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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종착점 ‘자유’를 향한 여정과 여정에 들어선 인간의 운명
궁극의 종착점 ‘자유’를 향한 여정과 여정에 들어선 인간의 운명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2.14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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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 43강. 석영중 고려대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최근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를 출간한 석영중 고려대 교수(노어노문학과)가 지난 5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 43강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제작 『죄와 벌』의 의미를 평한 말이다. ‘소설 이후의 양식’을 개척했다는 문학적 평을 받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특히 그 가운데서도 인간 본성의 문제를 천착한 『죄와 벌』을 놓고 석영중 교수는 ‘자유에 관한 성찰’이란 프레임으로 꼼꼼하게 접근했다.
석 교수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2013), 『뇌를 훔친 소설가』(2011),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2009),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2009) 등이 있다. 역서로는 『뿌쉬낀 문학작품집』, 『분신』, 『가난한 사람들』, 『마야꼬프스끼 선집』 등 다수가 있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슈킨 메달을 받았으며 제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석 교수의 강연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Portrait of Dostoyevsky by Vasily Grigorievich Perov, 1872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Fyodor_Dostoyevsky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세 가지 뚜렷한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는 인간에 대한 관념, 그리고 두 번째는 신에 대한 관념, 그리고 세 번째는 자유의 테마다.

첫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인간은 무엇보다도 완결되지 않고 최종화 되지 않은 존재다. 그는 인간의 완결성과 통일성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의 소설 속에서 하나의 인물을 다각도에서 동시에 고찰할 수 있는 ‘분신’이라고 하는 특수한 현상을 창출한다. 예를 들어, 한 인물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제2의 자아(alter ego)’는 분신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한 명에서 여러 명에 이르는 분신을 갖는다. 둘째, 도스토예프스키는 익히 알려진 대로 러시아 문학 사상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작가이다. 그의 대작들, 즉 5대 장편은 모두 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뿌리에서 자라나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의 소설에 개입해 러시아 문학 사상 가장 종교적인 소설들을 만들어냈다. 셋째,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신에 대한 이해는 자유의 테마에 수렴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러시아 작가들 중에서 자유에 관해 가장 많이, 가장 끈질기게,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쓴 작가이다.

『죄와 벌』은 유배 후 쓴 대작 시리즈를 여는 첫 장편 소설로 1866년 잡지 <러시아 통보」>에 연재됐다가 1867년 단행본으로 나왔다. 『죄와 벌』에는 앞에서 살펴본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세계의 세 가지 특징이 그대로 들어있다. 소설은 어느 가난한 휴학생의 도끼 살인을 중심으로 인간이 그의 존재를 옥좨는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의 인물 라스콜리니코프

작가이자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추구했던, 그리고 성찰했던 자유의 모든 문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녹아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무엇보다도 자유에 대한 욕구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살인은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돈의 부족과 거기에서 오는 부자유, 부자유에서 유발된 분노, 그리고 부자유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에서 촉발된다. 우선 돈이 있어야 여기서 나갈 수가 있다. 모든 갈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돈의 부족만이 아니다. 그의 ‘작은 방’은 물리적인 감옥이자 동시에 심리적인 감옥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러시아에 유행했던 한 사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정의를 위한 해결책을 한동안 러시아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벤담식의 공리주의에서 발견했다. 영국 사상가 제러미 벤덤에 의하면 개인의 행복이 증가하면 할수록 개인이 모인 집단인 사회의 행복도 증가한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행복 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요구된다. 어떤 행동으로 인해 쾌락이 극대화돼 행복이 극대화되면 그것은 선이다. 반대로 어떤 행동으로 인해 고통이 극대화된다면 그것은 악이다. 벤덤의 이론을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에 적용할 경우 그 살인은 공리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 된다. 한 사람의 쓸모없고 사악한 인간을 제거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공리가 증가된다면 그것은 선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살인의 세 번째 동기인 초인 사상이 등장한다. 초인사상이란 다른 말로 ‘비범한 인간 사상’이라고도 지칭되는 생각이다. 1860년대 러시아 청년들 사이에는 ‘비범한 인간’ 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초인사상을 발전 시켜 ‘人神(Man-God)’으로 재정립한다. 인신은 초인의 다른 말, 곧 신처럼 된 인간이다. 인간을 신처럼 높여주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힘, 그리고 거기서 오는 교만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신의 교만이 불러 오게 될 세상의 종말을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꾸는 환상적인 꿈을 통해 경고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원칙에 의한 살인인가? 이념 살인인가? 아니다. 원칙과 이념은 표면적인 동기일 뿐이다. 그의 살인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행위이다. 이념의 바닥에는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는 욕망과 교만이 자리잡고 있다. 비록 돈이 없다하더라도 그가 만일 자신이 ‘비범한 인간’임을 온 세상에 입증해 보인다면 그는 심리적인 감옥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살인을 향해 치닫는 라스콜리니코프는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살인의 관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는 살인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 살인이 추악하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다. 내면의 선과 살인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그런데 살인 후 그는 자신이 기대했던 그 느낌, 곧 존재감의 실현 대신 다른 느낌을 체험한다. 그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엄습해오는 것은 무서운 혐오감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라스콜리니코프가 혐오한 것은 ‘살인 이후’의 자기 자신이다. 그는 범죄 후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돌아보면서 결국 자신은 초인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 후에 깨닫는 것은 자신이 대량학살을 밥먹듯이 해치우는 거인들, 초인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사람들 대열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이다.

작가의 시각적 성향과 소설적 공간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엇이든 시각적으로 형상화 하는 경향이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형이상학적인 사상, 이념, 시쳇말로 ‘뜬구름 잡는 얘기들’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사물이나 인물로 가시화되지 않는 사변적이고 현학적이고 추상적이고 신비한 내용은 거의 없다.

■ 방: 감옥의 은유

‘작은 방’은 사실상 라스콜리니코프의 현 상태를 말해주는 핵심어다. 방은 너무 좁아 문자 그대로 옴짝달싹하기가 어렵다. 이곳은 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움직임조차 확보되지 않은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방은 또한 내면의 감옥같은 상황을 반영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설익은 사상, 증오, 상처받은 자존심과 존재감은 심리적 감옥이 돼 그를 압박한다. 살인 후에 그는 또한 죄라고 하는 윤리적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문턱을 넘어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살인을 향해 가는 첫 걸음이다. 특히 러시아로 ‘죄’라는 단어를 상기해본다면 문지방을 넘어 나가는 행위는 무척이나 광범위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죄’를 의미하는 러시아 단어 ‘prestuplenie’는 ’넘어가다(prestupit)’에서 파생됐다. 그러나 ‘넘어가기’는 영성의 영역에서 자유를 향한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 광장: 자유로 가는 관문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으로 인해 세상과 단절돼 이를테면 ‘독방’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가 자유를 찾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아의 감옥에서 나와 광장으로 가야한다. 그는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고 삶과의 인연을 되찾아야 한다. 광장은 삶과 죽음이, 파멸과 갱생이, 자유와 영원한 구속이 결정되는 공간이다. 감옥이 부자유의 은유라면 광장은 자유로 나가는 관문의 은유이다. 광장은 사시사철 사람들로 북적대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광장으로 나간다는 것은 단절을 극복하고 세상과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연결이야말로 자유로 가는 지름길이라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광장을 『죄와 벌』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자 공간 상징 중의 하나로 설정했다.

■ 강: 결정의 공간

그에게 강 건너의 저 먼 곳은 ‘신의 세계’이자 ‘자유의 세계’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배시절 이르티쉬 강변에서 ‘시각적’으로 체험한 ‘자유의 세계’를 『죄와 벌』속으로 고스란히 들여온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강은 실재하는 공간이며 또한 자유와 비자유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그들은 강변에 서서 마음 속으로 강을 건너 저편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강 이편에 남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강은 ‘결정의 공간’이다.

■ 시간

시간을 신의 선물이자 치유의 힘으로 이해할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궁극적으로 시간의 문제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 축 위에서 해방돼야 한다. 『죄와 벌』의 근원적인 의미, 그 핵심에 있는 자유와 해방의 의미는 시간의 문제와 얽히면서 가장 심오한 차원을 드러내 보인다. 강 건너의 ‘다른 세상’은 ‘다른 시간’에 대한 공간적 대체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이토록 억압적인 시간에서 해방돼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가 갱생의 순간을 체험하기 직전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시간 축 상에서의 심리적인 ‘넘어가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맺는 말

그에게 자유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본능으로서의 자유다. 그것은 ‘자유욕’이라 명명될 수 있다. 이 자유는 그 자체로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본능이다. 다른 한편으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자유는 ‘자유욕’과는 정반대되는 어떤 것, 본능의 극복과 최고의 도덕적 상태를 향한 지향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따르면 “진정한 자유란 궁극에 가서는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인간이 스스로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도덕적 상태를 획득할 정도로 자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를 극복하는데 있다”(XXV: 62). 요컨대 자유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동안 인간의 존엄성을 방해하는 탐욕과 공포, 이기주의와 집착, 좌절과 절망과, 증오와 분노와 불안을 딛고 일어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거쳐 사랑과 용서와 이해와 인정과 나눔과 베품의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자유는 ‘타인과 모든 것을 나눠 갖고 타인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이다(XXV: 62).

도스토예프스키가 강조하는 것은 최고의 가치로서의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언제나 ‘자유를 획득한 인간’이 아니라 자유라는 궁극의 종착점을 향한 여정에 ‘들어선’ 인간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자유를 향한 중단 없는지향, 자유라는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한 자유의 본질이자 『죄와 벌』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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