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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승인 2015.12.14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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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2009년 역사비평사가 일본의 사상가 니시카와 나가오의 저서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과 문화』를 발간한 것은 21세기 첫 십년 간 우리 지성계를 풍미한 탈민족주의 담론의 클라이맥스와 같았다. 원서의 제목은 『지구시대의 민족-문화이론: 탈‘국민문화’를 위하여』로 1995년에 출간됐지만 한국어본은 시대의 조류에 부응해 한껏 논쟁적인 제목을 붙였다. 탈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니시카와의 저작들은 이미 국내에 소개된 상태였다. 2002년에 『국민이라는 괴물』, 2006년에 『국경을 넘는 방법』이 출간됐다. 1990년대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른바 ‘세계화’가 정치적, 사회적 화두로 등장한 이래 편협한 민족중심주의를 넘어 세계시민적인 정체성을 모색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건만 참으로 아득하게 느껴진다.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은 장 자크 루소의 예를 따라 근대 국가와 국민문화를 ‘쇠사슬과 꽃장식’에 비유한다. 어떠한 형태를 띠던 근대적 주권국가는 특유의 국가이성과 국민통합이라는 논리로 인간을 옭아매는 쇠사슬이다. 물론 그것은 녹슨 철이 아니라 ‘문명’과 ‘문화’라는 화려한 꽃으로 장식돼 있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탄생한 신조어인 이들 개념은 국민국가 원리에 깊이 침투된 기만적 국가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니시카와의 견해다. 이렇게 볼 때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자는 구호는 주권국가의 작동원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나라의 국민을 그만둔다는 것은 문명사회의 일원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함을 의미한다. 국민이 아니면 세계시민도, 아니 개인도 될 수 없는 것이다.

니시카와의 저작은 현 시점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실 지금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버겁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국가정체성 교육’을 강화하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대통령의 엄호 하에 추진되고 있는 작금의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세월을 역행해 헌법1조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항목에 매달리는 상황 속에서 국민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실로 고아가 가출하는 격이다. 어쩌면 불쌍한 고아에게는 제대로 된 보살핌이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서둘러 국민 자격을 포기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국가의 국민이 되기를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회학자 박명규의 저서 『국민·인민·시민: 개념사로 본 한국의 정치주체』 (소화, 2014)는 독일 역사가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개념사 방법론에 기대어 이 땅의 정치적 변동과 연동돼 있던 주요 개념들의 변천사를 천착했다. 국민, 인민, 시민 개념은 전통사회의 오랜 경험에 기초해 의미를 구성해갔던 동시에 미래로 향한 정치적 전망을 담아왔다. 특히 ‘국민’ 개념은 19세기 말 이래 독자적인 근대국가를 수립할 필연성과 기대를 담지해 왔으며, 한편으로는 권력집단의 정당화 논리로,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적 저항과 권리의 근거로 효능을 발휘했다. 이처럼 ‘사회적 변혁과 전환의 동력’으로서 국민 개념이 유효했다면, 앞으로 좀 더 나은 국민국가, 즉 풀뿌리 자치와 공공성에 기반을 두는 시민공화국으로의 길을 택하는 편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시민’이라는 언어의 마력에 현혹되지는 말자. 프랑스대혁명기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비롯된 ‘공민(citoyen)’이라는 의미의 시민은 국가로부터 ‘주권’이라는 자격을 획득해 국법과 전체의 의지에 복종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자.

개별적 다양성과 보편적 연대성의 조화를 지향한다는 비판적 세계시민주의는 오로지 국민이라는 자격을 얻을 때만 유효하다. 국가에 의해 시민권, 인권, 생존권을 보장받는 국민의 반대말이 바로 ‘난민’이다. 국민을 그만두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난민 신세가 된다. 문명인과 개인의 자격을 상실한, 그야말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저서 『난민과 국민 사이』 (돌베개, 2006)에 따르면, 국민국가의 정상적인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얻지 못한 ‘半난민’ 신세의 재일조선인의 ‘뒤얽힌 정체성’이야말로 이른바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본질이다. 재일조선인에게 ‘민족’이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식민지배, 고향상실과 이산, 민족분단, 차별과 소외 등 갖가지 고난의 경험에서 비롯된 역사적 산물이다.

이러한 난민으로서의 민족 경험을 국가권력 아래 억압하는 것이 바로 ‘국민화의 폭력’이다. 이는 단순히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고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 침탈과 식민지배가 야기한 근현대사의 질곡 전체에 통째로 맞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 책의 國譯은 21세기의 첫 십년 간 우리지성계가 도달했던 고뇌의 지평을 보여준다. 역사적 경험의 의미를 세심하게 성찰하는 가운데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국민국가의 대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2015년이 저무는 이때 유신으로 회귀한 국가의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이 참으로 절실히 요청된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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