차별과 배제, 모욕과 무관심), 제도적 억압(개인의 자유권 침해)을 철저히 제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역 감시(counter-surveillance)로서의 시민감시체계와 반란으로서의 시민불복종운동을 적극 활용하고자 한다. 특히 개인의 고유한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각종의 제도적 조치를 폐지해 낙태, 안락사, 동성애, 성노동, 도박, 흡연 및 특정 약물 사용 등의 자유를 확대시키려고 한다.

이와 같은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서의 구체적 자유를 위한 구체적 투쟁은 그 자체가 현실적 유토피아의 시작이라는 점에서는 삶의 즐거움이 되지만, 그것이 기약 없는 내일을 기다리지 못하는 무관심 속에서 혹은 배신 속에서 좌절되기 십상이라는 허무한 예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야만 한다는 사실은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지만, 계속해서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기쁨이다.

이 희비가 뒤섞여 있는 자유의 길은 남을 사랑해 ‘남과 하나 되기’라는 희로애락을 벗어난 무아지경을 찾는다. 너무 기뻐 흘리는 눈물이나 너무 슬퍼 웃을 수밖에 없는 경지는 사랑의 미로(迷路? 美路?)와 연결된 끝도 시작도 없는 하나의 세계를 찾은(신인합일로 득도한) 사람들의 천국이요 극락이다. 여기서 인간사회의 무지와 개인의 죽음이라는 사실과 연관된 허무의 의미를 다시 강조하고 싶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허무에서 (아나키스트 하기락을 따라서) 허유를 발견하나 어쩔 수 없이 다시 허무로 돌아온다. 허무에 안(허)락(무) 할 수 있다면 삶이 평온할 것 같다.”

△ 그간 다양한 사회활동에도 참여해오셨다. 이런 사회활동 경험은 저술 작업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회과학의 위기를 자성하는 학문 공동체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구체적 실천 활동의 연결선상에서 사회과학적 연구, 글쓰기가 확대되는 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선생님의 연구, 글쓰기와 현실 활동의 관련성이 조금 궁금하다.

“사회활동이 나의 학문적 성숙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한다. 촌음을 아껴 공부하는데, 특히 가르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사용해야 했다. 이른바 지식인의 적극적 앙가주망과 성실한 연구교육을 병행하기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사실 제대로 된 학자라면 두문불출 일편단심 용맹정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지식인의 현실참여가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처량한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다. 고학력 전문가가 희소했던 나의 시대에는 그래도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수요도 높았고, 만족도 또한 괜찮았다. 오늘날 지식정보사회에서 지식인의 대중에 대한 계몽적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이제 학자는 연구와 교육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정상이고, 정도이다.

사회과학 혹은 인문학의 위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위기는 항상 존재했고 단지 시기별로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학문 자체의 위기라기보다는 제도로서의 대학교육이 직면하는 위기다. 갈팡질팡 구태의연한 교육부, 경기침체와 대학생의 취업난 및 이에 따른 비인기학과의 생존문제, 교수충원 및 강사 처우 문제, 교과내용과 교육방식 등등의 학문 외적 위기를 학문의 위기로 인식하고 있다. 사회학과 교수와 학생이 위기에 처했다고 해서 사회학 자체가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다. 학문의 위기는 문명의 위기라는 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학문공동체라는 말은 듣기에는 그럴 듯하나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대학은 선거판으로 난장판이 되고, 이념적으로도 갈라져 있다. 이것이 대학의 진정한 자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판적이되 소통적 토론의 분위기, 관용과 존경의 미덕, 경쟁과 협동의 조화 대신에 독선과 아집, 증오와 분노가 대학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까운 세태이지만, 나 또한 별다른 묘책이 없다.”

△ 사회과학 분야는 여타 학문 분야에서보다 더 ‘탈서구중심주의’, 학문의 종속성 극복 논의와 담론들이 제기된 곳이다. 오랫동안 이론·불평등·산업화 등을 강의해오셨는데, 이 점에서 한국 사회과학, 좁게는 한국 사회학의 갱신을 위한 제언을 듣고 싶다.

“사회과학 전반을 거론할 능력도 없고, 입장도 아니다. 다만 사회학에서 서구이론에 대한 추종주의는 여전하다. 이와 동시에 한국발 이론, 동아시아적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사실 서구이론은 여전히 매우 강력하고 세련됐다. 그러나 서구문명의 쇠퇴와 함께 서구적 비전이나 관점은 차츰 진부해 지거나, 수사학적 공허함으로 빠져든다. 일종의 논리적 한계나 지적 딜레마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서구는 이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델도 아니고, 의지해야 할 대안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깨우치고 있다. 우리의 길은 우리 스스로 우리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한 가지 방안을 제안해 보고 싶다. 연구자는 논문 작성에서 동료, 선배, 스승의 연구를 멀리 까지 추적해, 거기에서 한국적 맥락을 잡고, 쟁점을 발굴해 전개시키면서, 가끔 서구문헌을 양념으로 뿌리되, 한국적으로 문제풀이를 시도하는 것이다. 교실에서는 서구의 이론/대가들에 대한 소개를 현재의 절반 혹은 삼분의 일로 팍 줄이는 대신 동아시아나 한국 학자의 연구를-그것이 비록 빈약하더라도-대폭 소개할 필요가 있다.

최근 젊은 사회학 연구자의 연구수준은, 전혀 과장 없이 말해, 세계적이다. 참고문헌에서 서구학자보다도 한국학자의 관련 연구를 가능한 인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적 연구가 축적되고, 한국적 이론맥락이 형성되며, 이 과정에서 한국발 이론이 탄생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아끼고 키워야만 우리 이론이 나온다. 그것이 멋지고 좋은 이론이면 바로 세계적 이론이다.”

△ 앞으로의 저술 계획이 있다면.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오랜 꿈은 이병주와 이문열의 소설에 내장된 아나키스트적 차원을 사회사적으로 분석하고 비교해 보는 것이다. 탈이념주의자 이병주는 일제하에서 아나키스트들과 동일한 시대경험을 공유하면서 아나키즘을 대면했고, 자유주의자(?) 이문열은 부친의 이념적 선택에 따른 방황과 갈등 속에서 아나키즘에 한 때 경도돼 이를 체험했다. 위대한 두 소설가의 이념적 지평을 풍요롭게 확장시키는 것도 유의미한 작업일 것 같다.”

 

김성국 교수는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사, 석사)와 미국 인디아나대(박사)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부산대에서 이론, 불평등, 산업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한국아나키즘학회, East Asian Sociologists Network(동아시아사회학자네트워크), 한국동아시아사회학회 등의 창립에 참여했고, 한국사회학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해양위원회 위원장 및 평화반핵군축시민연대의 공동 회장이다. 최근의 사회학적 연구로는 A Quest for East Asian Sociologies(동아시아 사회학의 탐구, 2014)를 리페이린(李培林), 슈지로 야자와(矢澤修次郞)와 공동 편저했고, 아나키즘 연구로는 『아나키·환경·공동체』(1998),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2007),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2012) 등의 단독 및 공동 저서가 있으며, 번역서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콜린 워드)를 곧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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