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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베끼기가 초래할 미래…학문공동체 상실된 멀티버시티
미국베끼기가 초래할 미래…학문공동체 상실된 멀티버시티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1.02.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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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05 18:16:11
두뇌한국(BK)21사업이 제안됐을 당시 일각에선 이런 비관적 전망이 쏟아졌다. “지원의 불균형은 2차적인 문제이다. 이것이 과연 우리네 대학 정서와 구조에 맞는지부터 숙고해야 한다. 교육과 연구가 딴 몸이 될 수 있는가.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을 보라. 오히려 학부교육이 중시되고 있고, 연방정부로부터 탈출해 자유로운 연구를 원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

BK21사업이 목표한 바, ‘연구중심대학’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학개혁정책을 관통하는 핵심코드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이는 다분히 미국식이다. 이 계획 성안에 참모역할을 맡았던 교수들역시 현재 미국의 주요 연구중심대학에서 활동중인 한국계 학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업이 당초 비판처럼 맞지도 않는 외국의 모양 베끼기에 그쳐 부작용만 키울 것인지, 정책당국의 염원대로 한국 대학의 모습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것인지는 현재 미국의 현실을 통해 예측할 수 있다.

최근 눈여겨 볼 두 번역서가 출간됐다. 하나는 이형행 연세대 교수(교육학과)가 번역 소개한 클라크 커어 전 캘리포니아 대학 총장의 ‘대학의 효용 : 연구중심대학’(학지사 刊)이고, 다른 하나는 김정휘 춘천교대 교수 외 1인이 번역한 아리모토 아키라 히로시마대학 교수의 ‘대학교수의 자화상’(교육과학사 刊)이다. 전자는 저자가 캘리포니아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하버드대학 갓킨 강좌에 초빙돼 강연한 내용을 이후 4번에 걸쳐 보완한 것으로 미국 연구중심대학의 역사서에 가깝다. 후자는 카네기 교육진흥재단이 90년 초반에 진행한 세계의 대학교수 국제비교 연구조사의 결과를 묶은 것으로 각국 교수들의 현실적 차이를 읽어낼 수 있는 자료집이다.

연구중심대학의 그림자

‘대학의 효용’에서 클라크 총장은 미국 연구중심대학의 출발을 1876년 D.C. 길먼으로부터 시작된 존스 홉킨스대학으로 잡고 이후 역사적 과정에서 이들 대학이 어떠한 질곡을 겪어 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은 전통적 교양교육에서 출발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이나, 사회적 관계속에서 실용적 지식에 주목한 독일의 베를린 대학, 그리고 현대의 대학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때문에 클라크 전 총장은 이를 구별해 ‘멀티버시티’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의도한 바는 체제의 다양성이 아니라, 이념의 다양성에 가깝다. “멀티버시티는 일관성이 결여된 조직체이다. 단일 공동사회가 아니라 여러 개의 공공사회로 이뤄진 복합체”라는 그의 말은 진리탐구라는 하나의 목표로 모였던 유기체적인 대학의 모습은 더 이상 멀티버시티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미국의 연구중심 대학은 급격히 팽창했다. 전쟁이후 계속된 냉전구도속에서 미국은 산업과 과학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에 필요한 선진 기술을 연구중심대학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함으로써 얻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주요 연구중심 대학이 이·공학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본다면 20세기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은 주목받을 만한 성장을 보여줬다. 하지만 대학 내적으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클라크 전 총장은 “대학 그 자체는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잠재적인 피해자”라고 지적한다. 크게 보면 연구중심의 강화는 곧 교육의 홀대를 낳고 이는 곧 기계적 접촉이 따스한 인간들간의 상호작용을 대신해 교육의 인간성 상실이란 결과와 교육의 질 저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중심대학의 교수는 연구비 확보를 위한 경쟁에 내몰리고, 세분화된 전문화만 있을 뿐 ‘통합된 지적세계’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클라크 총장의 지적이다.

90년대 들어 미국의 연구중심대학도 조금씩 위험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학부학생들에 대한 교수들의 무관심, 대학공동체 의식의 상실은 대학내 구성원들의 지위를 점점 대결구도도 만들고 있다. 탄탄하게 뒤를 받쳐온 연방정부의 지원도 갈수록 불투명하다. 종국에 이르러 클라크 총장은 “너무도 많은 저질의 활동을 해왔던 ‘멀티버시티’ 속에서 ‘멀티’를 뽑아내야 한다”면서 “학자들의 통합된 지성 공동체라는 의미를 상시하지 않은 대학이 점점 유리해 질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국교수, 드높은 자부심 이면에는 암울한 현실

또 하나의 역서 ‘대학 교수의 자화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교수들에 비춰 우리나라 대학교수들이 처해 있는 현실적 상황이다. 세계 14개국 2만여명의 교수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한 내용을 분석한 이 연구서에 따르면 한국 교수들의 급여 만족도는 10번째이고, 시설 및 설비에 대한 만족도는 최하위를 기록했다. 또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정부가 교육정책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우리나라 교수들이 그리고 있는 자화상은 어느나라 보다 자부심에 차 있다. 사회적 존경도와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우리나라 교수는 큰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림 참조>결국 두 역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교수와 미래의 대학의 모습의 유기적인 조화이다. 뒤떨어지는 환경을 짊어지고, 위험성이 큰 외국의 대학의 모습을 그대로 차용해 올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안길찬 기자 chan121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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